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김신회 지음 / 놀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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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거나 진한 감동이 몰려 오는 건 아닌데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나갈 때마다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자박자박 짠한 슬픔이 차오르는 책이 있다. 대개 그런 감정이 드는 까닭은 나의 마음을 가만가만 주무르는 작가의 문체 때문인 듯도 하고, 몇 마디 위로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서 요전에 있었던 몇몇 일들을 떠올리며 감정 과잉의 상태에 돌입하기 때문인 듯도 하다. 이럴 때 나는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던 열일곱 감수성이 되살아 난 듯해서 괜히 무안하고 쑥스러워진다.

 

김신회 작가의 최신작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도 그런 책이다. 올해로 방송 작가 경력 18년차라는 작가의 이력이 말해주듯 작가는 자신이 즐겨 보던 만화『보노보노』를 소재로 자신이 생각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인생에서 마주치는 꿈과 명예, 우정, 사랑, 가족, 소심함 등 그녀가 생각했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간다.

 

"보노보노, 살아 있는 한 곤란하게 돼 있어. 살아 있는 한 무조건 곤란해.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윈 결코 없어. 그리고 곤란한 일은 결국 끝나게 돼 있어. 어때? 이제 좀 안심하고 곤란해할 수 있겠지?" (p.15)

 

작가의 이야기는 줄곧『보노보노』의 한 장면에서 힌트를 얻고 그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다시피 『보노보노』는 1986년에 출간되어 1988년 고단샤 문화상 수상 후 30년 넘게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네 컷 만화이다. 2017년 현재 41권까지 출간되는 동안 전 세계를 통틀어 1천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95년 서울문화사에 의해 정식으로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벌써 20여 년이나 지났다.『보노보노』 가 일본에서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가는 동안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어린이들도 이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자고로 어른을 위한 취미란 잔잔한 일상에 돌멩이를 던지는 작은 반란이기를. 시간을 쪼개서 취하고, 시간을 쪼개서 넘어지고, 시간을 쪼개서 덕질을 하면서 살 수 있기를. 창피함이 주는 즐거움은 의외로 크지 않은가. 그렇게 시간을 쪼개서 놀다보면 어른에게도 취미라는 게 생길 것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까지 하고 싶은 것, 그게 취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더 많은 어른들이 취미를 핑계로 '놀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부리 아빠의 말을 가슴에 품고. 어른이란 말야. 어딘가 아이 같은 데가 있는 법이야." (p.279)

 

사회에 진출한 어른들도 정신없이 빠져드는 만화, 이를테면 <미생>이나 <보노보노>와 같은 것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된다. 누구나 한번쯤은 껶게 되는 어른의 삶에서 나에게는 없고 작가를 비롯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그런 경험이 뭐 그리 많겠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즐겨 읽는 만화에는 누구나 겪었음직한 보편적인 이야기들이 꾸미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던가. 우리는 손 안에 쥐어진 자신의 행복은 무시한 채 헛된 욕심만 꿈꾸느라 아까운 세월만 흘려보내는 건 아닐까.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걸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문득 어른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작은 새를 돌려보내기로 마음 먹는 제제처럼 어느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된 자신을 발견하지만 그것은 사는 데 그닥 자신이 없는 '서툰 어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사는 것'에서 한 발짝 멀어진 듯 느껴지고 거리에 나설 때마다 자신이 없어 어깨를 움츠리게 된다. 전 세계 천만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아기 해달 보노보노의 이야기는 남들보다 씩씩하거나 밝지 않아도 하루하루를 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더욱 공감하며 그 속에서 따뜻한 위안을 느끼는 게 아닐까.

