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루의 어드벤처 - 사막, 그 빈자리를 찾아서
김미루 지음 / 통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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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벽 숲은 고요했다. 등산로를 따라 드문드문 잔설이 보였고 뚝 떨어진 기온에 모든 게 얼어붙는 듯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새벽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적막강산. 괴괴한 느낌마저 감도는 새벽 산길을 그믐달 여린 달빛이 어둠의 한 귀퉁이를 도려내고 있었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입김이 마치 흰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불빛을 등지고 하늘에는 듬성듬성 새벽 별빛이 어지러웠다.

 

다른 계절과는 달리 겨울 산행은 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한 어미 자식도 오롱이조롱이라지만 갑작스러운 추위에 잔뜩 옹송그린 채 내달리는 퇴근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 옛말조차 무색해진다. 사람 사는 게 다들 비슷하구나,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자연이라는 같은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제각각 살다가 목숨이 다하는 날 가볍게 벗어놓고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일 터였다. 내 뒤를 잇는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테니 말이다.

 

"사막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각자의 배경이나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평등으로 몰고 간다. 순간순간 닥치는 허무의 느낌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 속으로 모두를 휘몰아간다. 서양문화에 깔려있는 평등의식은 이러한 사막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초월자의식도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p.104)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의 딸인 김미루가 쓴 책이 출간되었다기에 구해서 읽어보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톤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후 1995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전위적 예술행위로 우리나라 언론에도 몇 번인가 오르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돼지우리에서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하면 터키 이스탄불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 터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이나 회화가 아닌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기에 어떤 책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맨해튼에서 상실했던 삶의 요소들을 이곳에서 되찾은 듯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함, 소박함? 아마도 사막에서 내 뺨을 스치는 다양한 공기의 감촉이었을까? 동물들의 여운 있는 울음소리였을까? 맨발로 걸어갈 때 느끼는 모래의 감촉이었을까? 질병과 더러움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상실했을 때, 나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평화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획득했다."    (p.136~p.137)

 

<김미루의 어드벤처>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녀는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말리의 사하라사막 팀북투지역과 몽골의 고비사막을 탐험하며 그녀는 사막의 상징과도 같은 낙타와의 교감을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하고 싶었던 듯했다. 끝없는 모래언덕과 황폐한 땅에도 생명은 존재하고 외부와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담는다.

 

"제일 먼저, 사막의 황폐함이 지니고 있는 이국적이고도 로맨틱한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포스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포스는 손상된 인간관계의 현실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부추겨댔다."    (p.28)

 

작가는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자신의 오래된 생활방식을 사막이라는 극한의 지역에서 여러번 되새긴다. 자신이 자연이라는 틀에서 인위적인 어떤 것으로 얼마나 많이 기울었던가, 하는 반성과 자책으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순수한 사막의 속살을 향해 낙타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사진 속 모습은 구도자의 그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아마도 낙타가 그들의 동반자로서 우리 인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사막에서 평화를 찾는 그 놀라운 지혜를! 지금은 사막의 커뮤니티가 종교, 권력, 정치, 자원, 이권 등등의 문명의 요소로 인하여 오염된 측면이 있지만, 낙타와 인간이 사막에서 공생하는 최초의 순결한 삶의 방식은 평화 그 자체였을 것이다."    (p.155)

 

작가의 다음 계획을 묻는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제 정글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결벽증을 극복하기 위해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갔었고, 애벌레 공포증을 벗어나기 위해 이제 정글로 향한다는 그녀의 모험정신은 나와 같은 도시내기에게도 작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이라는 외투를 입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 자신의 외투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짓임을 나는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반성해 본다. 날이 춥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애쓰는 모든 생명체의 경건한 몸짓을 나는 이 책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조용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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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에서 '상생'이라는 말만큼 공허하고 헛된 구호도 다시 없을 듯합니다. 말하자면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속이 없는 말이라는 뜻이지요. 자본주의는 애초에 개인의 욕심을 부추겨서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을 일구워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욕심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성장동력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므로 '상생'이니 '이타주의'니 '헌신'과 같은 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성자와 같은 인격체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에 속한 종교단체는 온전할까요? 제 생각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종교단체의 지도자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표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듯합니다.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은 그가 돈이 된다면 못할 일이 없었던 것이죠. 가뜩이나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된 그의 위치를 감안할 때 그런 일쯤이야 전혀 두려울 게 없었을 듯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인도주의니 윤리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의 저항으로 인해 몇 백, 몇 천 명이 죽건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본심으로는 이번 기회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제거되었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죠. 미국인들은 개인의 윤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반미치광이를 자국의 대통령으로 뽑은 셈입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 자리를 아들에게 세습한 명성교회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요. 그것은 애초부터 종교단체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종교단체를 가장한 개인기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땅을 사서 축재를 하고 축적된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하기 위한 재단을 만들고 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인 셈이지요. 종교인이 아닌 개인에게서는 말이죠.

