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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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헤매는 것도 정말 못할 짓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평소에 자주 방문하는 식당만 주구장창 다니게 된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로 입맛까지 잃을 판인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여러 날 같은 음식만 먹다 보니 물린다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리하여 어제는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한 목적으로 차를 운전하여 외곽으로 나갔다. 메뉴는 순대국밥. 그리 특별한 메뉴도 아니지만 순대국밥을 하는 식당마다 맛은 천차만별이라 흔한 메뉴일수록 늘 찾게 되는 식당만 가는 게 국룰이라면 국룰.


어제도 그런 경우였다. 우리가 자주 가는 순대국밥집은 주 메뉴인 순대국밥과 함께 두툼한 계란말이를 각자에게 한 접시씩 내주는 게 일반적인데, 예전에는 계란말이가 손님이 원하는 만큼 리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식자재값이 오른 탓인지 1인 1 계란말이로 한정이 되어 조금은 아쉽다는 말이 도는 그런 식당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는 이따금 찾는 우리를 기억하시는 듯 반갑게 맞아주셨다. 테이블마다 가득 찬 손님들로 식당 내부는 전처럼 북적였고, 손님의 요구에 일일이 응대하느라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힘드시죠?" 하고 물었더니 "아이고, 힘들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을 긴데." 하시며 우리를 빈자리로 안내하셨다. 각자 주문을 하고 메뉴가 나오기 전에 각자 계란말이를 한 접시씩 받았는데 다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이를 본 주인아주머니는 손님 모두 리필을 해줄 수는 없고, 아까 전에 말을 예쁘게 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만 계란말이 한 접시를 더 내주시는 게 아닌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계란말이 한 접시를 공짜로 얻는 형국이었다.


"별것 아니었는데 밥 먹다 생각하니 은근히 기분 나쁜 말, 그런 말이 힘 있는 말이에요.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난 괜찮아......' 한대요. 그러고는 퍽 쓰러지지요.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는데, 나중에 '아!' 싶은 것이 좋은 말이에요."  (p.35)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그야말로 우연히 읽게 된 책이지만 읽을수록 맛이 나는 책이다. 시도 잘 안 읽는 주제에 시론집이 가당키나 하느냐 타박할 이도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성복 시인은 자신의 시론집을 씀에 있어서도 뭔가 달라도 크게 달랐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시인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우리말의 수요자인 대한민국의 전체 국민들을 위한 올바른 말 사용 비법서이기도 했다. 나처럼 말이 어눌하고 상황에 맞지 않게 툭툭 던지는 통에 실수도 잦은, 이를테면 언어 학습 부진아인 나에게는 이와 같은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 학습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p.95)


이 책 <무한화서>는 시론집이라기보다 국어 설명서이거나 올바른 국어 사용법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시에는 젬병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시와 가까워지고 시를 더 잘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시 안내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시를 통하여 시인이 체득한 삶의 지혜가 시론을 핑계로 가득 펼쳐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라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던 내가 이렇게 홀딱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으니 말이다. 한 분야에 특화된 장인의 공통점은 결국 서로 다른 분야에서 얻은 삶의 지혜일지언정 궁극에 이르러 그 결과는 서로 비슷한 면모를 보이게 되고 그 분야의 후배나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역시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성복 시인도 다르지 않았다.


"시와 인생과 진리는 같은 거예요. 모두 손댈 수 없는 것들이지요. 시와 인생과 진리는 불가항력이에요. 만약 그것들을 조작할 수 있다면 사이비似而非예요."  (p.151)


시를 모르는 이가 시론집을 읽는다는 게 꽤나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시보다는 정작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 더 나아가서 삶을 대하는 한 생활인의 태도를 배우는 듯하다.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의 업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성실한 생활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잘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얼치기 생활인으로서 시인을 우러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느 성실한 생활인의 자태가 시처럼 고울 수 있다는 걸 나의 삶 속에서, 이성복 시인의 책 속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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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고 견디기 힘든 폭염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폭염의 일수가 길어지면서 우리가 느끼고 바라보는 환경은, 그리고 우리가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비단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는 우리 인간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주변의 생물을 둘러볼 여유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더위 때문에 내가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한낮의 열기 때문에 외출을 포기했던 것, 더위로 인해 떨어진 식욕을 어떻게 하면 반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등 인간의 관심은 오직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국한될 뿐 이 더위에 도시를 떠도는 비둘기는 어찌 살까? 혹은 불과 몇 미터도 걷기 힘든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이 여름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생각들은 불필요한 것들일 뿐입니다.


