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명예퇴직을 한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친구의 소식을 건너 건너 소식으로만 전해들었을 뿐 직접 연락하거나 위로주를 산 적도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으로 무정했었다. 허투루 대할 친구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렇게 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지금에 와서 변명을 하자면 이러했다. 친구가 명예퇴직을 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서 나에게도 그 다음날 바로 전해졌었다. 나는 그때 집안의 작은 고민거리로 며칠째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지라 친구의 소식은 금세 잊혀졌고, 날짜가 많이 흐른 후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 다시 그 소식을 듣고나서야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죄책감이 가슴에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고민거리만 해결되면 문자나 전화로 끝낼 게 아니라 직접 만나 따뜻한 밥이라도 한끼 사줘야겠다, 생각했던 게 그만 머릿속에서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시일이 한참이나 지난 뒤에 친구의 소식을 다시 들었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끓였다. 이따금 소식으로만 친구의 안부를 전해들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무정한 놈'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면서 죄책감만 키워왔었다.
오늘 낮에 그 친구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벨소리만 들으며 머뭇머뭇 받지를 못하던 내가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저 건너편에서 전해지는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많이 바쁘지? 일하는 데 방해가 될까봐 전화 걸기도 조심스럽더라구. 진작 했어야 하는데..." 나는 친구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짐짓 바쁜 척 시치미를 뗐다. "응. 그동안 좀 바빴지뭐야. 전화라도 한다는 게 그만... 미안하다." 했더니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야. 너가 미안할 일이 뭐 있다고. 지금 시간 괜찮으면 점심이나 같이 할래?" 하였다. 나는 그렇게 오래 미뤄두었던 밥 한끼를 어렵게 대접했다. 내가 만일 그 친구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하면서 말이다.
헤어지면서 했던 친구의 말이 지금도 뇌리에 떠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나의 물음에 "사는 게 다 그렇지."하면서 담담히 답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맑았다. 오늘은 대설, 친구에게 밀린 숙제를 하듯 밥 한끼를 대접했던 나는 찬바람 속에서도 훈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