 

"나 역시 보노보노를 읽는 밤이면 생각한다. 이런 밤은 둥그런 무언가가 이마 위에 살짝 붙어 있는 것 같다고. 그런 밤은 부드럽고 푹신하고 흐물흐물한, 마치 보노보노 같은 쿠션을 껴안고 자는 기분이 든다." (p.314)

 

'어른이라면 당연히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누군가 나도 모르게 세워놓은 당위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우리는 매번 그 기준에 부합하기는커녕 그에 반도 미치지 못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어려움 없이 척척 잘도 해나가는 듯해서, 나만 혼자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러다 문득 만화 속 주인공도 나처럼 힘들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솔직하게 말하는 걸 보면서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이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건 아닐까? 자박자박 슬픔이 차오르는 책을 이따금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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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거짓말이야 늘 있는 일이고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국민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사실 안철수 의원이 정치계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그를 지지했었다. 그것은 아마도 '청춘 콘서트'의 영향이 컸지 않나 싶다.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혜택이 적은 소외 지역의 대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자 토크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는 그의 순순한 뜻이 좋아보였다. 그는 마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처럼 보였다. 그에 대한 지지는 최근까지 이어졌었다.

 

그의 실제 모습을 알고서 크게 실망했던 건 최근의 일이다. '사드 배치는 국익에 도움이 안 되므로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2016.07)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정치에 때가 묻지 않은 신선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비쳐졌다. 누가 뭐라 하든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결기가 있어 보였다. 한미 양국 국방장관이 만나 '한미 공동실무단 운영보고서'에 사인을 했던(2016.10.20) 제48차 한미안보협의회 이후에도 그는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며 "이것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덮는 게 큰 문제"(2016.11.13)라고 했었다. 그랬던 그가 최근에 와서는 돌연 태도를 180도로 바꿨다. '지난해 10월 20일 양국이 합의문에 서명을 했으니 이제 되돌릴 수 없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이다. 그는 2017년 1월 16일자 논평에서도 "사드 배치 같은 중대 사안에 대해 오락가락 하는 것이 국민 보기에 민망하고 부끄럽지 않은지"라며 상대 당 후보를 비판했었다.

 

어제 같은 당 소속의 박지원 의원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했던 변명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없는 말을 지어서 하다 보니 그의 말은 시종일관 횡설수설 논점이 없고, 했던 말을 무한 반복하는 등 시간 끌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사람을 잘못 파악했다는 걸 절감했다. 나는 안철수 의원에 대한 지지를 접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혹시나 싶어서 '안철수 거짓말'을 검색해 보니 인터넷에는 정말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많은 정보가 넘쳐 났다. 심지어 <안철수의 거짓말>이라는 책까지 나와 있었다.(저자 김구현, 2013)

하루 평균 자살자수 37명, OECD 회원국 중 12년째 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에서 신입 정치인마저 이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 지껄인다면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없지 않겠는가. 평균 38.9분마다 1명이 자살로 사망하는 암울한 국가에서 희망을 미끼로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자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는 사실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잠시나마 눈이 멀어 그를 지지했던 나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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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7-05-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난해 10월 20일 양국이 합의문에 서명을 했으니 이제 되돌릴 수 없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이다. << 이게 왜 말도 안되는 변명인가요? 궁금합니다. 그럼 서명을 취소할 수 있다는건가요?

꼼쥐 2017-05-19 13:4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합의가 되었던 2016년 10월 이후에도 반대를 하지 말았어야 옳겠죠. 2016년 11월에도 그는 찬성을 하지 않았었는데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국민의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적극적인 사드 찬성론자처럼 바뀌었다는 게 문제죠. 정치인은 뉴욕 뒷골목의 쓰레기와 같다지만 이건 너무나 속이 보이는 행태이지 않았나 싶어요.

00 2017-07-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을 미화하기 위한 거짓말이나 잘못을 덮으려는 거짓말은 그래도 이해가 가는데..

의미없는 거짓말도 하더만요.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가족도 모르게 입영열차를 탔다는 둥 여자나오는 술집을 모른다는 둥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거짓말은 왜 하는 걸까요?

근데 책까지 있는건 쇼킹하네요..

꼼쥐 2017-07-26 16:00   좋아요 0 | URL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으면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정도가 되었을까요.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망이 있다면 자신부터 돌아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 싶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도 있지만.
 