나는 새벽 등산로의 풍경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목격하게 됩니다. 요즘 등산로에서 흔히 보게 되는 것은 지렁이의 사체와 참나무의 잔가지입니다. 바람이 불었던 것도 아니요,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쏟아진 것도 아닌데 그와 같은 풍경은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피부를 통하여 호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지렁이는 살기 위해서는 때때로 땅속이 아닌 지면으로 나와야 하고 물기 하나 없는 등산로를 맨 몸뚱이로 힘겹게 기어가야 합니다. 오직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던 지렁이는 제 몸의 수분마저 다 날려버린 후 등산로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렇게 죽은 지렁이 사체가 등산로에 가득합니다. 지렁이 사체에는 파리떼가 까맣게 달려들고 등산객의 발길이 스칠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웅 하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곤 합니다. 살기 위해서 죽음으로 향하는 이 아이러니한 지렁이의 여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렁이라면 나는 과연 죽음을 기다리면서 내가 있던 땅속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등산로를 가로질러 어딘가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나는 여전히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참나무도 이와 비슷합니다. 열매를 맺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땅속 수분과 영양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폭염이 지속됨에 따라 뿌리가 있는 땅 안쪽도 잎이 있는 줄기 부분도 수분의 양은 차츰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부실한 열매가 달린 잔가지를 자신의 몸통에서 떼어낼 것인가 아니면 힘들지만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전체 가지를 껴안고 버틸 것이가. 현명하게도 참나무는 자신의 부실한 잔가지를 선제적으로 떼어내어 미리 위험을 대비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새벽 등산로에는 우듬지에서 떨어진 참나무 잔가지들이 수북합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잡아 내게 달려드는 모기를 쫓는 데 쓰곤 합니다.


폭염의 기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갑니다. 덥다고 툴툴댈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더위 속에서 땀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지렁이의 여정처럼 가난한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죽음의 여정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그들도 여전히 함께 존재한다는 걸 생각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 정도의 인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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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새너머 2025-08-01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의 제 고민과 맛닿아있는 글을 보게 되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꼼쥐 2025-08-02 13:14   좋아요 0 | URL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제가 더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리타의 산책
안리타 지음 / 홀로씨의테이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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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의자'라고 부르는 작은 바위가 있다. 내가 매일 아침 산책을 마치고 내려오는 산의 능선을 따라 낮게 솟은 작은 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물론 그 이름은 내가 명명하여 나만 그렇게 부르는 까닭에 다른 이들은 어찌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옛날 초등학교 교실의 나무의자를 닮은 그 바위는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정도로 그닥 넓은 편은 아닌데, 그곳에 앉으면 앞이 탁 트여서 내가 사는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바람길도 훤히 트여 운동 후 땀을 식히는 데는 그만이다. 나는 아침 출근 시간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그곳에 잠깐 앉아 땀을 식히거나 도시 전경을 감상하곤 한다.


오늘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왕의 의자'에 앉았는데 근처 참나리 군락에서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게 언제 꽃이 필까?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꽃이 만개한 것이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산을 오르는 이는 많지 않았고 활짝 핀 참나리 꽃이 오가는 이를 반기는 듯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2025년 7월의 마지막 한 주도 나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을 듯했다.


"너무도 신비롭고 벅찬 감각에 순간, '이건 운명이야' 하는 확신이 나를 휘감았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나는 찬찬히 자연을 거닐며 같은 감각을 반복했다. 그리고 이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인상은 나를 이전의 삶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아, 그날 이후, 나는 산책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p.41)


이번에 새로 발견한 작가 안리타의 산문집 <리타의 산책>은 200쪽 남짓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곁가지로 따라오는 생각의 알갱이들이 포도송이처럼 부풀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란 이렇듯 작가가 쓴 짧은 문장으로부터 독자의 깊고 넓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책을 일컫는 것이리라. 일차적으로는 작가가 쓴 문장의 기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먼저이겠지만, 작가가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서성거렸을 어느 거리, 어느 시간대의 빛나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던 숲, 그리고 작가를 환영하고 응원하던 들꽃들...


