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생각들 중 내 딴에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몇몇 것들을 모아 글로 옮기곤 한다. 말하자면 나는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삶의 기억을 찾아 헤매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열정이나 마르셀 프루스트에 의한 삶의 재구성처럼 지난하고 힘든 작업일 수도 있고 시지프스의 노역처럼 덧없는 반복일 수도 있다. 애당초 나에게 주어진 것이 그것 밖에는 없다는 슬픈 고백일 수도 있다.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등산로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았다. 상수리나무가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올해의 첫 작품인 셈이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도토리와 함께 나는 가을을 실감하고 있었다. 조용히 넘어가나 했던 2016년의 가을은 북한의 5차 핵실험으로 인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전혀 새롭지 않았던, 그동안 언론에 보도만 되지 않았을 뿐 어쩌면 줄곧 공공연한 비밀로 세간에 회자되어 왔던 검찰의 비리가 김모 부장검사에 의해 낱낱이 드러났던 것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김모 부장판사의 건도, 권력형 비리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민정수석의 건도 사람들은 다들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끌끌 혀를 찰 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쩌면 북한의 핵실험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학습효과란 그런 것이다.

 

가을은 겨울의 심연을 향해 떨어지는 추락의 계절이다. 시간에 붙은 가속도로 인해 순간순간의 시간들이 빠른 속도로 밀려나 과거라고 명명된 어떤 체계나 순서도 없는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추락하는 기억은 손상되거나 변형된 채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다. 나는 가까스로 건져낸 몇몇 기억들을 글로 적는다.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시지프스의 노역처럼 덧없는 일이다. 추락하는 계절, 가을에는 더 그런 느낌이 든다. 과거를 향해 이유도 없이 곤두박질치던 내 기억의 파편들과 추락하는 계절의 어디쯤,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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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0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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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더 라스트 레터
조조 모예스 지음, 오정아 옮김 / 살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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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느냐 물었지요? 누구에게나 그렇듯 일상이란 언제나 번잡스럽고 잡다하지만 막상 말로써 설명하려 들면 아무런 할 말이 없어지는 게 일상이지요.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몇몇 일들을 제외하면 딱히 말할 것도 없지요. 아니, 그것은 제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제 일상의 면면을 당신에게 만큼은 어떻게든 특별한 것으로 포장하고 싶은 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제 욕심일 뿐이고 어쩌면 당신은 특별할 것 없는 저의 소소한 일상을 궁금해 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9월입니다. 길었던 올 여름 폭염을 감안하면 9월은 그야말로 축복의 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저는 여전히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읽는 책들은 어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체계도 없고 이렇다 할 목표도 없는 그런 독서일 뿐입니다. 일상의 권태와 무료함을 달래줄 유일한 소일거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때우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의 독서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조조 모예스의 소설 <더 라스트 레터: 사랑을 찾아주는 마지막 열쇠>를 오늘에서야 다 읽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요즘 조조 모예스의 소설을 자주 읽게 됩니다. <미 비포 유>를 읽었던 건 꽤나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만 <원 플러스 원>과 <애프터 유>를 읽었던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랬던 게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인 듯한데 저는 또 조조 모예스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이지요. 일부러 작정하거나 미리 계획했던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번에 저는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도 순간적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소설가로서의 조조 모예스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면서 이 책을 읽었던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제니퍼 스털링이 그저 부자 남편을 둔 응석받이 여자로 느껴졌다. 그러나 앤서니는 다른 것들도 보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약간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위치가 요구하는 것보다더 영리한 여자라는 점, 한두 해가 지나면 그런 조합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 지금은 오직 그런 사실을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슬픈 기미만 눈에 감돌 뿐이었다. 제니퍼 스털링은 끝없이 반복되는 의미 없는 사교적 일상에 갇혀 있었다." (p.62)

 