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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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의 자질 중 밑바탕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인간에 대한 편견이나 자기 주장이 없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관대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자기 기준에 빗대어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을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한다면 그(또는 그녀)가 쓰는 소설의 인물들은 지극히 편협하거나 평면적인 소설이 되고 말 것이다. 소설가 자신이 사회 경험이 풍부하거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의 교류가 있어 왔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편협함이 희석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선천적이거나 지극한 자기 수련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소설의 리얼리티도, 처음 몇십 페이지로 신용을 얻을 수 있다면 나중의 백 페이지는 무엇을 쓰든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나서는 인간을 쓸 때 절대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남자니까, 여자니까, 젊으니까, 늙었으니까, 경찰관이니까, 학교 선생이니까, 하는 편 가르기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전부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p.140)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버라이어티>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의 구성은 참으로 다채로워서 '역시 오쿠다 히데오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버라이어티>에는 주제와 길이도 제각각인 단편소설 6편과 대담 2편, 월드컵 축구 관람기가 실려 있다. 연작 단편 '나는 사장이다'와 '매번 고맙습니다'는 15년간 다닌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광고 기획사를 차린 38세의 사장 나카이 가즈히로가 세상과 타협하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조금이라도 악의를 품으면 밑에 있는 자들은 잠시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유명한 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당연한 것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을 원망하는 업체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있을 것이다. 밟고 선 자는 밟힌 자의 고통을 모른다. 가즈히로는 자신의 부족한 상상력을 잘 알게 되었다." (p.58)

 

단편 '드라이브 인 서머'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남편 노리오가 아내 히로코에게 운전을 맡긴 채 가는 혼잡한 귀성길에서 겪는 한바탕의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어찌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한참 읽다 보면 작가가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위트와 유머를 섞어 조금 과장되게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내 히로코는 그들의 7인승 벤츠에 다양한 사람들을 태운다. 히로코에게 추파를 던지며 성희롱 발언을 서슴지 않는 청년, 자신만 빼고 해외 여행을 떠난 것에 격분하여 며느리 욕을 쏟아내는 할머니, 에어컨도 없는 낡은 차에서 옮겨 탄 장난꾸러기 아이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식칼을 들고 뛰어든 사내 등.

 

"탤런트 위주의 드라마나 플롯이 탄탄한 소설도 좋지만 저는 인간의 애매함, 해학 같은 디테일을 섬세하게,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리는 소설을 더 쓰려고 합니다." (p.265)

 

남편의 폭력과 자신이 진 과도한 빚으로 인해 어린 아들과 함께 도망쳐 나와 아타미 역 근처의 식당에서 위장 취업을 한 에이코. 말벗도 없이 늘 질책만 당하는 교코. 어느 날 식당에 찾아온 두 명의 형사에 의해 옴 진리교의 특별수배범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교코가 체포되고... 에이코 또한 노심초사한다는 내용의 '더부살이 가능'과 남자 친구와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밖에서 보내겠다고 하는 고등학생 딸을 둔 엄마의 내적 갈등을 그린 '세븐틴', 그리고 보조바퀴를 떼어 낸 두 발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고 싶어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 마사오의 이야기를 그린 '여름의 앨범' 등 이 책에는 작가가 쓴 다양한 주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특히 '여름의 앨범'은 '작가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 한다.

 

작가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는 두 인물인 배우 '잇세 가타'와 각본가 '야마다 다이치'와의 대담도 흥미롭다.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 창작의 근원은 집단 속에서 느끼는 '위화감' 또는 '소외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일은 '동료를 찾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자신을 찾는 게 아니라 '동료를 찾는 것'입니다(웃음). 웃음도, 분노도, 수치심도 천양지차입니다만 어딘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고, 글을 써서 발표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에서 특히 이 부분은 알아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주는 듯한 반응의 편지를 받으면 정말 기뻐요. 아아, 쓰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죠." (p.261)

 

소설을 쓰는 원동력이 '위화감'이나 '소외감'이라는 말에 백번 천번 공감이 간다. 소설가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관찰자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고독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각각의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발적 고독이야말로 소설가를 소설가답게 하는 그들의 정체성인 셈이다. 자신의 기준에서 볼 때 속이 터지는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충고를 통하여 자신의 방식으로 변화를 유도하거나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또는 그녀)는 결코 소설가가 될 수 없다. 편견 없이 관찰한다는 것, 제삼자의 입장을 견지한 채 그저 바라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처럼 성마른 놈이 소설가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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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도로에는 유난히 차가 많았다. 꽃구경을 나온 행락 차량이 대부분일 터였다. 사실 미세먼지만 아니라면 봄꽃이 만개한 요즘과 같은 좋은 시기에 아까운 휴일을 집에서만 보낸다는 게 어쩐지 아까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교통체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너도 나도 집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차량과 사람들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표정만큼은 다들 이해한다는 듯 여유로웠다.

