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등산로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시나브로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제법 부드러워진 새벽 공기와 짙어지는 솔내음 그리고 먹이를 찾느라 더욱 분주해진 청설모.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달라진 분위기에 한껏 상기되어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 어느 노인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삶은 그렇게 한 굽이를 돌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엊그제 읽었던 신문에서 지난해 자살로 숨진 사람이 13년 만에 가장 많은, 1만 4439명으로 2011년 이명박 집권 시기에 1만 5906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다가 2023년 1만 3978명으로 증가하였고, 2024년에는 이보다 461명 증가한 1만 4439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닥 놀랄 만한 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나 보수정권이 집권한 시기에는 자살로 숨지는 사람이 늘게 마련이고, 그와 같은 추세가 반영되는 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유독 MB 집권기와 윤석열 집권기에 자살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는 실종되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경제인들 좋아질 리는 만무할 터,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었던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난동을 탄핵 반대 시위로 포장하는 언론 기사에 나는 또 한 번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날건달 같은 사내들이 여학생의 멱살을 잡기도 하고 밀치며 위협하는 등 과격한 행동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시위로 본다는 말인가. 그것은 폭력이자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범법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폭도이자 현행범인 셈이다. 그런데 그들을 탄핵 반대 시위자로 포장하다니...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자하고 포용적인 관계로 나아갔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나를 일러 '꼰대'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과거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반인이 이화여대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다. 금남의 구역임은 물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화여대 재학생을 여자친구로 둔 남학생은 교문 근처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정잡배와 같은 날건달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디서든 이유도 없이 마구 자유를 부르짖는 이들이 우리 사회를 암흑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여당 국회의원의 아들이 강남 주택가에서 마약을 구매하다 붙잡히기도 하고, 내란 수괴 윤석열을 비호하는 세력들이 온갖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요즘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로 차츰 회귀하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봄은 멀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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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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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들었던 생각은 '어라, 이 책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은데' 하는 기시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책의 표지나 제목은 전혀 눈에 익지 않다는 사실. 일본어에 문외한인 내가 한국어로 번역도 되기 전에 원서로 읽었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게 나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 북쪽 홋카이도 산간지방인 도마자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것도, 주인공인 무코다 야스히코가 등장하는 것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무딘 기억력을 감안하더라도 어디선가 분명 읽었던 게 틀림없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017년 1월에 <무코다 이발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소설. 나는 그해 2월에 책을 읽고 리뷰를 쓴 바 있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9113944)


"'무코다 이발소'는 홋카이도 중앙부에 있는 도마자와 면에서 전쟁이 끝난 지 오래지 않은 1950년부터 내려오는 옛날 이발소다. 주인인 야스히코는 쉰세 살의 평범한 이발사, 스물여덟 살에 아버지로부터 이발소를 물려받은 후로 사반세기에 걸쳐 부부 둘이 이발소를 꾸려오고 있다."  (p.5)


나의 무딘 기억력 덕분에 나는 지루한 줄 모른 채 소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안물이나 지명은 낯이 익었지만 줄거리는 도통 기억나지 않았던 까닭에 나는 마치 오쿠다 히데오의 갓 나온 신간소설을 이제 막 받아 든 것처럼 설렜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두 번 읽게 되었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일인데 말이다. 나의 기억력은 형편없는 것이어서 이처럼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거나 전에 구매했던 책을 다시 구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제는 그마저도 무뎌져서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마는 쿨한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아무튼.


과거 탄광 덕에 번성했던 도마자와는 한때 인구 8만을 거느린 일본 유수의 탄광도시였으나 1960년대 후반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석유로 전환되고 값이 싼 석탄이 해외에서 유입되는 바람에 경쟁력을 잃고 쇠퇴 일로에 접어들게 된 불운의 마을이다. 인구 유출이 계속되면서 열 군데 이상 잇던 마을의 이발소도 이제는 단 두 군데만 남게 되었다.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한 야스히코 역시 자신을 끝으로 문을 닫을 생각이었다. 맏딸인 미나는 도쿄에서 의류 회사에 다니고 중학생 시절부터 절대 이발소를 잇지 않겠다고 하던 아들 가즈마사 역시 삿포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 설에 귀성했던 아들이 고향에 돌아와 이발소를 물려받겠다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야스히코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소설은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드러내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역에 남은 고령의 원주민들에 대한 의료 문제, 지역에 남은 젊은 사람들의 혼인 문제, 영화 촬영으로 시끌벅적해진 마을, 도마자와 출신 젊은이의 사기 행각 등 시골 마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사건 사고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마을 청년과 공무원의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 뇌일혈로 쓰러진 기하치 씨, 중국인 신부를 맞이한 노총각 다이스케, 고향으로 돌아와 조그만 술집을 연 사나에, 도마자와를 배경으로 촬영된 영화의 수상 소식, 도마자와 출신 젊은이의 범죄 등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오쿠다 히데오의 담백하면서도 간결한 문체가 더해져 비교적 술술 읽히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가슴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우리가 직면한 지역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나라 시골의 암담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야스히코는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동네 사람들끼리 으르렁거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간이 해결해주었다. 피차 머리가 식어 이성을 되찾으면 태도를 굽힌다. 포기하는 면도 없지 않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밖에 없다. 맞은 무라타도 진짜로 상해 신고를 할 리는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용서할 것이다."  (p.210)