어쩌면 당신은 위에서 제가 인용한 문구만으로도 소설의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부자 남편을 둔 덕분에 세상 물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알지 못하는 유한마담 제니퍼와 앤서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신문기자이자 이혼남이었던 앤서니는 제니퍼의 남편, 로런스 스털링이 자신의 집에서 개최한 파티에 초대되어 제니퍼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권위적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로런스는 제니퍼에게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 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세상 물정이라곤 모르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제니퍼는 성공한 사업가인 로런스를 남편으로 둠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어린 시선을 은근히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무시하는 듯한 남편의 태도도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앤서니와 제니퍼는 서로에게 빠른 속도로 빠져듭니다. 로런스도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죠. 한편 로런스의 비서였던 모이라는 언제나 격식을 갖춰 행동하는 로런스의 태도에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제니퍼에 대한 질투의 마음도. 어찌 생각하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특파원으로 발령을 받은 앤서니는 제니퍼의 동행을 강하게 바라고 그녀에게 요구합니다.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제니퍼를 뒤로 하고 앤서니는 결국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그 시각에 제니퍼는 앤서니를 만나기 위해 서두르다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모든 기억을 잃는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제니퍼는 모이라 같은 여자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하지만 모이라 파커에게는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늘 모든 것이 주어지는 제니퍼 스털링 같은 여자와 달리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하룻밤의 짧은 기억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p.224)

 

사고에 대해 쉬쉬하는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제니퍼는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주변의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니퍼의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날 무렵 로런스는 그녀에게 그날의 교통사고로 앤서니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제니퍼는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1960년 9월에 있었던 사고와 기억을 잃은 제니퍼. 세월은 흘러 소설은 1964년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미국으로 갔던 앤서니가 돌아오고 제니퍼와의 재회로 이어집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앤서니가 제니퍼 앞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죠. 그러나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앤서니를 잊고 지냈던 4년 동안 제니퍼에게는 딸이 한 명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혹 하나가 생긴 셈이었습니다. 콩고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 앤서니와 딸을 데리고 로런스로부터 달아난 제니퍼의 운명은 엇갈립니다. 그리고 소설은 이제 40년의 세월을 지나 2003년 9월로 이어집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랑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앤서니와 제니퍼가 다시 재회하던 1964년의 시점에서 소설이 멈췄더라면 그건 아마도 삼류 로맨스 소설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운명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요. 언젠가 당신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때도 아마 가을의 어느 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명은 소설에서도 다 다룰 수 없는 수많은 복선들로 이루어진다고 제게 했던 말 당신도 기억하고 있는지요?

 

소설처럼 9월의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안부를 묻는 당신에게 무엇 하나 특별한 걸 말하지 못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루를 살아내는 각자에게 일상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지는지요. 그러나 특별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상을 설명하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매번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저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지만 당신의 웃음 속에 저의 모든 사정이 속속들이 이해되고 잇다는 걸 알기에 '그저 잘 지내노라'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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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 있다. 아마 그것은 작은 것만 보지 말고 큰 것을 보라는, 또는 부분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시야를 크고 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이 독서에서도 유용한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적어도 소설을 읽는 데에는 말이다. 예컨대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것인가, 아니면 전체의 스토리에 집중하며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선택에 따라 소설 읽기의 재미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이 문제는 아이들보다는 성인의 독서에 있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삶의 경험이 적은 아이들에게 있어 동화나 소설, 신화, 전설 등 서사 구조의 모든 이야기는 새롭고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책 속 가상의 세계일지언정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에게 있어 소설은 자신이 한번쯤 들어봤거나 비슷한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던, 재미도 없고, 때로는 지루히기까지 한 현실의 재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된 후에는 내용을 중시하는 어린 시절의 책읽기 습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체의 내용보다는 작가가 표현한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그것이 주는 깊은 깨달음을 여러번 되새기며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책에서 취할 수 있는 재미와 지속적인 독서 생활이 가능해진다.

