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하는 명절이라야 설과 추석이 고작이지만 나에게도 '명절증후군'이라는 도통 어울리지 않을 듯한 오래 묵은 지병이 있었던 것인지 명절 연휴만 지나고 나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곤 한다. 몸도 마음도 파김치처럼 축 늘어지지만 어려운 숙제를 모두 끝낸 아이처럼 저으기 안심이 되는 것이다.

 

추석 명절만 해도 그랬다. 10월 초에 장인, 장모의 생신이 몰려 있어서 추석 모임은 겸사겸사 밖에서 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반인 큰동서의 딸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동서의 딸까지 처갓집 식구들 모두가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모였었다. 그렇게 다 모인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어느 집이나 그렇겠지만 공통의 관심사라는 게 아이들 교육 문제나 취업, 승진이나 건강 등 단발성의 이야기뿐인지라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서들이나 처형, 처제의 정치성향이 서로 엇비슷하다는 점이다. 딸만 넷인 처갓집에서 서로의 정치성향마저 달랐다면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겠는가.

 

수험생을 둔 둘째 동서는 식사를 마치자 마자 바로 집으로 갔고, 나와 큰동서, 막내 동서는 처갓집에 잠시 들렀다가 헤어졌다.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과 심리학을 전공하는 큰동서의 딸은 작년에 페루에서 1년을 보내고 온 덕분인지 한층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졸업 프로젝트 때문에 한걱정을 하는 게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그보다 더한 난관들이 왜 없겠는가. 졸업을 하면 당장 마주쳐야 할 취업난도 그렇고.

 

아침에 잔뜩 흐렸던 하늘은 낮이 되면서 반짝 해가 나왔다. 뺨에 닿은 가을바람이 부드럽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처럼 기운이 없는지 다들 축 처진 모습이다. 9월이 그렇게 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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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란 언제나 마음에 난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일 뿐, 새로운 상처를 만들거나 혹여 그런 일을 만들지 않는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세월은 더러 치유될 것 같지 않은 깊은 상처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물론 자신이 만든 상처를 세월에 슬쩍 탓을 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죄가 없다 말하기도 뭔가 석연찮다.

 

오늘도 여느 날의 새벽과 마찬가지로 아침운동을 나갔더랬다. 나날이 초록 물이 빠지는 나무들과 점차 수그러드는 보송한 강아지풀 씨앗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는 요즘 도토리가 한창이다. 그 바람에 도토리를 줍는 등산객이 부쩍 늘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도토리를 찾느라 길도 나지 않은 산을 이곳저곳 뒤지는가 하면 작은 도토리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낙엽을 온통 헤집어 놓는 통에 산의 속살이 벌겋게 드러나곤 한다. 사람의 욕심이란 언제나 그토록 민망한 법이다.

 

작년에 비하면 도토리의 양은 많지 않다. 지난 주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도토리는 이제 모든 걸 다 내어줄 시간이 되었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진다. 나는 떨어진 도토리를 작정하고 주워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등산로에 떨어진 토실한 도토리를 그냥 지나치지도 못한다. 딱히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 둘 줍다 보니 두어 됫박 될 정도로 양이 제법 많아졌다. 그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욕쟁이 할머니께 드렸더니 좋아라 하셨다.

 

오늘 아침에도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올해 여든넷이라는 욕쟁이 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혼자 사신다. 젊은 시절에는 발레 학원을 운영하는 등 활력이 넘쳐 흘렀을 텐데 이제는 몇 걸음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하신다. 뇌졸중 수술을 세 번이나 하셨다며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삶을 조심스레 털어 놓았다. 스산한 아침 바람이 산을 훑고 지나갔다. 우리가 지나쳐 온 길 위로 후두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이 할머니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만 남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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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도미난스 - 지배하는 인간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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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와서 하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추석 연휴의 TV 프로그램이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철 지나 홍콩 무술 영화라던가, 나 홀로 집에 시리즈라던가,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이라던가, 외국인 노래 경연 대회나 여러 분야의 연예인이 총출동하여 청백 대항전을 펼치는 게 주된 레퍼토리였고 그 중간 중간에 특집 드라마가 단막극으로 방영되고는 했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또 있군요. 빼놓지 않고 등장하던 마술공연이 그것입니다. 유리겔라나 카퍼필드처럼 외국 마술사가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국내 마술사가 등장하여 카드마술이나 비둘기 마술을 보여주곤 했었죠. 때로는 어느 유명한 최면술사가 등장하여 연예인에게 최면을 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불려 나온 연예인으로 하여금 한동안 촛불을 바라보게 한 다음 '레드 썬!'하고 외치면서 딸깍 손가락을 튕기면 금세 최면에 빠져드는 식이었죠. 어찌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요. 최면술사는 깊은 최면에 빠진 연예인을 마치 자신의 수족을 부리듯 갖고 놀았습니다. 사과를 주겠다고 하면서 양파를 먹게 한다거나 전생여행을 한다면서 눈물 콧물을 쏟게 함으로써 연예인의 단정했던 이미지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묘한 쾌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저는 그때 보았던 것 중에는 신기했던 게 또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었을 때였던가요? 마치 자신의 부모 중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 북한 주민의 모습이 제 눈에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보였었죠. '저게 진심일까?' 몇 번이나 되짚어 생각했습니다.

