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베란다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내려다보면 아이들 놀이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휴일 한낮의 느긋함을 확인하기 위해 놀이터의 풍경을 몰래 훔쳐보곤 한다. 쇠양배양 돌아치는 아이들의 잰 몸놀림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시간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꾸물꾸물 늦장을 부리는 시간 속을 쉼 없이 움직이는 아이들. 극과 극의 대비가 휴일 한낮의 놀이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군에 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응시하는 부모의 시선이 되었다가 이따금 거침없이 뛰노는 아이의 시선이 되기도 하면서 단지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느긋한 여유를 즐긴다. 휴일의 시간은 그렇게 나릿나릿 흘러간다.


12월의 첫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비장한 표정이다. 하필이면 첫날이 월요일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어제보다 기온이 떨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는 비상계엄 1주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켜보고 있을 때의 시간은 정말 느리게 흐르지만 대충 뭉뚱그려 따져보는 시간은 너무너무 빨리 흐른다. 벌써 1년이라니... 뜬금없는 비상계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 그리고 암담하게 흘러가던 시간들. 내란에 대한 죄과가 낱낱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처벌이 시작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처참하고 암담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하고 있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산문집 <호호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나는 별자리 운세에 꽤 진지하다. 꿈은 너무 멀고 사랑은 계속 아픈데, 나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어 끝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에 별자리를 만났다. 친한 선배의 소개로 점성술사 수전 밀러의 별점을 다달이 번역해 올려주는 개인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전에 경험한 적 없던 큰 위로를 받았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크고 따뜻한 무언가가 나와 내 인생을 깊이 이해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절대 겁을 주거나 경고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다정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격려할 뿐이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너와 비슷한 주기로 넘어지고 일어나는 다른 친구들도 많이 있다고, 그들과 함께 가는 거니까 너무 외로워 말고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것도 같았다."  (p.165)


우리는 비록 별자리는 서로 다르지만 '비상계엄'이라는 엄청나게 높은 산을 함께 넘은 동지이자 동시대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시민으로서 '비상계엄 1주기'에 맞춰 힘내라는 응원의 말이라도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추워진 날씨에 우리는 갑자기 서로의 건강이 문득 걱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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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 -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임수정 지음 / 밥북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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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변한다. 살아보니 그렇다. 우리는 마치 두께가 다른 얼음판 위에 서서 어디가 얇은지 또는 어디가 두꺼운지 도통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얼음판의 둘레를 마구 헤집고 다니는 꼴이다. 겁도 없이 말이다. 단 한 번도 나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얇은 얼음 위를 딛지 않는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물론 얇은 얼음을 디뎠지만 물에 휩쓸리기 직전에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삶을 유지하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다들 한 귀퉁이에 모여 오들오들 떨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두려움을 떨치고 과감히 일어나 자신이 밟을 곳이 살얼음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한 발을 내딛는 이도 있고, 그것을 똑똑히 지켜본 이들 역시 자신의 두려움을 툭툭 털고 일어서 다른 이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현실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편안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삶의 용기는 그렇게 하품처럼 전염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 두려울 때마다 그들의 지난 삶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들의 용기를 가슴에 깊이 새기기도 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오순의 외동딸 송영숙에 주목했다. 이오순이 서울로 장사하러 떠날 때 열 살이었던 송영숙은 엄마 없는 집에서 가사를 전담했다. 1965년 가족들이 서울로 이주할 때 함께 상경했으며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막냇동생 송광영이 분신하자 엄마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내가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일흔여섯의 송영숙은 치매를 앓고 있었다. 대부분의 질문에 '다 좋았다'고 답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느냐고 묻자 '막둥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제'라고 답했다."  (p.6 '책머리에; 중에서)


