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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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기를 읽을 때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어깨가 움츠러드는 긴장감에 휩싸이곤 한다. 책으로 출간되어 읽는 것이 공식적으로 허락된 일기이든 개인의 사적 비밀이 담긴, 책상 서랍에 꽁꽁 숨겨둔 비밀 일기이든 가리지 않고 일기라는 이름이 달린 글을 읽고 있노라면 언제나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학창 시절, 형이나 누나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다 들켜서 죽지 않을 만큼 혼쭐이 났던 경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주눅 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기를 읽을 때는 언제나 내용 위주로 후다닥 읽는 것은 물론 한두 줄의 중요 문장만 머릿속에 기억한 채 원래 있던 자리에 가지런히 두고 조용히 물러나는 걸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정은 작가의 『일기日記』를 책으로 읽으면서도 나는 내내 주변의 눈치를 살폈고, 금방이라도 누군가 내 방문을 왈칵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책을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이러한 긴장감으로 인해 눈을 통해 들어온 문장은 뇌를 통해 쉽게 이해되거나 기억되지 않았다.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몰래 훔쳐 읽는 것만 같았고, 꽁꽁 숨겨둬야 할 이야기들을 나만 알고 있는 듯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나와 동거인의 나이를 잘 세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일은 여우에 홀려 여우굴에 들어가는 일과 얼마간 닮았다. 백지를 바라보다가 한 계절, 두 계절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봄비 내릴 때 책상 앞에 앉았는데 소설 한편을 마무리하고 나오니 낙엽이 떨어지는 때,라는 패턴으로 시간이 흐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해 살다보니 나이를 띄엄띄엄 생각하거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p.32)

 

내가 황정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던 건 아마도 <百의 그림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절의 나는 박민규 작가의 <핑퐁>이나 <카스테라>, 천명관 작가의 <고래>처럼 문체가 특이하거나 창의성이 뛰어난 작품들에 열광하고 있던 터라 황정은 작가의 <百의 그림자> 역시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디디의 우산>이나 <연년세세>도 출간과 동시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자만 기억할 뿐 그녀에 대해 도통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소설 잘 쓰는 작가일 뿐.

 

첫 장인「일기日記」와 그다음 장인 「일 년一年」은 파주로 이사한 작가의 달라진 일상과 코로나19로 인한 주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의중앙선 너머로 호수공원이 보이는, 직선거리로는 15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철길이 가로지르고 있어 1킬로미터를 걸어야 호수공원의 일부인 소리천에 다다를 수 있는 곳이란다. 작가는 원고노동자로서 몸을 관리하기 위해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고 근력운동과 스트레칭을 하는 등 몸을 지키는 일에 열심인 모습을 쓰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적응을 하며 집앞 공터인 '반달터'를 지켜보았고, 우주를 상상하기도 하고, '명命을 지닌 존재들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p.41)

 