 

장강명의 소설 <호모도미난스>를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는 내내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꼼짝 못하게 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부릴 수 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다른 누군가가 로봇처럼 그대로 움직이고 그 명령에 반항하거나 일체 저항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마치 최면술사가 최면에 빠진 연예인을 마음껏 농락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 소설은 타인을 지배하고 조종하며 모든 인류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자들과 그 '힘'을 막고자 조직된 또 다른 호모도미난스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온 거대한 '힘'과 그 '힘'의 쓰임  또는 그 '힘'에 반동하며 균형을 잡아가는 힘의 항상성에 대한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장르 소설의 특성상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소설에 어떤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야기의 얼개일 것입니다. 작가는 만화처럼 빠른 스토리 전개를 통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설 속 인물들은 중국과 라오스, 일본, 한국 등 넓은 무대를 종횡무진 옮겨 다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가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을 개발해냈어요. 바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이죠. 우리는 새로운 종, 신인류입니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의 다음 단계, 호모도미난스입니다."    (p.137)

 

이야기는 류잉춘과 저우환위의 수술에서 비롯됩니다. 두 사람은 흑사회의 성주였던 황첸스의 뇌수술을 집도했었고 황첸스는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부모님의 복수를 갈망했던 저우환위와 '정신조정능력'의 위험성을 감지한 류잉춘은 서로 갈길이 달랐습니다. 저우환위의 방바재단과 류잉춘의 백원단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정신조종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로봇처럼 부림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무제한으로 해결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도 남용하면 시큰둥하고 재미없어질 뿐 아니라 결국에는 사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흰원숭이'로 지칭되는 초능력자들은 어느 순간 자살충동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이른바 '충동사'를 겪게 되는 것이지요.

 

"취향이라는 것도 애정과 노력, 시간을 들여 배워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은 기다리며 애를 태우는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욕망하는 대상의 특성을 분석하고 자기 기호를 그에 맞추게 된다. 어쩌면 그게 한 인간의 정체성을 쌓아올리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p.80)

 

백원단의 리더였던 류잉춘은 호모도미난스의 능력을 제거하고 인류를 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맞습니다. 그가 죽을 때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안시현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였던 안시현은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실의에 빠져 중국에 갔다가 류잉춘의 눈에 띄어 그의 능력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원단의 단원이었던 천슈란의 추적에 의해 류잉춘의 신분이 노출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안시현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정신조종을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 말입니다. 정신조종을 하는 사람들은 저희가 어떤 기분을 맛보는지 결코 알지 못하실 테죠. 이렇게 정신조종능력자 두 분을 접하고 나니, 미묘하게 그 느낌이 다릅니다. 목소리 음색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요."    (p.150)

 

그래서 어찌 되냐구요? 그것까지 말하면 소설은 재미없어지겠지요. 권력의 속성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노력이나 기다림도 없이 공짜로 얻은 권력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할 테고 결국 끝 지점에서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절대적 행복이 아닌 끝 모를 '허무'일 것이라고 작가는 추측하는 것입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그럴 듯싶습니다. 정권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굴복시켜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싶은 욕망이 들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전횡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재미있는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원하는 걸 모두 쉽게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동력이 권력이 아니라 희망인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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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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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매미가 악을 쓰며 울었던 어느 해 여름은 몹시도 더웠다. 그 더위가 말매미의 울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더위 때문에 말매미가 더 크게 울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펄펄 끓는 더위를 속절없이 견뎌야만 했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하루 중 더위가 하염없이 쌓이는 오후 세 시의 길모퉁이에는 허공을 오가는 참새의 무리만 눈에 띌 뿐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보도 위를 눈 부신 햇살만 가득했었다.