나는 평전을 좋아한다. 개인의 일생에 대한 필자의 논평이 곁들여진 평전은 전기문에 비해 객관적이고 학술적이라는 게 다수의 견해다. 물론 미화와 왜곡으로 점철된 평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수정 작가가 쓴 <민주화 운동가 이오순 평전, 돗자리 장수에서 광장으로>를 읽게 된 것도 지금까지 내가 유지해 온 독서 편력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발의했던 학원안정법에 반대하여 스스로 분신의 길을 택했던 이오순 여사의 아들 송광영 열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책을 읽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했다. 사실 8,90년대의 민주화 과정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있어 '송광영'은 낯선 이름이다. 더구나 그의 모친이었던 '이오순'은 더더욱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독재에 저항하고 그들의 탄압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용기와 헌신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오순은 숨죽인 채 오열했다. 머리에 삼베수건을 쓰고 대열의 맨 앞에 서 있던 유가협 어머니들 그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뚝뚝 떨궜다. 동백꽃이 툭, 질 때처럼. 심장이 벌떡이는데도 소리 내 울 수는 없었다. 울음소리를 내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오순은 그때 알았다. 침묵만큼 처절하고 슬픈 오열은 없다는 것을. 광영의 죽음, 열사들의 자기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순수한 피흘림이라는 것을. 수천의 군중 앞에서 열사로 호명되는 순간 광영의 죽음은 그 의미가 분명해졌다는 것을. 막내아들 광영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투사라는 것을 가슴에 또렷하게 새겼다."  (p.213)


일제강점기였던 1927년에 태어난 이오순은 그녀의 나이 38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다섯 명의 어린 자식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다가 1994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산이나 연고도 없이 자식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살이를 시작했던 1959년부터 그녀의 삶은 오롯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 셈이었다. 더구나 1985년에 막내아들을 잃고 1986년부터 시작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 창립회원으로서의 활동은 평범한 아낙이었던 이오순을 광장의 투사로 변모시켰다. 산업화시기에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그들의 허기진 일상을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지지 않았던 위정자와 기업인들로 인해 거리는 온통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갔고, 공장 노동자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었다. 나는 이오순 평전을 읽는 내내 송광영 열사의 짧았던 생애를 떠올렸고, 언젠가 읽었던 권여선 작가의 <푸르른 틈새>가 나도 모르게 오버랩되었다.


"이오순은 자식뿐만 아니라, 이웃, 일가친척, 유가협 동지들을 돌보며 함께 살아갔다. 그녀는 언제나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헌신을 했을까? 수많은 자료를 훑어보아도 '무엇을 좋아했다', '무엇을 즐겼다'는 기록은 없었다. 늘 돈을 벌러 다녔고 시위에 참여했고 유가협 회원들과 한울삶에서 지냈다."  (p.289 '에필로그' 중에서)


숨이 컥컥 막혀 곧 죽을 것 같던 현실도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듯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기억 속의 시간은 언제나 중력을 잃고 부유한다. 그러나 가벼이 떠다니던 기억들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졌을 때,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그 시절의 삶을 가슴으로 살아내게 된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억척같이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오순이라는 여인과 그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던 송광영이라는 이의 뜨거운 피가 책을 통하여 수혈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하로 떨어졌던 오늘 아침의 기온 속에서 조금의 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산을 오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런 까닭이었을 테다. 삶의 열정은 역사의 물관을 타고 그렇게 끝없이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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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긴 슬픔이 가슴을 헤집어놓고 사라질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익숙한 까닭에 슬픔이 찾아올 때면 오히려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슬픔이 지나간 뒤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만사에 의욕이 사라지곤 합니다. 한번 그렇게 떨어진 의욕이 다시 보통 사람의 그것으로 회복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열고 슬픔이 무시로 드나들 수 없도록 가슴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디 현관문을 잠그듯 필요할 때마다 그렇게 잠가 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문지기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요.