 

대통령 선거일이 정말 코밑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에는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만나 회담을 갖기도 했었다. 정치와 경제 등 우리의 주변 상황은 급변하고 있는데 정부는 대통령 선거에만 코를 박고 있는지 나 몰라라 뒷짐만 지고 있는 듯하다. 자리를 비웠던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가 85일 만에 서울로 복귀하였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슬그머니 말이다. 그러고는 대뜸 대통령 권한대행과 통일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었다. 물밑 교섭도 없이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가 대외적으로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슬픈 자화상이었다. 그럼에도 김규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버선발로 나가 일본대사를 맞이했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오늘 아침 고인이 된 탤런트 김영애의 소식이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하고 있지만 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나온 작품 모니터도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고인의 겸손함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목련 꽃잎의 슬픈 추락처럼. 탁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꼬마전구를 밝힌 듯 환하게 피어난 벚꽃의 장한 모습을 나는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벌과 나비는 없고 사람들만 북적이는 무거운 오후, 어느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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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4-10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꼬마전구를 밝힌 듯 환하게 피어난 벚꽃의 장한 모습을 나는 먼 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벌과 나비는 없고 사람들만 북적이는 무거운 오후, 어느 한낮.

저 풍경을 마음 속에 그려봅니다.
시간은 멎은 듯 흘러가고
붕붕거리는 벌들, 사쁜사쁜 날개짓하는 나비들이
환청처럼 보이는 듯도 합니다.
붐빔과 북적임 속에 어떤 적막감이 감돌고
나들이객들 웃음처럼 흐드러진 벚꽃들을
깊은 사색에 빠진 채 응시하고 있는 어떤 한 분이 보이는 듯도 합니다.
작년 이맘때는 그래도 천변 벚꽃길에서
스마트폰 가지고 가서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요.
올해는 벚꽃 구경 하나 못하고 있습니다.
늘 언제나 좋은 글 바랍니다~

꼼쥐 2017-04-11 16:56   좋아요 0 | URL
일 년 중 무척이나 짧은 벚꽃 개화기에 어떤 의무감으로 외출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다 보니 이맘때면 으레 벚꽃 사진을 올림으로써 ‘나는 벚꽃 구경을 다녀왔노라‘ 인증하는 셈이니 그런 추세에 동참하기도 하지 않기도 참 애매한 시대가 된 것이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소설은 한 권의 철학서처럼 읽어내야 한다는 걸 말이야. 때로는 그렇더군. 스토리의 전개와 논리의 개연성에 집중하면서 읽는 흔한 소설 독법으로는 뭔가 덜그덕거리는 이질감이 느껴져서 지금 읽고 있는 소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지레 들곤 하지.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래. 소설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읽어갈 때마다 나는 마치 어떤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진행되는 절차에 집중하는 것처럼, 편견이 깃들지 않는 맑은 의식을 유지한 채 하나의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천천히 깨우쳐가는 재미에 빠져들게 돼. 우리가 소설에서 취하는 흔한 감동이나 교훈과는 거리가 있지. 그럴 때 스토리의 전개는그닥 중요하지 않거나 번외의 경기처럼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야.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 뒤에 숨어 있는 의도로 죄를 짓는 것일세. 내가 연구한 법질서, 종교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거대한 옛 법질서는 그것을 알고 있고 또 알려주네. 배신, 비열한 행동, 심지어는 최악의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가 없을 수 있어. 행위는 진실이 아닐세. 그것은 언제나 결과에 지나지 않아." (p.145~p.146)

 

헝가리 출신의 대문호 산도르 마라이가 쓴 <열정>도 그와 같은 소설 중 한 권이지. 소설의 구조는 사실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로 단순해.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쌍둥이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 그들이 주고 받은 대화를 쓴 게 소설의 전부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나는 차라리 한 인물에 내재된 상반된 성격의 페르소나로 해석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

