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란 언제나 마음에 난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일 뿐, 새로운 상처를 만들거나 혹여 그런 일을 만들지 않는다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세월은 더러 치유될 것 같지 않은 깊은 상처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물론 자신이 만든 상처를 세월에 슬쩍 탓을 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죄가 없다 말하기도 뭔가 석연찮다.
오늘도 여느 날의 새벽과 마찬가지로 아침운동을 나갔더랬다. 나날이 초록 물이 빠지는 나무들과 점차 수그러드는 보송한 강아지풀 씨앗이 눈에 들어온다. 산에는 요즘 도토리가 한창이다. 그 바람에 도토리를 줍는 등산객이 부쩍 늘었다. 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도토리를 찾느라 길도 나지 않은 산을 이곳저곳 뒤지는가 하면 작은 도토리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낙엽을 온통 헤집어 놓는 통에 산의 속살이 벌겋게 드러나곤 한다. 사람의 욕심이란 언제나 그토록 민망한 법이다.
작년에 비하면 도토리의 양은 많지 않다. 지난 주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도토리는 이제 모든 걸 다 내어줄 시간이 되었다는 듯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진다. 나는 떨어진 도토리를 작정하고 주워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등산로에 떨어진 토실한 도토리를 그냥 지나치지도 못한다. 딱히 쓸 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 둘 줍다 보니 두어 됫박 될 정도로 양이 제법 많아졌다. 그것을 비닐 봉지에 담아 욕쟁이 할머니께 드렸더니 좋아라 하셨다.
오늘 아침에도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올해 여든넷이라는 욕쟁이 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혼자 사신다. 젊은 시절에는 발레 학원을 운영하는 등 활력이 넘쳐 흘렀을 텐데 이제는 몇 걸음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하신다. 뇌졸중 수술을 세 번이나 하셨다며 순탄치 않았던 자신의 삶을 조심스레 털어 놓았다. 스산한 아침 바람이 산을 훑고 지나갔다. 우리가 지나쳐 온 길 위로 후두둑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이 할머니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만 남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