오늘 아침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습니다. 나는 탁하고 텁텁한 미세먼지의 온기에 기대어 비교적 수월한 산행을 했습니다. 어제 내렸던 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워낙 적은 양의 비가 내렸던 탓일 테지요. 다만 어제 불던 바람은 잦아들어 어둠에 싸인 숲은 그저 고요했습니다. 나는 사실 요 며칠 뉴스를 뒤덮었던 내란 재판 변호사들의 난동과 대한민국의 종교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들 역시 종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돈에 대한 탐욕을 교묘한 언어로 숨겨왔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거나 자유시장경제 등의 언어를 교묘하게 섞어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그와 같은 언어 뒤에 숨겨왔습니다. 사리사욕을 위해 전두환과 같은 살인자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목사도 있고, 피고인 김건희와 함께 사찰을 방문하여 절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종교는 뒷전이고 오직 자신의 권력과 돈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개신교의 발전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의 종교를 단순히 돈과 권력을 획득하는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데 화가 날 뿐입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왜 갑자기?'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윤석열 정권을 지나오면서 그들의 행태는 선량한 국민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난동을 부렸던 변호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선진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관이 같은 놈을 데리고 있으니까 우리가 선진국이 못 되는 거죠. 저 같잖은 놈이, 안경 쓴 키 작은 남자라고 써 놓고서 자기 얘기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입니까?"라는 말 속에는 자신을 감치한 판사를 조롱하는 것과 더불어 그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힌 일제에 대한 찬양과 동경의, 얼룩진 역사 인식이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폴란드를 침공했던 독일 나치에 대해 오직 자신의 돈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대중이 용납할 수 없는 언어로 나치를 찬양하는 폴란드 유태인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반역자인 동시에 인류 보편적 인권에 반하는 언어를 내뱉은 자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국가인권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종교를 방패막이 삼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며 증오를 부추깁니다.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그들이 앞장서서 인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태는 박근혜 정권을 넘어서면서 일부 불교 종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돈에 눈이 먼 그들이 대중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종교를 방패로 삼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가 주로 욕설과 저주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진실한 종교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혐오와 차별, 그리고 증오의 언어로 어찌 신의 사랑이나 자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사이비 종교인일 뿐입니다. 나는 비록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지만 그들처럼 인간에 대한 증오의 말을 쏟아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실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서로 종교가 다를지라도 인류애라는 보편적 가치는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조국과 민족을 배신할 수 있고, 같은 민족을 향해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그런 비열한 인간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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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개신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같은 이가 나와서 뭔가 싹다 정리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꼼쥐 2025-11-28 13:53   좋아요 0 | URL
지금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기인 게 아닌가 싶어요. 소위 목회자라는 놈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으니...쯧쯧.
 
변신 - 카프카 단편선 소담 클래식 7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인섭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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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체험하지 못한 글은 독자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대개는 그렇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이 쓰고 있는 글이 과거에 직접적으로 겪은 체험이든 아니면 자신이 글을 쓰는 가상의 공간에서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만들어진 체험이든, 아무튼 작가는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한 생생한 느낌이 존재해야 한다. 사랑의 기쁨이든 실연의 고통이든 그것은 작가의 직접적인 느낌이어야 하며, 그러한 느낌이 고스란히 글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머릿속에서의 단순한 논리나 가정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작품 속의 인물로 완전히 탈바꿈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글을 쓰는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 낸 인물들과 얼마나 가깝게 느끼고 그 인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얼마나 근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가 결국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1인 다역의 연기자가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 역시 <소년이 온다>를 쓸 당시에 작가가 느꼈을 고통이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견딜 수 없는 심적 고통으로 인해 집필에서 손을 뗀 채 몇 날 며칠을 서성였을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작가의 미세한 심적 변화마저, 슬픔으로 인한 가벼운 떨림조차 행간의 침묵 속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최고 권위의 노벨문학상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고통과 진실에 대한 세계인이 보내는 작은 답례일지도 모른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역시 내겐 그런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그가 노벨상 수상 작가는 아니지만 병약하고 감성적이었던 그가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주변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면서 겪어야 했을 온갖 수모와 좌절, 그리고 정신적 불안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쓰는 등 틈틈이 저작 활동을 이어가던 그가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는 <변신>은 숨 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할 수만 있다면 벌레로 변해서라도 가족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그가 얼마나 학수고대했을지 소설을 읽는 독자는 가슴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는 감동과 사랑으로 가족들과의 추억을 더듬었다. 그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은 누이동생보다 그레고르 자신에게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그레고르는 이런 상태로 허전하고 평화롭게 상념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계탑이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창밖이 찬찬히 밝아 오기 시작하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고서 그의 머리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새어 나왔다."  (p.192 '변신' 중에서)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변신: 카프카 단편선>에는 중편소설인 '변신' 외에도 1910년대 초반에 집필한 단편소설 '화부'와 '선고'가 함께 실려 있다. '화부'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카를 로스만이라는 소년은 가정부가 그를 유혹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강제적으로 미국에 보내지는데 소설은 카를이 막 미국에 도착하여 하선을 하려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익숙했던 공간에서 벗어난 어린 주인공이 낯설고 적대적인 공간에서 새롭게 정착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한 심정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이 소설은 미완성 장편 <아메리카>의 서문 격인 작품이기도 하다.