올해 홋카이도에서는 재난에 가까운 폭설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고 있다. 제설작업을 하던 노인이 눈에 파묻혀 사망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것이 비단 이웃 나라만의 일일까.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은 나날이 증가하고 이에 대처할 노동력을 지닌 젊은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로 빠져나가는 현실.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의 <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만 달리 하면 그것은 곧 우리나라 현실을 다룬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은 일본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처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대를 이끄는 거대한 기치와 인생을 뒤흔드는 불같은 정열, 혹은 타인을 앞서는 빛나는 성공이 아닐 수도 있다. 무코다 이발소에서 오늘도 드나드는 동네 사람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을 기하는 야스히코처럼, 정든 동네와 땅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끼리 따스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오늘 하루를 뿌듯하게 사는 작은 성취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p.317~p.318 '옮긴이의 말' 중에서)


나의 무딘 기억력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두 번 읽었던 오쿠다 히데오의 <웰컴 투 탄광촌 이발소>. 나는 언젠가 육체의 늙어감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눈이 침침하고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타인의 약점을 세세히 보지 않게 하는 것이며, 청력이 약해져 작은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은 속닥거리는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차츰 희미해져 가는 기억력으로 인해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나쁘기만 할까. 그런 까닭에 육체의 노화는 자신의 삶에서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이루겠다고 욕심을 부리느냐고 꾸짖고 질책하는 하나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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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꼴통 보수 전성 시대


몇 안 되는 소수일 때는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전면에 나서지 못하지만 누군가 멍석을 깔아주면 활개를 치며 거리를 활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음침한 골목 안쪽으로 숨어들던 친일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고 박정희와 이승만 독재를 찬양하는 전체주의자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 시대의 고민거리인 은둔형 외톨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우쭈쭈 기를 북돋워주기만 하면 세상 무서운 게 없는 듯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일반인 출입불가의 성역처럼 여겨지던 법원 건물을 향해 소화기를 던지고, 내부 집기를 부수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던 일들도 그들이 술에 취해서 혹은 마약이나 펜타닐을 먹은 후 취했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멍석을 깔아주었기 때문에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거침이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몇몇 일들만 겨우 처리했을 뿐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한 채 기신기신 숨만 쉬며 보냈습니다. 한 젊은(혹은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여배우의 극단적 선택에 따른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나는 그 배우와 일면식도 없고 그녀를 좋아하는 팬 중 한 사람도 아니지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재능 있고 예쁜 어린 배우가 그와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 마지막 선택을 결행하는 이면에는 타인이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갈등과 번민과 고통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그와 같은 젊음을 지나온 한 사람의 기성세대로서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워야 할 청춘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무한한 책임과 죄스러움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조회수 장사에 열을 올리는 우리나라 주류 언론과 그 언론에 실린 쓰레기와도 같은 기사에 자신의 더러운 감정을 배설하듯 댓글을 다는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 달려가는 일부 개신교 목사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영혼 없는 청춘들의 막장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한 영화 한 편이 떠오릅니다. 순박한 남자 창수와 시골에서 상경하여 온갖 몹쓸 짓을 다 겪고 마침내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복을 찾게 되는 영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입니다. 나는 비록 친구가 만화방에서 빌려 온 비디오테이프를 통하여 본 영화이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영화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론과 작금의 권력이 판을 깔아 준 멍석 위에서 꼴통 보수들이 칼춤을 추는 '꼴통 보수 전성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 윤석열과 김건희가 각본을 쓰고 감독도 겸한 <꼴통 보수 전성시대>도 이제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오를 여러 인물들을 선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떠안고 있습니다. 지금은 <꼴통 보수 전성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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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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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동과 시제에 의해 빚어지는 넓은 간극에 대해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예컨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려는 사람 사이의 간극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간극 같은 것이 그것이다. 양자 사이의 간극은 너무 넓어서 섣부르게 정의하거나 예단하는 것은 물론 '어떠했으면' 하는 가정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대척점에 있는 많은 것들과 그들 사이의 까마득한 간극을 조금씩 깨우쳐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다 스러진 상념들이 가는 햇살 속 먼지처럼 부유하는 아침. 나는 쉽게 잊히는 기억들을 한 줌 끌어 모아 서평을 빙자한 한 편의 글을 써본다.


