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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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는 '왜 행운은 나만 피해 다니는 것일까? 왜 나는 항상 패자가 되는 것일까? 라는 자책에 시달리는 사람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이 실려 있다. 괜히 짠해지는 대목이다. 그 말인 즉, 저자 역시 삶에서 행운이 따르지 않았고 이제껏 항상 패자로 살았다는 뜻일 터,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이라도 부디 행운을 거머쥐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마저도 헛된 바람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나로 말하자면 책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 속한다. 헌책에 적힌 전 주인의 메모를 그리도 귀하게 여기고 재미나게 읽는 편이지만 정작 나는 책에 메모하지 않는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나는 온건한 정신적 사랑파에 속한다. 띠지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아서 새책을 받으면 띠지는 휴지통에 직행시킨다. 또 책갈피를 사용하지도 않고 볼펜을 끼워두거나 그것마저도 귀찮으면 그냥 읽던 쪽을 접는다." (p.63)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책벌레이자 책 수집가인 저자 박균호는 그의 책 <독서만담>에서 책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을 아주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다. '츄리닝, 난닝구, 삼선 쓰레빠'로 무장하고 하릴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아재 패션'만큼이나 그의 수다는 구수하고 넉살이 좋다. 물불 가리지 않고 희귀본을 손에 넣고자 했던 일화나 시골 학교의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던 시절의 이야기, 12년간 어머니의 병간호를 맡았던 이야기, 늦게 배운 담배와 흡연에 얽힌 이야기 등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저자의 맛깔스러운 입담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읽었던 책이 등장한다. 책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강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고 오히려 마음이 짠해지는 패배자들의 삶은 날조된 이미지나 탐욕으로 점철된 승리자의 삶보다 더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 더구나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패배와 실패의 연속이다. 나는 아내와의 싸움에서 늘 패배하며, 아내는 아내대로 매주 로또 당첨 번호를 비껴간다." (p.171)

 

저자는 김훈의 소설 <화장>과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 시니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배우고, 이윤기의 소설 <하늘의 문>을 통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열쇠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결혼 전 필독서로 <최성애 박사의 행복수업>, <셀프 & 커플 5분 마사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권하기도 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쓴 사노 요코의 <자식이 뭐라고>, 최민준의 <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를 통해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저자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다 보면 인생에 있어 책만큼 소중한 게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가 풀어놓는 어떤 에피소드에도 책이 빠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치 책이라는 삶의 안내서도 없이 인생을 마구잡이로 살고 잇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삶이 암담해지는 어느 순간에,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대는 어떤 때에도 그 상황에 맞는 책 한두 권쯤 떠올리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그저 '무대뽀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깝다고 말해왔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꼭 내가 글쓰기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글쓰기가 나의 취미 생활이라면 휴대전화 카메라로 셀카를 찍듯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써야 한다. 실상 글을 쓰는 장소는 여름에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겨울에는 온풍기가 작동되는 도서관이어야 하고, 시간을 따지자면 주말이나 하루 종일 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이어야 한다. 더불어 노트북과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름의 감옥을 구축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p.258)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박균호의 <독서만담>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책과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의 제목을 모두 구매 목록에 넣다 보면 지름신이 강림한 어느 날 저녁 나도 모르게 대량 구매의 버튼을 누를 수도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황홀한 글감옥>을 썼던 조정래 작가처럼 오늘은 하루쯤 글감옥이 아닌 독서 감옥에 갇히는 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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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많은 책을 도대체 누가 다 읽는 걸까?' 하는 것이다. 간혹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할 듯 보이는 두껍고 따분한 제목의 책을 만날라치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책들을 우연히 볼라치면 서가에서 꺼내어 휘리릭 책장만 넘겨 보고는 다시 그 자리에 꽂아 두곤 한다. 빌리지는 않지만 쌓인 먼지라도 털어낼 요량으로 말이다. 그렇게 눈인사만 주고받던 책들이 어쩌다 대출이라도 되어 책이 놓였던 자리의 빈 공간을 발견하는 날이면 책을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진다. 책의 진가를 발견한 누군가에 의해 책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것이다.