 

올해 여름도 다르지 않았다. 몹시도 무더웠던 그해 여름에 나는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었었다. 작가는 그때, 10대를 지나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들던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을 자신의 책에 또각또각 적었었다. 수험생의 엄마였던 작가가 고등학교 3학년인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무한 긍정의 메시지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눈시울이 젖게 했었다. 그 이후로 반복이 일상화된 나날들이 무수히 오고 갔으며 '위녕'이라는 이름은 몇 년의 긴 공백과 함께 잊혀졌다. 그래, 그녀의 딸 이름이 위녕이었지. 작가는 이제 20대 후반, 취업 준비를 하는 위녕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27개의 초간단 요리법과 함께 말이다.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읽은 요 며칠은 몹시도 더웠었다.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평생을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는 없어. 그러나 10분은 의미 있고 어여쁘고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다. 그래, 그 10분들이 바로 히말라야 산을 오르는 첫번째 걸음이고 그것이 수억 개 모인 게 인생이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지금을 살면 되는 것." (p.27)

 

작가는 이제 딸 때문에 애면글면 하지 않는다. 그게 글에서도 보인다.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언니처럼, 인생의 선배로서 다정할 뿐이다. 책은 세상을 사는 요령을 담은 '1부 - 걷는 것처럼 살아', 어떤 마음과 결심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담은 '2부 - 우리가 끝내 가지고 있을 것', 사람 사이의 관계와 사랑과 욕망과 집착 등 다분히 관조적인 이야기들을 담은 '3부 - 덜 행복하거나 더 행복하거나'에 이어 '작가의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작가는 삶의 단상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가 하면 때로는 따끔한 충고와 함께 자신의 마음 속 상처를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기도 한다. 그리고 응원의 메시지도 잊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자신의 굴곡진 삶으로 인해 받았던 젊은 시절의 상처와 가슴아팠던 기억들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그 경험들을 통해 배웠던 깨달음은 어쩌면 이제 위녕과 같은 젊은 청춘들에게 필요할 뿐, 자신의 몫으로 꽁꽁 간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결혼 생활 동안 마치 '누가 뒤에서 총이라도 겨누는 것처럼' 이 모든 것들을 죽도록 하고 비난을 받아왔어. 그 때는 참으로 펄쩍펄쩍 뛸 거 같더라고. 솔직히 지금은 내가 왜 그 때 더 열심히 음식을 하고 집안을 꾸미지 않았나, 후회를 하는 게 아니라. '대체 뭐한다고 그렇게 죽자고 음식을 만들고 집을 꾸몄나' 이런 후회가 든다니까." (p.291)

 

엄마와 딸이라는 특수한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각할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다소 껄끄러운 사이는 아주 잠시일 뿐, 딸이 독립하는 그 순간부터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한동안 살면서 자신의 삶이 딸의 삶 속에 투영되고, 언젠가 자신의 사후에도 그 삶이 면면히 이어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나는 언제나 부러움 속에서 바라보곤 한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고 있는 작가 자신의 입장에서 딸의 건강은 늘 걱정 1순위였을 터, 혹여라도 끼니를 굶어 자신처럼 기운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을 작가는 딸을 위한 레시피를 정말 꼼꼼히도 적었다.

 

"물론 엄마도 가끔 질 낮은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들을 막 때우고 싶은 때가 있단다. 그게 특별히 먹고 싶어서라면 모르겠는데 그냥 귀찮아서 말이야. 잘 생각해보면 바로 그때가 실은 엄마의 생 전반의 기력이 떨어지는 때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지. 음식은 그런 바로미터 역할을 하고 그럴 때 엄마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단다. 이 식사가, 이 식사의 앞과 뒤가 내 인생의 많은 모자이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야." (p.312)

 

추석이 코앞인데 한낮의 기온은 여름처럼 높다. 그러나 하늘은 어찌나 높고 푸르던지 한 입 베어 물면 투명한 얼음물이 입안 가득 고일 것만 같다. 상큼하다 못해 레몬처럼 신 하늘을 나는 잊지 않으려는 듯 이따금 올려본다. 그리고 더위가 켜켜이 쌓이는 오후의 어느 시간에 나는 그때처럼 공지영의 에세이를 읽었다. '위녕!', 하고 부르면 여름 한낮의 더위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릴 것만 같다. 그런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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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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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서 있는 자리 앞으로는 소리가 지워진 창밖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밀폐된 창을 통과한 빛의 풍경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마치 우리네 삶에서 시간을 솎아낸 듯한 가볍고 어색한 몸짓들이 의미도 없이 펼쳐지는 것 같군요. 아무도 없이 텅 빈 영화관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를 볼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요?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 안에 오래도록 앉아 있어 본 사람이라면 혹시 제 기분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숨소리도 누른 채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왠지 모를 안도감이 온 몸을 감싸게 되지요. 사람은 때로 자신의 감각기관 중 어느 하나를 잠시 쉬게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예술적 영감이 샘솟는 시간은 바로 그런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의 감각이 활동을 멈춘 바로 그 순간에 대상도 알 수 없는 어떤 분이 '옛다, 받아라.' 우리를 향해 던져주는 게 바로 예술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9월도 벌써 반이 지난 지금, 저는 무척이나 바빴던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보며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을 읽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망중한을 즐기는 셈이지요. 어느 때부터였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저는 언젠가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야지 생각했으면서도 속이 채워지지 않은 도시락처럼 약속은 언제나 헛헛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게 들어오는 어떤 것들도 다 때와 장소를 가려 인연을 맺는 것인가 봅니다.