 

"인간의 마음속에는 개인적인 흥분이나 이기심 저편에 우정의 법칙이 살고 있네. 그것은 절망적으로 갈구하면서 서로의 품안으로 뛰어드는 남녀의 정열보다 강하며, 실망이라는 것을 모르네. 상대방에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지."    (p.181)

 

귀족 출신의 헨릭과 하급 관리 집안의 아들인 콘라드. 그들은 사관학교에서 열 살때 만나 서로 친구가 되었고 성인이 된 후 같은 부대에서 병영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헨릭 집안의 성에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가깝게 지냈어. 그러나 기질은 서로 크게 달랐지. 유쾌하고 관대하며 사교성 많은 헨릭과는 달리 예술적 기질이 강한 콘라드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어. 소설에서 헨릭도 말하고 있지만 콘라드는 군인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던 셈이야.

 

"그러나 자네 영혼의 밑바탕에는 갈등,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었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한 시련은 없네. 현재의 자기와는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 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p.172)

 

콘라드가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리라고 헨릭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듯해. 그러나 콘라드는 그렇게 떠났고 남겨진 헨릭은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끝없이 생각하지. 떠나기 전 날, 사냥터에서 자신을 겨눴던 콘라드의 총구, 불륜을 의심하게 했던 헨릭의 부인 크리스티나의 수상한 행동들. 콘라드가 열대 지역으로 떠나고 8년 후 크리스티나는 병으로 죽고, 홀로 남은 헨릭은 고독 속에서 끝없이 생각하지. 삶의 진실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고독이라는 것도 참 묘하네. 그것도 정글처럼 이따금 위험과 놀람에 가득 차 있어. 나는 온갖 고독을 알고 있네. 삶의 질서를 아무리 엄격하게 좇아도 헤어날 길 없는 권태. 그 뒤를 잇는 갑작스러운 폭발. 고독도 정글처럼 불가사의하다네."    (p.133)

 

"세월이 흐르고, 내 주변의 삶이 황혼에 접어들었지. 책과 회상들이 쌓이면서 농축되었네. 책마다 한 알의 진실이 들어 있었고, 그것에 대해 회상은 인간 관계의 진실한 본성은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고, 또 그런 것을 인식하더라도 더 현명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어. 그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조건 없는 성실과 신의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것일세. 여러 가지 사건들로 보아 이 친구가 신의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도 마찬가지이지."    (p.144)

 

75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난 헨릭과 콘라드. 소설은 사냥꾼으로부터 콘라드의 방문을 알리는 편지를 전해 받는 노장군 헨릭으로부터 시작하지. 죽음이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기 전에 진실을 알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헨릭은 흥분된 듯 묘사돼. 커다란 성채에서 홀로 남았던 헨릭은 오랜 세월 동안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보냈으니 그의 흥분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네. 자신의 행위가 치명적이라는 것을 처음 순간부터 알면서도 그만 두려 하지 않아. 인간과 운명, 이 둘은 서로 붙잡고 서로 불러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네. 운명이 슬쩍 우리 삶으로 끼어든다는 말은 맞지 않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열어놓은 문으로 운명이 들어오고, 또 우리가 운명에게 더 가까이 오라고 청하는 걸세. 근본 심성이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을 행동이나 말로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현명하거나 강한 사람은 없네."    (p.219~p.220)

 

인용이 너무 많았지? 하지만 산도르 마라이의 작품에 열광하는 나로서는 소설 한 권을 다 옮겨 적는다 해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지도 몰라. 1948년 공산주의 체제의 조국 헝가리를 떠나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을 전전하던 작가는 41년이라는 긴 망명행활을 뒤로한 채 1989년 2월 89세의 나이로 망명지 캘리포니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 "지나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일지에 썼다고도 전해져. 주인공 헨릭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었어.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고. 암튼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하고픈 말이 많아. 서둘러 마치지 않으면 어쩌면 밤을 샐지도 몰라. 밖에는 유난히 달이 밝아. 전날 내린 봄비로 대기가 맑아져서 그렇겠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뜻깊은 밤이 되길 바래. 잘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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