 

웹서핑을 하다가도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할 듯한 기사의 아래쪽에 누군가가 남겨 놓은 짧은 댓글을 보노라면 읽고 있는 내가 괜히 고마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쓰임대로 쓰일 수 있을 때 기쁘지 않겠는가.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글이든, 누군가가 몇 년 혹은 평생을 바쳐 완성하였을 한 권의 책이든,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던져지기까지 분명 누군가의 노력과 시간이 투자되었을 테고 그것을 알아주는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이 1월 24일이라는 사실을 지하철 광고를 통해 알았다. 아이돌 가수도 아닌 정치인의 생일 축하 광고를 지하철의 영상 광고로 보게 될 줄이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국민의 민주적 역량이 이 정도로 높아졌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날 만큼 벅차올랐다. 광고 제작에 쓰였을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돈을 떠나서 그게 고마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시샘하는 누군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정치인이든 누구든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주고 그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그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제야 비로소 국민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컷의 광고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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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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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달구었던 삶의 부지깽이가 주말이면 차갑게 식어버리곤 한다.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쓸고 가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주일 내내 지었던 어색한 표정들을 지우기 위해, 때로는 더 깊은 고요를 선물받기 위해, 그리고 소매 끝에 남은 가식의 부스러기를 털어내기 위해 주말에도 이렇게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손에 올려 놓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양장본 표지의 차갑고 단단한 느낌에 흠칫 놀란다.

 

늙음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오직 그 하나의 문장이 맴맴 맴을 돌았다.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늙어간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오래전 태어날 때처럼 여자, 남자, 그런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다만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여자'. 정말이지 그렇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늙는다는 건 성별의 경계도, 네 것 내 것을 가름하는 소유의 경계도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p.30)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과는 달리 딸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머니인 '나'의 시선에 비친 딸의 모습이며, 생각 또한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살갑고 가꿔야 할 두 사람의 관계는 매번 엇나가고 틀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을 잃고 사력을 다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동성애자인 까닭이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어머니일지라도 우리 사회 전체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동성애자를 자신의 딸이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감싸고 옹호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산 속 깊이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을 터였다.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p.84)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결혼 후 딸애를 낳고 교습소에서 일을 했던 것을 필두로 도배,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 조리사를 거쳐 지금은 요양병원의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시간제 강사를 하며 따로 살던 딸애는 살던 집에서 쫓겨날 신세라며 나에게 '돈'을 부탁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나'는 결국 딸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고, 딸애는 연인인 그 애와 함께 '나'의 집으로 이사한다.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을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번번이 그 애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하고 한마디를 보태고 그러면서 어떤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애는 때때로 지나치게 사려 깊다. 내게 어떤 말이 필요하고,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p.61)

 

주인공이 돌보는 일인실의 노인 '젠'은 젊은 시절 해외에서 공부하며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평생을 사회와 타인을 위해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돈을 내고 요양원에 들어왔건만 젠은 이제 가족도 없는 치매 노인이라는 이유로 요양원에서도 쫓겨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노을이 깔린다. 지치고 서글픈 빛깔이 교문 너머에까지 가닿는다. 이렇게 좋은 시절이 다 가 버렸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머무는 시간, 그리고 내가 보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너무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p.96)

 

딸애와 따로 살 때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딸애와 그 애와의 관계를 한 집에서 함께 살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자 '나'와 딸애, '나'와 그 애 사이의 반목과 갈등은 점점 심해져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딸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젠에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애는 동성애와 관련된 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된 동료 시간 강사를 위해 시민단체와 함께 시위에 나서게 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맞아 병원에 실려가고 만다. 딸애의 부상으로 주인공이 출근하지 않았던 며칠 사이에 요양원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젠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 '나'는 일련의 이런 일들을 겪으며 딸애와 그 애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비록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상처와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p.149)

 

소설에서 '나'는 젠의 모습에서 딸애의 미래를 보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오직 홀로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로부터의 수모와 멸시마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고스란히 딸애를 향한 날선 분노로 표출된다. 그런 분노는 딸애가 지금이라도 다수의 편에 서서 젠과 같은 미래를 맞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바람이 성취될 수만 있다면 '나'는 딸애에게도 딸애의 연인에게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으로 남아도 좋은 것이다.

 

무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함의 끄트머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외면과 눈 감음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단 그들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쪽, 다수의 사람들이 포진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도덕적 정의의 결핍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잣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실존의 문제인 것이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몹쓸 병에 걸리거나, 실직이나 부도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경제적 위기만으로도 '평범한 삶'은 아주 쉽게 무너너져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음도 그렇듯, 다 잃고 난 후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다수의 편에 서 있을 때에는 소수자의 고통이나 아픈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산다. 그것이 나의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일 당장 강추위가 몰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잘 믿지 않는다. 그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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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발걸음이 간신히 발만 떼었을 뿐 길게 뻗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개는 갑자기 끼어든 다른 생각이 처음 생각을 가로막거나 급하게 처리할 일 때문에 생각에 방해를 받거나 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생각의 발걸음을 원하는 곳까지 길게 이어가는 게 두려운 경우가 그러하지요. 생각의 발걸음이 최종적으로 멈추는 지점에서 내가 느낄 좌절이나 속절없음이 지레 겁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가족 중 누군가가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렸다거나 팍팍한 살림살이와 나아지지 않는 형편으로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경우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더이상 진전시키지 않은 채 생각 자체를 아예 닫아버리게 되지요.