 

"떠난다는 것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자 낯선 것과의 새로운 만남, 낯선 것이면 무엇이든 두려워서 여행을 떠나는 날이면 내 목은 자주 부어 올랐고 그래서 포기했던 떠남이 내게는 많았다. 비단 여행뿐 아니다. 살면서 떠나야 할 시간에 떠나지 못해 주저앉은 적도 많았고 나중에는 그것이 아까워서 바득바득 살아야 했던 적도 많았다." (p.10)

 

2000년 말의 작가의 모습은 작가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젊어 보입니다. 젊다기보다 '앳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그런 모습입니다. 대학교 2학년 이후 18년 동안이나 교회와 신앙을 떠나 있었다는 작가는 수도원 기행을 의뢰받고서 꽤나 놀란 듯했습니다. 엄마 역할에 힘들어하던 차, 친구에게 무심코 했던 '유럽의 수도원에 가서 한 달만 쉬었다 오고싶다'는 빈말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기억에도 없는 오래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긴 시간을 앉아 있는 것처럼 이따금 현실은 마법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르정탱 베네딕트 수도원을 시작으로 작가의 수도원 기행은 계속됩니다. 솔렘 수도원, 테제 공동체, 오뜨리브 수도원, 몽포뢰 도미니크 수도원, 림부르크 수도원 등 작가가 다녀온 행선지를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국땅의 낯선 지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만, 언젠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 저는 테제 공동체에 대해 조금쯤 알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깊이 공감했었습니다. 교리를 넘어선 침묵의 영성으로 방황하는 세계 젊은이들의 영적인 길라잡이가 되고 있는 테제 공동체를 방문했던 작가의 느낌이 저는 몹시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저 젊은이들의 앞날이 밝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세상은 수도원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다시 젊어지고 싶지는 않다. 젊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라고 나는 아직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원칙과,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우리가 택할 길은 몇 개 안 된다는 현실과의 괴리가 괴로운 것이다. ...하느님 품에 안기는 날까지 우리는 방황하리라, 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노트에 적어가지고 다니던 내 사춘기가 떠올랐다." (p.108)

 

아니, 또 있습니다. 제가 문학적인 감성의 소유자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나오는 숄 남매와 그들이 다녔던 뮌헨대학을 작가가 방문했다는 사실에 저는 '좋았겠네.' 약간의 시기심인지, 부러움인지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숄 남매가 남긴 유인물 유적지에 감동을 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허무하게 쓰러져 간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애달팠던 것인지 작가의 글은 감상적으로 변합니다.

 

"나도 그들에게 이런 유인물의 유적을 만들어 주고 기념관 하나 세워주고 싶었다. 여기가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러나 끝내는 돌을 들었던 그 자리라고... 비겁해서 뒤로 물러났던 우리 대신, 그들은 앞으로 달려나갔다고.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님 고생하시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잘 먹고 잘사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므로 그때 젊었던 그들, 그렇게 젊을 때 죽어버려서 우리를 오래 아프고 오래 숙연하게 하는,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젊은 우리들일 그들에게." (p.162~p.163)

 

날이 흐린 탓인지 벌써 저녁 느낌이 묻어 납니다. 게다가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은 노을에 물든 고즈넉한 들녘을 배경으로 그려진 밀레의 만종晩鐘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록 몸은 고단하지만, 때마침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만종에 맞춰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기도하는 젊은 농민 부부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합니다. 내 인생에도 황혼이 깃들고 만종이 울리면 나를 위해 기도해줄 이 한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눈을 들어 유모차에서 잠에 빠진 아기를 바라보았다. 저 아기는 커서 어른이 되기 위해 또 얼마만큼의 상처를 필요로 할 것인지. 성스러운 수도원 기행이 끝났는데 나는 왜 기쁘지가 않고 이런 쓸데없는 연민에 빠져 있는지. 하지만 아기와 젊은 아기엄마에 대한 불길한 예감 때문에 마음이 자꾸 무거워지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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