「책과 책꽂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과 「민요상 책꽂이」에는 어린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빨강머리 앤」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평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목포행木浦行」은 2017년 이후 매년 목포신항을 방문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산보」는 작가가 돌보는 화분들과 걷기에 관한 이야기를, 쿠키를 먹는 것처러 읽을 수 있는 일기를 목적하고 썼다는 「쿠키 일기」, 그리고 「고사리를 말리려고」와 「흔痕」에는 작가의 과거가 담겨 있다. 작가의 아픈 과거를 읽다 보면 공감할 수 잇는 아픔 한 자락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어떤 날들의 기록이고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기록이기도 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은 독자들이 잘 피해갈 수 있도록 '일기日記'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p.197 '작가의 말' 중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살금살금 겨울비가 내렸다. 점심을 먹고 조심스레 빗길을 걸었다. 먼짓내가 사라진 가까운 공원의 풍경을 눈에 넣으며 나는 누군가의 아픔을 생각했고, 인간의 삶이 유한하다는 게 썩 나쁜 일은 아니라며 자위했다. 누군가 다녀갔는지 허공에서 보행을 하는 운동기구는 주인을 잃고 한동안 흔들렸다. 살금살금 비가 내렸고, 조용조용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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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꼴값을 떠네!"라는 말로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꼴값'은 사실 '얼굴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지만 '꼴값하네' 혹은 '꼴값 떠네'라고 이르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통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나 과장스런 몸짓 자체에 꽤나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물론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사대부의 남정네들, 그것도 얼굴값 하는 남정네들에 대한 거부감 혹은 안하무인의 태도는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감정은 시대가 바뀌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들 의식 곳곳에 남아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불현듯 툭 하고 불거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여인네도 있었던 모양이다. 야당의 대선 후보 부인이 바로 그렇다. 그녀와 한 인터넷 언론 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 중 한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보수들은 챙겨주는 것은 확실하지, 그렇게 뭐 공짜로 부려먹거나 이런 일은 없지. 그래서 미투가 별로 안 터지잖아. 미투 터지는 게 다 돈 안 챙겨주니까 터지는 게 아니야. 돈은 없지, 바람은 피워야겠지. 이해는 다 가잖아. 나는 다 이해하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이 대목만 들어보면 바람피우는 데 익숙한 남정네들의 입장에서 그녀는 보살과 다름이 없다. 이해의 폭이 바다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느 신문사에서는 '걸 크러시'라는 제목을 뽑아 찬양 기사도 내지 않았던가. 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꼴값을 떨어도 이런 꼴값이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소위 검사의 부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바람피우는 것에 대한) 그 정도의 포용력과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이해했다. 이른바 남정네가 꼴값을 떨어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마음속으로만 삭혀야 한다는 것, 그게 여인네의 도리인 것이다. 이런 태도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그걸 또 '걸 크러시'라고 칭송하는 언론사는 또 뭐고. 세상 참 가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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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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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코로나가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하면 많은 사람들이 1순위로 꼽는 것 중 하나가 '교회의 몰락'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신교의 몰락일 수도 있고, 목사로 지칭되는 개신교의 목회자에 대한 불신과 그들의 세속화에 대한 염증쯤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와 같은 현상이 유독 대한민국에서 크게 불거졌던 데는 공동체를 중시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상화된 우리 국민의 높은 시민의식이 크게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교회를 중심으로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과 그들만의 폐쇄성이 상존하는 교회의 태도가 코로나 시국에 무척이나 이기적으로 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테다. 감염병 예방을 위해서 온라인 예배를 강조했던 정부 방침을 무시하면서 대면 예배를 강행했던 일부 교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확진자가 연일 발생했던 것은 물론 그와 같은 사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주변의 상인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 주민들도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으니 교회를 좋게 볼 수만은 없었던 게 사실. 지금 당장 코로나가 종식된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안녕을 도외시한 일부 교회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다. '교회는 다 그렇다'는 식의 일반화는 건전한 교회마저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마저 약화시킨다. 하기야 황금만능주의와 자유시장경제가 팽배한 21세기에 이르러 보이지 않는 신의 권능보다는 돈의 위력이 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시각이 우세한데 종교가 무슨 필요이고, 믿음이 뭔 소용이겠나.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고, 절대자를 찾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믿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함께 그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는 더욱 절실해지지 않았을까.

 

"희망과 기대감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 삶의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내일의 천국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지금 우리의 삶이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가 헛된 희망과 거짓된 기대로 과대 포장한 선물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불안한 인간 존재에게 신실하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써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p.15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에서)

 