며칠 전 외국인 친구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고 싶어 가까운 서점에 들른 적이 있었다. 공간이 그리 넓지 않은 서점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은 주로 자기계발서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해리포터 신간(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을 사주었다.서점을 나와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 친구가 내게 물었었다. 한국인들은 자기계발서만 읽고 문학책은 언제 읽느냐고.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독서 교육을 받지 않은 채 성장하는 우리의 교육환경은 성인이 된 후에 문제의 심각성을 곳곳에서 드러내곤 한다. 독서를 통하여 문학적 상상력을 배양하지 못한 사람은 문학 자체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서적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독서력을 갖춘 성인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인문학이나 자기계발서를 포함한 실용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문학을 멀리 하지는 않는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삶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시각에서 삶은 모든 게 도전의 대상이고 가능성의 영역이지만 어른의 시각에서 전체적인 삶이란 그저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에서 재미를 발견하기란 아이들보다 어른이 훨씬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삶은 그저 '살아내야' 하는 무거운 책무일 뿐이다. 이따금 '소설을 무슨 재미로 읽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황당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이야기란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아, 이 사람들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큰 틀에서의 삶, 숲으로서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인의 독서는 숲이 아닌 하나하나의 나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반복하여 더듬고 어루만져 그 까칠하고 부드러운 껍질의 느낌뿐만 아니라 수관을 통하여 흐르는 생명의 소리마저 감지하게 될 때 그것은 단지 눈으로 보여지는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내 곁을 지키는 동지이자 친구로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삶은 나무를 봄으로써 숲을 이해하는 구조이지 숲을 봄으로써 나무를 이해하는 구조가 아니다. 삶의 모방인 소설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루 중 '우연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삶의 재미를 발견할 리 없으며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의 의미와 그 이면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고 재미를 찾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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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번째 여자친구는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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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 주는 미묘한 떨림을 뒤로 한 채 막바지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너무나 길었던 더위였고, 그만큼 가혹했던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이맘때쯤이면 마치 사춘기 소년의 탄력있는 다리가 물이 불은 시내를 훌쩍 뛰어 넘는 것처럼 계절은 그렇게 거침이 없이 변하겠지요. 확실했던 어떤 것들이 영화의 자막처럼 빠르게 흘러가는군요. 그리고 나는 먼 과거를 떠올립니다. 인생의 불확실한 어떤 것을 향해 자존심과 무모함, 때로는 오기 하나로 자신의 몸을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던 그 시절을.

 

마커스 주삭의 소설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Getting The Girl)>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캐머런 울프의 성격이 홀든 콜필드처럼 반항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를 겪는 십대 소년이라는 점, 이따금 자신의 삶을 염두에 두고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닮아 있는 듯 보입니다.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호주 출신의 소설가 마커스 주삭은 그의 소설 <책도둑>과 <메신저> 등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꽤나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요.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캐머런 울프의 성장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사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삶의 스케치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 나는 스토리 전개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설 곳곳에 산재한 마커스 주삭의 아름다운 비유와 문장 표현에 감탄하며 읽었던 것입니다.

 

"앞문이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방충망이 덜거덕거렸다. 마치 모든 문이 그 집에서 살았던 낡은 삶으로부터 나를 쫓아내는 것 같았다." (p.117)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나는 쓰레기를 뒤지듯, 괜찮다고 위로받는 순간을 찾아 헤매야 했다." (p.10)

 

"곧 저녁이 하늘로 파고들고, 도시는 몸을 웅크렸다." (p.20)

 

"그 순간 밤이 터져 열리며 하늘이 내 주위에 널빤지처럼 떨어져내렸다." (p.124)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배관공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엄마로부터 삼남일녀 중 막내로 태어난 캐머런은 두 형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늘 주눅이 들어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맘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성취해내고야 마는 큰형 스티브는 독립하여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작은형 루벤은 잘생긴 외모와 말솜씨 덕분에 딱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달라붙고, 그런 까닭에 수시로 여자친구를 갈아치우곤 하는데 여자친구를 간절히 원하는 자신은 이제껏 여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캐머런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작은형 루벤의 여자친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도시의 골목을 정처없이 걷거나, 맘에 두었던 여자애네 집 앞에서 무작정 서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 외로운 새끼'였던 거지요.