"내가 처음 당선 소식을 들은 날, 내 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장소가 떠오른다. 노래방, 내 어머니도 가는 곳. 한 번의 농담과 또 한 번의 농담, 그다음 번의 농담으로 삶의 품위를 지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소식이 어머니를 짓누를 때, 내 어머니가 놀러 가지 않고 살러 간 곳. 먼 옛날에는 이 세계가 전부 노래방이었겠지. 그러니 언젠가 삶의 어느 질곡에서, 노래방 한구석에서, 우연히 당신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 당신이 조금 목말라하는 것 같다면, '진짜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내가 사겠다."  (p.52~p.53)


나는 대개 시인의 산문집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때론 소설가의 산문집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될 때가 있다. 정유정 소설가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이나 소설가 신경숙의 <아름다운 그늘> 등이 그랬다. 그들의 공통점은 늘 소설만 쓰던 작가가 드물게 선보인 산문집이라는 특징이 있다. 소설과 산문집을 번갈아가며 출간하는 작가에게는 없는 매력이 그들에게는 있다. 글로 쓰고 싶었지만 끝내 쓰지 않았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어 시중에 나왔을 때, 그 책을 읽는 독자가 받는 인상은 무척이나 각별하다.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쓰다 엔터키를 치면 마법처럼 종이 한 장이 더 생긴다. 누군가의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 우리 마음에는 빈 공간이 생긴다. 옛날 사람들의 문장이 우리 이야기가 되고, 나의 삶이 내 것이 되는 정갈한 자리가. 그 자리에 선배가 적어놓은 말들은 또 얼마나 정답고 재밌는지. 책 앞머리에서 선배는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살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묻는다."  (p.143)


2002년에 등단한 작가가 이후 17년 동안 보고 느낀 여러 '이름'을 기록한 이 책은 '나를 부른 이름'의 1부와 '너와 부른 이름'의 2부를 거쳐 3부 '우릴 부른 이름들'로 끝을 맺는다.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1부에서 작가는 자신의 부모님과 고향 등 유년 시절의 추억과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첫 당선 소식을 듣고 가족에게 전했을 때의 떨림과 아련함을 떠올리기도 한다. 2부에서는 소설가 김애란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부에서는 작가가 겪은 구체적인 경험과 느낌들이 되살아난다. 읽었던 책과 즐겨 쓰는 문구와 뉴스에서 들었던 소식들...


"만일 문학에 전통이란 게 있다면 그중 우리가 이어나갈 게 있다면 그건 단순히 소재나 형식이기 전에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어떤 태도 혹은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가 죽은 자를 기리려 한다는 건, 잘 묻으려 한다는 건 결국 삶을 귀하게 여긴다는 뜻과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겐 '나는 죽은 사람 편'이라는 저 말이 우리 문학의 아프고 소중한 유산 그리고 전통으로 느껴진다."  (p.292~p.293)


나의 기억력은 날이 갈수록 그 기능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은 곧 내가 불러줄 새로운 이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며칠 전에는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렸다가 마지막으로 둔 곳이 기억나지 않아 휴대폰을 찾는 데 반나절을 소비하기도 했다. 바빠서 정신없이 서두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다들 위로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실 앞에서 그저 망연할 따름이었다. 언젠가 나의 기억력도 수명이 다하여 '삐뽀삐뽀' 비상신호를 울리며 한도 초과를 알릴 테지만, 적어도 그날까지는 '잊기 좋은 이름;들을 다정히 불러주고 싶다. 그 이름들 중에는 어쩌면 내가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뇌는 이름도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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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풀렸다. 봄이 멀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한 계절과 결별하는 건 어지간히 슬픈 일이라는 걸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하면서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한 계절을 보내는 숙취의 뒤끝은 언제나 쓸쓸함이었다. 지난 계절의 잔재처럼 마음에 남았던 쓸쓸함은 새로운 계절의 정점에 이르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지곤 하지만, 새로운 계절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와 같은, 당연히 있어야 할 긍정적인 기분을 반나마 상쇄하곤 했다. 정월 대보름의 찬란했던 달빛이 짙은 어둠을 다 몰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외국인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실감하겠지만 그들과의 전화 통화에서의 주제는 언제나 대한민국의 대통령 윤석열에게로 좁혀진다. BTS를 배출한 국가에서, 블랙핑크를 배출한 국가에서, 기생충을 제작한 봉준호 감독을 배출한 국가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을 배출한 국가에서 어떻게 윤석열과 같은 미친 작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었느냐는 게 그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이 질문과 함께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낯이 화끈거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계엄 성공의 축배를 그들 손에 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국회를 향해 달려갔던 그 위대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 덕분에 우리가 지켜왔던 일상을 휘청거리며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다 쓰러져가던 경제를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의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보려 애썼다. 이전에는 사서 걱정하는 일이 좀체로 없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씩 무너져 내려가는 최근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문득 거울 속의 남자에게 애틋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p.372~p.373)


작가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썼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한 동시에 생각으로 인해 고통을 짊어지는 동물이기도 하다. 날씨가 풀리고 겨울의 잔주름이 펴지는 시기. 나는 그 쓸쓸함의 숙취를 풀기 위해 산책을 하고 뻐근해진 다리를 욕조 속에 담근다. 그럴 때 나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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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2-1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굥은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인간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기에...

꼼쥐 2025-02-16 14:26   좋아요 0 | URL
헌재 재판관들 앞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걸 보면 그런 듯합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