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지음, 박아람 옮김 / 기이프레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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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는 삶의 음영을 수시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따금 마음의 눈에 편광 필터를 장착한 채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신의 외관이 아닌 내면을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핀다는 건 낯설고 번거로운 일일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마음에 난 상처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의 크기도, 발병의 원인이나 시기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는 게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에 순진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으로 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타인의 그것처럼 데면데면하고 푸접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긴요한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있던 근육이 나이와 함께 소실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없던 마음의 근육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작별을 고하기도 하고, 종국에는 나만 홀로 남겨진 듯한 세상이 머지않은 시기에 도래한다는 건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영화, 음악, 명상,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달리기가 그 역할을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책을 싫어하지 않는 나로서는 여러 작가의 글을 통해 나의 내면을 살피는 데 익숙할 뿐이다. 그와 같은 역할을 했던 작품은 읽고 지나친 후에도 가끔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에 읽었던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모름지기 좋은 책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거나 연상되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으로 인해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소환하게 되는 책. 그렇게 소환된 소설 속 한 장면으로 인해 나의 내면이 자연스레 내 의식의 벽면에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일.


"사고 차량에 늘어져 있던 남자는 내가 지나갈 때 아직 살아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그가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에 조금 익숙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요란하고 무례하게 코를 골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부글부글 나왔다. 그런 숨조차 많이 남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알았지만 그는 몰랐고, 그렇기에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 지상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측은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내게 말할 수 없고 나는 현실이 어떤지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 그 점이 내게는 지독히 측은하게 느껴졌다."  (p.30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자동차 사고'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평범한 이의 삶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예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20대 내내 마약과 술에 중독된 채 살았던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듯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삶이 부러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서지고 흩어져서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삶'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이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반짝이는 그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삶, 이를테면 허물어지고 한없이 흐트러진 삶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제공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삐뚜름하게 보인다. 구멍이 숭숭 난 스웨터처럼 온전한 모습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인에서는 그런 순간이 많았다. 오늘이 어제인 줄, 어제가 내일인 줄 착각하는 순간. 왜냐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비참하다고 여기며 술을 마셨으니까. 우리는 그런 무력감,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는 수갑을 찬 채로 죽을 터였다. 결국 우리의 삶은 강제로 종지부를 찍을 터였고 심지어 우리 잘못도 아닌 일로 그렇게 될 터였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늘 터무니없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곤 했다."  (p.63 '보석(保釋)'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편집 또한 기괴하다. 소설의 목차는 책의 가장 뒤편에 배치되어 있고,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 역시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독자는 단편소설의 제목도 모른 채 본문부터 읽기 시작하여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제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편집 방식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독자라면 제목이나 목차를 먼저 확인하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을 보면,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사고', '두 남자', '보석', '던던', '일', '응급실', ';더럽혀진 결혼', '다른 한 남자', '해피아워', '시애틀 종합 병원에서 본 굳건한 손', '베벌리 요양 병원' 등 11편이다. 소설은 지극히 짧은 소설에서부터 적당히 긴 소설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하다. 소설은 사실과 환각이 뒤엉키고 시제 역시 불분명한 까닭에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서술하지 않아 잘려나간 듯한 부분 역시 독자의 상상력으로 자연스레 메워지게 된다.


"내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10시간, 12시간, 그 정도였다. 나는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 치료 모임에도 나갔으며, 지역 알코올 중독 수용 센터에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고, 사막의 봄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베벌리 요양 병원의 원형 복도는 마치 이승의 삶들 사이에 머무는 곳처럼 느껴졌다. 한 생을 살고 난 뒤 돌아와서 다른 영혼들과 뒤섞인 채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곳."  (p.181 '베벌리 요양 병원' 중에서)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삶은 되돌아보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마치 '남의 눈에는 티, 내 눈에는 들보'라는 격언처럼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을 읽다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 '왜 그렇게 살아?'라고 비난할 사람이 혹여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교황이나 달라이라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사람을 주위에서 볼라치면 어느 영화의 시니컬한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충고하는 게 맞을 듯하다. 데니스 존슨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인생도 이들과 다를 게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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