 

"거리에는 나뿐이었다. 여전히 평화로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짧은 행복은 떠나가고 슬픔이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나를 찢어 열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허공을 뚫고 다가와 나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나는 절대 그 빛이 나에게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p.23)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캐머런은 주말이면 루벤과 함께 아버지 일을 돕거나 외로울 때면 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감춰두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형 루벤(또는 루브)의 새로운 여자친구 옥타비아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부둣가에서 하모니카 공연을 하는 옥타비아는 이전에 형과 사귀다 헤어졌던 다른 여자애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 모두가 변태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모두. 여자들도 모두. 나처럼 뚱한 조그만 새끼들은 모두. 아버지가 변태라고, 어머니가 변태라고 생각하니 재미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딘가로, 그들의 영혼의 갈라진 틈으로 가끔 미끄러진 적이, 아니, 심지어 뛰어든 적이 있을 게 분명하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때때로 아예 그런 틈 안에서 사는 기분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거기서 기어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p.68~p.69)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루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와 헤어지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그러나 행실이 안 좋아 보이는 줄리아가 캐머런은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캐머런은 다시 스테퍼니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퍼니의 집 앞에 있는 캐머런을 찾아 온 옥타비아가 그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려 주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한때 형의 여자친구였던 옥타비아에게 캐머런은 자신이 써서 꽁꽁 숨겨두었던 글을 읽어줍니다. 어쩌면 그것이 옥타비아를 향한 캐머런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이런 캐머런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누나 세라뿐입니다. 캐머런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진작에 말고 있었던 세라는 가족을 그린 자신의 스케치북을 캐머런에게 보여줍니다. 그 속에는 캐머런을 그린 그림도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를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루벤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캐머런을 세라는 적극적으로 응원해 줍니다.

 

"그럼 루브건 다른 누구건 너한테 이렇게 해라, 아니면 이런 사람이 돼라 말하게 놔두지 마.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신경쓰지 마.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편하게 해줄까 신경쓰지 말란 말이야. 그냥 네가 원하는 걸 해, 캠. 알았어?" (p.193)

 

한편 루벤은 새로 사귄 여자친구 줄리아의 전남친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협박에 시달립니다. 결국 줄리아는 옛 남자친구에게 되돌아갔지만 루벤에 대한 남자친구의 협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옥타비아와 캐머런의 관계를 알게 된 루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결국 옥타비아도 캐머런과 헤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벤은 줄리아의 남자친구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철도 조차장의 공터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도와줄 친구도 없이 밤에 혼자 나갔던 루벤이 몹시 걱정되었던 캐머런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루벤을 안고 그 먼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춘기의 그 시절에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라곤 합니다. 그 대상이 남자건 여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추억이 어느 누구의 가슴엔들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찬 기운이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이맘때쯤이면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꿈처럼 아련하기만 한 그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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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하루였다. 말하자면 그렇다. 비가 오락가락했던 하늘은 온 종일 흐려 있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키가 큰 가로수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얼마 전의 폭염 속에서 나는 왜 이런 풍경을, 생각만으로도 시원했을 이토록 가까운 미래를 도무지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어두워진 허공에 가을을 닮은 두어 줄기의 애상이, 새로운 계절에 너무나도 쉽게 동화되는 옛추억의 회상이 낙엽처럼 흩날렸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오늘 있었고, 늘 그렇듯 고성과 막말 속에 잘 짜여진 코미디 각본처럼 마무리하는 의원 나리들의 뒷모습 속엔 한여름의 남은 열기가 펄럭였다. 그리고 지난해에 있었던 한국과 일본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따른 조치로 일본 정부가 오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108억여원)을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일 양국은 '외교적 현안'으로서의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수순을 밟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합의 반대를 외치는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제1246차 수요집회는 빗속에서도 열렸었나 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며칠 전 우리 곁을 떠난 코미디계의 대부 고 구봉서의 유언은 초가을의 연민처럼 가슴에 남는다.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이 많으니 절대 조의금을 받지 말고 그저 와서 맛있게 먹고 즐기고 갔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손바닥을 뒤집듯 너무나도 쉽게 8월이 가고 있다. 영영 오지 않을 듯하던 가을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9월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눈물 한두 방울과 서민들의 한숨이 흐린 하늘에, 저녁 어스름에 지문처럼 남는다. 가을의 애상처럼 8월 한 달이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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