"그때부터였을까. 이렇듯 내가 늘 숨으로서 매달려 있는 생에 관심이 커진 계기가. 삶에 이토록 깊이 연결된 호흡이라니, 폐부 깊이에 닿는 뜨거운 느낌이 삶이라니,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사람을 죽이는 모든 힘이 거기에 있다니, 존재가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다는 기분이 아찔해서 나는 노을빛까지도 사무치게 들이쉰다."  (p.113)


한때 살아가면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 무한대로 지원되던 이웃의 위로는 언제부턴가 '옛다, 위로' 하는 식의 천편일률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그럼에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일정액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제공되지 않는 값싼 문장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삶의 진정제가 되었다. 삶이 힘들수록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싸구려 위로의 글에도 쉽게 감동하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되면 소외될수록 그 경박한 위로의 글조차 더욱 목말라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회용 밴드에 익숙해진 탓일까 아프니까 청춘이었던 우리는 중년이 되어서도 늘 아프고, 언젠가 읽었던 싸구려 위로의 글에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말이나 글에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위로하는 나만의 목소리를.


"나는 내가 발견한 이 알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삶은 때로 낯설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하지만, 그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은 눈부시도록 찬란하다. 이따금 죽고 싶은 만큼 살고 싶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생은 놀랄 만큼 신비하다. 계절처럼 마음은 변덕스럽고 때로 나약하지만, 우리는 그 순환 속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진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 문득 마주하는 순간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상할 만큼 감동적이기도 하다."  (p.193)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멈춰 있는 물레방아를 돌리듯 순환의 처음은 언제나 힘겹고 무겁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모든 처음을 기꺼이 감당하는 이유는 내게 남은 처음이 시나브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허락된 봄이, 내게 허락된 한 달의 첫날이, 내게 허락된 한 주의 첫날이...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정체되거나 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한 사실. 나는 그렇게 7월 마지막 주의 첫날을 지우고 있다. 습관처럼 또 그렇게. 안리타의 에세이 <리타의 산책>을 마저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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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도 너무 덥다.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높은 기온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습도가 높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 약간의 바람이 부는 그늘에 있으면 시끄러운 말매미 소리가 극한의 더위를 조금쯤 누그러뜨리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햇빛이 정면으로 내리쬐는 도로는 마치 사막의 한낮처럼 달구어져 작은 불쏘시개라도 떨어뜨리면 금세 불이 붙을 것처럼 뜨겁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사막의 열기를 빠른 속도로 벗어나려는 차들만 가득했다.


나는 지금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와 있다. 에어컨을 켠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우던 나는 캔커피 하나를 사 들고 느지막이 어려운 걸음을 뗐던 것이다. 나처럼 도서관으로 피서를 나온 사람들은 꽤나 많았다. 빈 의자를 찾기 어려웠다. 도서관에서 책은 읽지 않고 자신의 휴대폰에서 정보를 검색하거나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풍경은 아무리 반복하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물론 그런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배경에는 원칙을 고수하려는 나의 지나친 고집이 자리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 최근에 나는 관심이 가는 작가를 발견했다. 작가의 이름은 안리타! 기존 문단을 통해 등단한 작가는 아닌 듯한데 작가의 글은 꽤나 매력적이다.


"햇빛이 나무 사이로 쏟아져 흙길에 부드러운 빛의 조각을 남긴다. 미풍이 전나무 가지를 흔들면, 멀리 새소리가 밀려온다. 시간과 공간의 틈새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평화가 스며든다. 모든 근심이 숲의 고요에 녹아 사라진다. 나는 이곳에서 현실을 모두 내려놓는다."  (p.34 <리타의 산책> 중에서)


안리타 작가는 글을 참 맛깔나게 쓴다. 어느 작가의 글에서 매력을 느낀다는 건 작가의 생각이 문장 곳곳에 균질하게 퍼져 있음을 의미한다. 문장의 어느 곳에는 생각이 텅 비어 있고 또 어느 곳에는 생각이 넘쳐나는, 말하자면 생각의 깊이가 삐뚤빼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건 작가의 능력보다는 정성이 부족한 경우이다.