"카를은 맞을까 무서워서 마구 휘두르는 화부의 두 손을 잡고 싶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러고서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나직한 목소리로 흥분을 가라앉혀 줄 말 몇 마디라도 그에게 속삭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화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었다. 카를은 급한 경우 화부가 완전한 절망에서 솟구쳐 나오는 힘으로 이 방의 일곱 남자 모두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심지어 일종의 위안을 얻는 듯 느끼기 시작했다."  (p.40 '화부' 중에서)


카프카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탄생'이라 평할 만큼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작품인 '선고'는 사업적으로 성공하고 곧 약혼을 하게 되는 주인공 게오르크가 러시아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약혼 소식을 전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민을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털어놓자 아버지는 게오르크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다층적 심리, 아버지의 권위와 복종, 죄책감 등 일상에서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심리를 간결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다소 엉뚱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인식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너도 알겠지. 너 말고도 무엇이 있는지. 이제까지 너는 오로지 너 자신만을 알았지! 너는 본래 순수한 아이였어. 그렇지만 더 본래의 네 모습은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런 이유에서 이제 알리노니, 너에게 물에 빠져서 죽을 것을 선고하노라!"  (p.94 '선고' 중에서)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 속에서 작가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진실은 작가 스스로가 체험했던 온갖 느낌을 독자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서 온다. 결국 그것은 작가의 상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작품을 쓰는 동안 그가 체험했던 생생한 기록에서 근거한다. 독자는 작가의 체험을 읽으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늦가을의 날씨 치고는 꽤나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물기가 쪽 빠진 단풍잎이 제 무게를 잃은 듯 하늘 저편으로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다. 하루 종일 흐린 하늘엔 이따금 아이들 웃음이 퍼지곤 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카프카의 단편을 읽고 짧았던 그의 삶을 생각한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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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서는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앳된 모습의 남자 한 명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옆동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한 손에는 꽃다발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든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누군가의 생일이나 아니면 어떤 특별한 일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에 참석하는 차림이었다. 검은색 면바지에 검은색 패딩을 입고, 머리도 한껏 멋을 부려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엔 여드름이 군데군데 솟은 것으로 보아 아직은 성인이 되지 않은 듯한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뛰어가는 남자를 향해 마주 보고 달려오는 비슷한 또래의 여자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반가운 포옹을 나눈 후 어렵게 떨어져 나란히 손을 잡은 후 아파트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멋을 내고, 선물을 준비하고, 혹시 잊은 게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에 확인을 거친 후 집을 나서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누군가를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되풀이하여 낮에 만났던 그 사람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똘망똘망 정신이 맑아지는 듯 느껴졌던 경험. 사람은 그런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가슴 설레고,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한없이 즐거울 수 있다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열정과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굳이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청승맞게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사람은 행복하기만 하면 어떤 규율도 견뎌 낼 수 있다. 글쓰기 습관을 깨뜨린 것은 바로 불행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투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짜증을 부리며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깨달았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랑이 시작과 끝이 있는 정사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랑이 끝난 마지막 순간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p.60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는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부터 늙음을 경험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을 만나는 일이, 출가한 자식을 만나는 일이, 꽃 한 다발을 들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일이 늘 가슴 설레고 기다려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청춘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흘러간 경험으로부터 너무나 빨리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건 젊었던 시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때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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