 

오늘은 문재인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도심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리로 불러냈던 동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지요. 비급여 축소는 그들에게 수입의 감소를 가져올 게 너무도 뻔한 사실이니까요. 세상에는 돈 때문에 미쳐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트럼프도, 명성교회도, 대한민국의 의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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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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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 18: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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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 위태로운 정신과의사의 행복한 산티아고 피신기
김진세 지음 / 이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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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무작정 걷고보는 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오래된 일상이다. 학창시절부터 지켜온 워낙 오래된 습관인지라 뇌가 명령하거나 의무적인 사명감으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년 연초의 신년 계획에 남들 다 하는 '운동하기'를 목록에서 뺄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실 제 몸을 위하는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부러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찬하는 '걷기'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보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렇다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무의미한 열광 대열에 무작정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이따금 들춰보며 맘에 드는 구절을 소리 내 읽어보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걷기 예찬' 중에서)

 

정신과의사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저자가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때 그때의 순간적인 감성과 스치는 생각들을 메모식으로 기록한 일반적인 산티아고 순례기와는 조금 다른 책이다. 사진도 없을 뿐만 아니라(아주 없는 건 아니고 책의 맨뒤에 부록처럼 묶였다) 생각의 편린들을 쥐어짜듯 그러모은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러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정신과의사로서 저자는 서울에서 환자를 많이 보기로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평일 진료는 말할 것도 없고 주말이나 야간 진료도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수백 편의 정신의학 칼럼과 인간 심리에 대한 단행본만 여덟 권, 방송 출연과 강연까지. 그야말로 저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남들 두 배, 세 배 몫의 일을 하면서도 거뜬했던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상이 무너지고 상담조차 귀찮은 일이 되더니 급기야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는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산티아고 길 순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단순히 버킷리스트로만 간직할 줄 알았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터, 가뜩이나 정신과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에서는 더더욱.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아버지를 잃은 야스퍼도, 동생을 잃은 라우라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어느 날, 한 번 이상의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상실은 역설적으로 축복이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서 커다란 아픔을 맛보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삶은 그렇게 상실을 통해 깊어진다." (p.232)

 

무작정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거나 반대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걷기'라는 단순한 반복운동이 주는 효과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주 먼 거리를 걷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여 아주 깊이 빠져드는 일도 더없이 즐겁다. 사는 게 걷는 것만큼이나 단조로웠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처음에는 낯선 길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지구별의 낯선 지점에 서 있었다. 걷다보니 그 길이 친근해졌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렵다. 그 두려움 속에서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나말고도, 커다란 나무를 꺾을 만큼 거친 바람도 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은혜를 갚은 사울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펼쳐지는 기적을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존재'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기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좀더 신중하고 진지히게 인생을 살자.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p.333)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고 좀더 초연해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비단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경험이나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도, 경제적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복잡한 얽힘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게 마련이고, 현실에서 바라보는 과거는 누구에게나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가 순례길에 매료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겪는 보편적인 경험들을 그 길에서 압축적으로 맛볼 수 있고, 그런 고통들을 나만 겪었던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 절망과 기쁨, 기대와 한탄 등이 지금 당장은 나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하지만 시간의 저편으로 밀려나는 순간, 흐릿한 기억으로 변질되어 내게서 점차 멀어진다는 걸 수많은 만남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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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명예퇴직을 한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소식을 건너 건너 소식으로만 전해들었을 뿐 직접 연락하거나 위로주를 산 적도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무정했었다. 허투루 대할 친구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에 와서 변명을 하자면 이러했다. 친구가 명예퇴직을 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서 나에게도 그 다음날 바로 전해졌었다. 나는 그때 집안의 작은 고민거리로 며칠째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지라 친구의 소식은 금세 잊혀졌고, 날짜가 많이 흐른 후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다시 그 소식을 듣고나서야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에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고민거리만 해결되면 문자나 전화로 끝낼 게 아니라 직접 만나 따뜻한 밥이라도 한끼 사줘야겠다, 생각했던 게 그만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일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들었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끓였다. 이따금 소식으로만 친구의 안부를 전해들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무정한 놈'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면서 죄책감만 키워왔었다.

 

오늘 낮에 그 친구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벨소리만 들으며 머뭇머뭇 받지를 못하던 내가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저 건너편에서 전해지는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많이 바쁘지? 일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전화 걸기도 조심스럽더라구. 진작 했어야 하는데..." 나는 친구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짐짓 바쁜 척 시치미를 뗐다. "응. 그동안 좀 바빴지뭐야. 전화라도 한다는 게 그만... 미안하다." 했더니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너가 미안할 일이 뭐 있다고. 지금 시간 괜찮으면 점심이나 같이 할래?" 하였다. 나는 그렇게 오래 미뤄두었던 밥 한끼를 어렵게 대접했다. 내가 만일 그 친구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하면서 말이다.