 

새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으레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최근에 보도된 끔찍한 뉴스를 보면 차마 그런 말을 쓸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불에 담뱃불을 끄는 바람에 옮겨 붙은 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세 명의 아이들과 조현병을 앓던 엄마가 어린 두 자녀를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투신하였다는 기사 등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우리는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친구들에게 이따금 실없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워낙 지은 죄가 많아서 취하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차마 바라볼 수 없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너희들이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이죠.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생각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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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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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아버지가 가족의 곁을 영원히 떠난 지 만 1년쯤 지났을 무렵,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에 대한 불만을 아버지는 오직 술로 풀어보려 했고, 술에 만취해 귀가한 날이면 여지없이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했고 겁에 질린 자식들이 조심스레 말리기라도 할라치면 그 불똥이 급기야 우리 형제들에게 옮겨 붙곤 했었다. 대상도 불분명한 분노를 아버지는 술과 폭력으로 풀었던 셈이다. 살면서 정신이 말짱했던 때보다 술에 취해 분간을 할 수 없었던 때가 더 많았던 아버지였으니 가족 중 누구도 곁에 가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고민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살갑게 대화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고립과 외로움이 커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술에 의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술과도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술과 함께 멀어진 가족과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데면데면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나는 정말로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젊은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는지, 무엇이 그렇게 아버지를 힘들게 했는지 나는 도통 아는 게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이런 질문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다. 나는 오직 대답 없는 질문만 늘어 놓을 뿐이다.

 

패드라 패트릭의 소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를 읽는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자신도 까맣게 몰랐던 아내의 젊었던 시절의 과거를 따라 여행하게 된다는 설정의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이 각자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반성하게 한다.

 

"꼭 1년 전 오늘, 그의 아내가 죽었다. 세상을 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죽었다라는 말이 욕이라도 된다는 듯이. 아서는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증오했다. 그 말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운하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처럼, 혹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온화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p.10)

 

곧 일흔 살이 되는 주인공 아서는 그의 아내 미리엄이 살아 있었을 때 행동했던 것처럼 7시 30분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면도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정각 8시에 토스트 한 쪽과 마가린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 다음, 널찍한 소나무 식탁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8시 30분이면 설거지를 하고 부엌 조리대 상판을 손바닥으로 쓸어낸 다음 레몬향이 나는 물티슈 두 장으로 닦는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아서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아들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딸이 한 명 있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서 생활한다. 독립을 한 자식들은 혼자가 된 아서에게도 무관심하다.

 

어느 날 아서는 아내가 쓰던 유품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내를 잊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아서는 아내의 옷장에서 못 보던 참(charm) 팔찌 하나를 발견한다. 여덟 개의 참이 묵직하고 화려한 금팔찌로부터 그림책에 나오는 태양처럼 뻗어 나가며 달려 있었다.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그리고 반지.

 

단 한번도 영국을 벗어난 적 없었던 아서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모험을 통해 아서는 여행이라고는 자신과 근교에 다녀온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의 아내는 그들이 사는 영국이 아닌, 인도와 파리에서도 살았었고, 유명한 소설가와의 친분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누드모델이 되기도 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미리엄의 첫사랑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내의 연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절친했던 단짝 친구와도 멀어지는 바람에 그 친구는 미리엄을 여전히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서는 자신도 몰랐던 아내의 여러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된 후 놀라고 당황하는 한편 배신감도 느끼는 듯했다.

 

"아서는 새벽 2시까지 아내가 소니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미리엄이 소니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처음 밝힌 첫 번째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는 편지들을 차례로 조그맣게 찢었다. 다음 날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종잇조각들을 쓸어 모아 손수건으로 싸놓았다. 그는 그의 아내를 잘 알았다. 두 사람은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했다. 이제 그녀를 놓아줘야 할 때였다." (p.398)

 

아내의 과거를 따라 모험을 떠났던 아서는 모험을 통해 그의 아내 미리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험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읽었을 때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는 소설이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로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듯 행동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났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게 그닥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의 상실감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의 크기와 비례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깊은 까닭도 그런 이유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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