<라틴어 수업>으로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한동일의 신작 에세이 <믿는 인간에 대하여>는 어쩌면 성직자 신분인 저자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참회의 기록인 동시에 자신과 종교가 다른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공존의 악수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20, 30대의 탈脫종교 현상은 종교 인구의 고령화와 전체 종교 인구의 감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통계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는 마당에 종교인이 나서서 자신들이 믿는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옳지 않다고 한다거나 비종교인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종교는 어쩌면 설 자리를 잃고 소멸할지도 모른다. 한동일 저자 역시 그와 같은 긴박한 심정에서 이 책을 구상했을 터, 저자의 경험과 한 인간으로서 겪는 고뇌를 숨김없이 드러낸 이 책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고통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 온 구조적인 문제가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 탓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웃끼리 서로 고통을 주고받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나 내가 믿는 종교의 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비난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그를 구제해야 할 죄인으로 보며 다가가지 않아야 합니다."  (p.242)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교, 이슬람, 유대교의 성지가 모두 모여 있는 예루살렘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도 하고, 각자의 종교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분리장벽을 세우고 전쟁도 불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신의 존재와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또한 저자는 코로나 정국을 통과하면서 종교인이 취할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자유'에만 큰 방점을 찍고 행동한다면 사회나 이웃과 불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나와 내가 속한 종교 공동체의 행동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웃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p.137)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한 저자의 말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곱씹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단 믿는 자들에 대하여 던지는 말은 아니었을 터,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의 그와 같은 거룩한 모습을 여러 번 반복하여 보면 볼수록 돈과 신이 경쟁하는 작금의 사태는 조금씩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믿는 자들이 나서서 희망이 없는 시대에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종교 무용론이 발붙일 자리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냉담자가 냉담을 풀고 성당의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믿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일 터, 중언부언 변명 같지 않은 변명으로 리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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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기억, 베스트셀러 속 명언 800 - 책 속의 한 줄을 통한 백년의 통찰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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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 혹은 하나의 이미지가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단어가 혹은 문장이 또는 이미지가 지나온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게 만들고 뜨겁기만 하던 열정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던 것인가?' 하는 회의가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차올라 손가락 하나 굼적거리기 싫어지는 처지에 놓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가. 차갑게 식은 가슴은 무엇으로 데울 수 있을까.

 

"우리는 항상 경험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일부다. 당신의 상황에 책임이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불행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다. 왜냐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평가할 기준을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다."  (p.189 '마크멘슨, <신경 끄기의 기술>)

 

인문학자 김태현의 저서 <백 년의 기억, 베스트셀러 속 명언 800>은 14개의 파트에 그에 알맞은 다양한 책의 명구를 옮겨 적어 한 권의 책으로 재탄생한 명언집이다. 저자가 나눈 파트의 소제목만 찬찬히 살펴보아도 삶의 갈림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고민과 갈등의 순간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Part 1. '좀 더 느리게 걷다 보면 보이는 것들', Part 2. '버림을 통해 채움을 얻는 방법', Part 3. '지친 마음을 보듬어주는 책 속의 한 줄들', Part 4. '픽션으로 세상을 보다', Part 5. '역사도 인생도 똑같이 반복한다', Part 6. '미래를 움직이는 인문학', Part 7. '꿈과 목표는 어떻게 인생을 바꾸나', Part 8. '나의 시간을 내가 지배하는 법', Part 9. '미래와 미경험의 세계를 도전하는 힘', Part 10. '인생의 안목과 센스를 기르는 방법', Part 11. '인간관계에도 정답이 있다면', Part 12. '0.1% 탁월한 사람들의 인사이트', Part 13. '돈의 사이클을 만들어내는 부자들의 비밀', Part 14. '천재들은 어떻게 사고하는가'가 그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경제적 형편에 따라 성공과 실패로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 부(冨)를 염두에 두고 책의 구성을 꾀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돈 문제는 재무관리가 아닌 역사와 심리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크게 성공한 투자자, 가장 크게 파산한 투자자 모두를 만나고 깨달은 한 가지는 진정으로 부를 이해하고 부를 얻고 싶다면 인간의 심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p.312 '모건하우절, <돈의 심리학>')

 

목차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저자의 관심이 오직 '돈과 성공'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나 어떻게 하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든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법 등 우리의 삶 전반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저자 스스가 읽었던 책 속에서 찾은 명쾌한 해답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임으로써 삶이 처음인 우리 모두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멀어진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당신에게 자꾸만 다가서고자 하는 건, 당신 또한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P.279 '레일라운즈 <사람을 얻는 기술>')

 