 

헤어지면서 했던 친구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떠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사는 게 다 그렇지."하면서 담담히 답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맑았다. 오늘은 대설, 친구에게 밀린 숙제를 하듯 밥 한끼를 대접했던 나는 찬바람 속에서도 훈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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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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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비밀'로 완벽히 치환된다. 그러므로 삶은 곧 하나의 비밀 덩어리인 셈이다. 평생에 걸쳐 생성된 비밀은 오롯이 한 사람에게 귀속되지는 않는다. 시간에 풍화되기도 하고 새로운 비밀과 합쳐져 새로운 비밀을 만들기도 한다. 사는 동안 드러나지 않은 비밀은 죽음과 함께 영속하는 우주의 언어로 저장된다. 그러나 시간에 풍화된 비밀은 망각의 공간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떨어져 나간 부스러기가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기도 한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한 사람의 삶이, 또는 한 사람의 죽음이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남기 위해서는 그가(또는 그녀가) 평생을 바쳐 만들었던 비밀을 비밀 그 자체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밀은 비밀로 유지될 때 아름답기 때문이다.

 

손보미의 장편 소설 <디어 랄프 로렌>의 이야기 또한 주인공 종수의 비밀 서랍장에서 출발한다. 미국에서 구 년째 유학생활을 하던 종수는 대학원 지도교수인 기쿠 박사로부터 사실상 자퇴 압력을 받는다. 종수가 전공하는 물리학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구실이었지만 기쿠 박사의 충고는 대학원을 떠나라는 명령이나 진배없었다. 종수는 자신의 모멸감을 숨긴 채(말하자면 기쿠 박사와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을 숨긴 채) 자신의 기숙사 방에 칩거한다. 대학원 기숙사에 있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 침거하던 그는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오래전에 만들어진 자신의 비밀과 조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기쿠 박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브라이언트 파크에 다녀오기도 한다.

 

"수영의 청첩장을 앞에 두고, 나는 분노와 좌절감과 패배감과 슬픔과 외로움이라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냥 내 안의 어떤 부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밀의 서랍'이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나는 이미 낭떠러지 바깥 허공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p.33)

 

잠겨 있던 책상 서랍에서 종수가 발견한 것은 받았던 사실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수영'이 보낸 청첩장이었다. "디어 종수, 나는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는 짤막한 내용의 청첩장에서 종수는 그가 열여덟 살이던 그해 여름, '수영'과의 추억(둘만의 비밀일 수도 있는)을 떠올린다. 수영은 그때 자신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번역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랄프 로렌은 니트, 헤어슈슈, 향수 등 온갖 것을 만들면서도 오직 시계만은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치고 싶은' 그녀는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써서 랄프 로렌에게 보낼 작정이었다. 종수는 '수영'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편지를 번역하는 일에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원에서도 쫓겨나는 바람에 마땅히 할 일이 없어진 종수는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겨스케이트를 타는 기쿠 박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면전에서 그를 조롱하려던 처음의 계획을 접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랄프 로렌 매장을 보았고 매장에 들어가는 대신 뉴욕 도서관에 들러 고인이 된 랄프 로렌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그닥 알려진 게 없는 랄프 로렌의 삶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종수는 대학원에서 쫓겨난 후 미국에 머물렀던 일 년 동안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찾아나선다. 그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찾아 읽고,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소설은 이제 종수의 이야기인 동시에 종수가 탐색하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가 된다. 열한 살에 야반도주를 하여 뉴욕에 왔던 랄프 로렌이 구두닦이를 할 때, 그를 데려가 아들처럼 키워주었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오랜 이웃이었던 백네 살의 할머니 레이첼 잭슨, 레이첼 잭슨을 돌보는 입주 간호사 섀넌 헤이스 등 랄프 로렌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종수가 만난 인물들의 이야기도 더해진다.

 

"수영은, 수영은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중에 섀넌 헤이스는 그게 바로 상실감이라고 말했다. "마음속에 구멍이 난 것 같죠. 안 그래요?"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가 당신 마음속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가지고 가버린 거죠." (p.41)

 

종수는 끝내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았던 구체적인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랄프 로렌을 탐색하며 미국에 머물렀던 일 년의 시간이 무의미하기만 했던 것일까? 종수가 읽었던 여러 자료와 주변 사람들이 들려주었던 여러 이야기, 그 모든 게 랄프 로렌의 삶을 완벽히 재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이 취득한 평생의 비밀은 결국 그 사람의 온전한 삶이 된다. 독일의 심리학자 우르술라 누버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밀은 우리 인생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라고 말이다.

 

타자화 된 어떤 대상이나 광대한 이 우주의 시공간에는 우리가 채 밝혀내지 못한 무수히 많은 비밀이 존재한다. 비밀이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의 관심과 호기심이 이어지고 그로 인하여 어떤 관계와 질서가 맺어진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밀은 곧 대상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이자 촉매제인 셈이다. 투명함이 보편적 미덕처럼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 자신의 비밀을 지키며 산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매일 조금씩 자신의 비밀을 잃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없는 비밀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작금의 세태에 누구 한 사람쯤은 굳건히 자신의 비밀을 지키며 산다는 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나는 누군가의 비밀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마음속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가지 못하도록 나 한 사람이라도 꼭 지켜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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