아마추어도 아닌 프로 작가가 자신의 글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가가 글을 씀에 있어 문장 곳곳에 자신의 생각을 담기 위해서는 끊이지 않는 체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한때 인기가 있었던 어떤 작가의 글이 독자들로부터 갑자기 멀어졌다는 건 작가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거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늙었다는 뜻이다.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인기를 끄는 까닭은 그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체력이 좋은 까닭이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밭일을 쉬지 않았던 박경리 작가 역시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안리타 작가는 에너지가 넘치는 듯하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우연히 발견한 작가이지만 그녀가 지금과 같은 체력을 오래도록 유지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나 역시 작가의 새로운 글을 오래도록 읽고 싶은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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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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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는 시간이 누군가 물을 엎지르듯 의미도 없이 한꺼번에 소진되는 듯한 요즘, 새벽에 산행을 하고, 씻고,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여 얼쩡거리다 보면 뭘 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이미 엎질러진 하루는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우리의 기억력에도 점화하여 최근에 생성된 기억 파일만 까맣게 태워버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루를 보내는 건 무척이나 긴 느낌인데 일주일, 열흘, 한 달 등 뭉텅이로 잘려나가는 시간들은 어찌나 빠르게 소진되는지... 그렇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는 얼마나 짧게 마감하는가.


교정의 달인으로 인정받는 김정선이 교정교열자가 아닌 작가로서 펴낸 에세이 <소설의 첫 문장: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는 요즘처럼 멍하고 정신없을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이십 대 후반부터 오십 대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까지 줄곧 남의 글을 손보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작가는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내 글쓰기의 첫 문장으로, 내 삶의 첫 문장까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듯했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들의 독서라는 게 일천하기 짝이 없어서 첫 문장을 거론할 만한 소설의 권수도 몇 권 되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읽은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는 것도 믿기 힘든 사실, 작가가 되살린 여러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하여 내가 읽었던 몇몇 소설을 겨우 확인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하려면 '내 삶'이라는 기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글을 제대로 읽어 내려면 '내 문장'이라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문장'은 바로 '내 삶'을 표현한 것이어야 하고, 이게 바로 글쓰기와 글 읽기의 시작점 아니겠는가. 규칙과 기술을 익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을 읽거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저런 기법을 익힌다고 해서 내 손끝에서 나만의 문장이 저절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글이 첫눈에 말끔하게 해독되는 것도 아니듯이."  (p.10 '머리말' 중에서)


책은 1장 '다시 보는 첫 문장', 2장 '다시 쓰는 첫 문장', 3장 '다시 사는 첫 문장', 4장 '다시 읽는 첫 문장'의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을 읽는 독자는 굳이 순서에 따라 읽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작가는 어차피 자신이 뽑은 소설의 첫 문장을 내세워 소설에 대한 느낌이나 자신의 경험을 그 문장과 함께 잘 버무리고 뒤섞어 감칠맛 도는 책으로 엮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장을 펼치더라도 내용과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물론 각각의 장에 따라 선정한 책은 나름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지만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로 시작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나는 곧 죽을 것이다.'로 시작하는 요 네스뵈의 소설에 대해 작가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이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을 옮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특별한 삶 때문이라기보다 특별한 죽음 때문인 듯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내 특별함이 언제든,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끝장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살아가는 존재. 진정한 특별함은 바로 그런 것임을 깨닫는 존재. 그러니 당신과 내가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p.147)


어떤 독자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소설의 첫 문장은 특별하다.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요 관심이 첫 문장에 집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가 역시 첫 문장에 대한 고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첫 문장이 소설의 재미와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다시 첫 문장으로 관심이 쏠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유명세를 타게 된 첫 문장의 경위야 어찌 되었든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어떤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게 마련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특별함으로 인해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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