사실 이와 같은 책 속 명언이나 아포리즘을 모아 엮은 책은 독자들에게 그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한 권의 책을 통해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설명이 뒤따르지 않는 하나의 문장만 발췌한 것이기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들이 그 많은 책을 일삼아 읽는다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이처럼 한 권의 책에서 여러 사상가나 인문학자, 성공한 사업가 등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경구 혹은 지침을 통해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삶의 정수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더없이 유익한 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갖는다는 것, 아니 나이가 든 까닭에 젊은이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품는다는 건 삶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바른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전보다 육체적으로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우리들 각자는 시나브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현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 하나의 이미지가 나의 발목을 잡는 장애 요인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북돋우는 원동력이 될 수만 있다면 휴일 하루를 반납한 채 기꺼이 이 한 권의 책을 읽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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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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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캐럴라인 냅의 작품에 매료된다는 건 스스로의 내면을 드러내고픈 욕구, 이를테면 자신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겠다는 선언 내지는 그러고자 하는 갈망이나 욕구의 또 다른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욕구의 밑바탕에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어깨를 움츠리고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불안, 혹은 현대인의 위축된 자아가 맞닿아 있다. 자신을 숨김으로써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과 편리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우리는 타인이 그려준 나의 모습이 마치 나의 실체인 양 착각하며 평생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알고 있는 공개된 버전의 캐럴라인과 사적이고 개인적인 캐럴라인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용감하고 웃기고 심리적으로 예리하고 표현력이 좋으며 다른 사람들이라면 두려워하며 달아났을 법한 감정적 솔직함의 길로 기꺼이 들어서는 사람."  (p.10 작가 게일 콜드웰의 '서문')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은 저자가 거식증으로 고통받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식욕, 성욕, 애착, 인정욕, 만족감 등 여성의 다양한 욕구와 사회 문화적 압박에 대해 솔직하고도 유려한 필체로 써내려간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을 진단받았던 작가는 암 진단을 받기 2개월 전에 이 책을 탈고하였고, 그녀가 죽은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물론 작가의 유작 에세이집 <명랑한 은둔자>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녀의 암울했던 삶에 비해 작품에서 풍기는 긍정적 마인드가 마치 보색 대비처럼 비현실적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긍정적인 사고와 솔직함이 빚어내는 밝고 통통 튀는 분위기로 인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쉽게 벗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한아름 선물 받는 듯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음식, 섹스, 쇼핑. 당신의 독이 무엇인지 불러보라. 욕구, 특히 여자들이 경험하는 욕구는 으스스할 정도로 변신에 능하고 외적인 것들에 요령 좋게 찰싹 달라붙는다. 한 전투가 다음 전투로 이어지고, 어떤 약속이 거짓임이 드러나면 또 다른 약속이 빛을 발하며 지평선 위로 솟아올라 별처럼 신호를 보낸다."  (p.31 '서문' 중에서)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케이크 더하기, 자존감 빼기', 2장 '어머니와의 관계', 3장 '내 배가 싫어, 내 허벅지가 싫어', 4장 '브라 태우기에서 폭풍 쇼핑으로', 5장 '목소리가 된 몸', 6장 '희망을 향해 헤엄치기'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성의 불안과 욕망,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육체 혐오, 페미니즘과 소비문화, 공허함과 갈망 저변에 깔린 슬픔 등을 분석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한 방식은 결국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 중요함이라고 표시된 선반에 들어 있는 것은 물론 연결이고 사랑이다. 인간 허기의 가장 깊은 근원에 이름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너무나 많은 여자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억제의 상자들을 조각조각 박살 낼 수 있는 도구는, 공허함을 산산조각 내고 그 밑에 묻혀 있는 희망을 드러낼 수 있는 커다란 망치는 바로 그것일 것이다."  (p.357)

 

작가는 여성의 몸이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이는 사회 환경에 따라 여성이 자신에 대한 시각, 자기 몸과 맺는 관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몸에 대해 간과함으로써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과 관련된 여러 욕구에 의해 통제되고 억압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고, 페미니즘 운동이 밀물과 썰물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될 때 여성은 육체적으로 조금 자유로워지거나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 저변에 깔린 욕구의 원인과 형태를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통제와 억압 속에서 평생을 허비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사례나 분석 혹은 묘사가 이 책의 장점일 수는 있으나, 무엇보다도 책이 주는 재미와 적절한 유머, 솔직함에서 오는 시원시원한 느낌이 독자인 내가 책에서 손을 놓지 못했던 이유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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