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평점 :
아득한 기억을 소환하려는 듯 미세먼지의 농도가 짙다. 밭은 기침. 우울한 하늘. 화석연료를 불태워 식어가는 체온을 덥혀야만 하는 시기가 다시 또 도래한 것이다. 반복되는 미세먼지의 공습. 달아날 곳이 없다는 사실이 탁한 하늘만큼이나 나를 또 우울하게 한다. 달아날 공간이 없는 막다른 골목의 사람들은 어쩌면 과거의 어느 시간대로 자신의 기억을 되돌리려 하지 않을까? 현실을 잊기 위해, 푸르렀던 과거의 어느 가을날을 소환하기 위해. 김탁환의 에세이 <읽어가겠다>를 읽으며 나도 또한 과거를 향해 달아나본다.
"누군가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네 번이나 만났다면 특별한 인연이라 여기고 연인이 되거나 벗이 될 겁니다. 저는 스물세 편의 소설과 지금까지 네 번 만났군요. 어떤 책과 사람은 스치듯 잊히지만, 어떤 책과 사람은 마음에 머물며 또 한 번의 재회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p.7~p.8)
소설가 김탁환은 그의 기억 속에서 길어올린 스물세 편의 소설을 <읽어가겠다>에 담았다. SBS 라디오 프로그램 '책하고 놀자'에서 그가 소개했던 150여 권의 책 중에서 가려 뽑은 소설들을 이 책에 실었다고 했다. 대개는 각기 다른 작가의 소설을 한 편씩 소개하고 있지만 같은 작가의 작품이 두 권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남방우편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녹턴', 존 버거의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과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 그렇다.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part 1.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내가 하는 것들'에 12권의 책이, part 2. '자부심도 나의 것, 경멸도 나의 것'에 11권의 책이 소개되었다. 1부의 시작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크 눌 프, 소리내어 한 자씩 끊어 읽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 남자가 어렸을 때부터 무척 맘에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 때면 집는 여러 권의 책들 중에 꼭 '크눌프'가 들어 있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은 작가가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슬픈 책으로 꼽는다. '너무나도 힘든 상황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란다. 어린 시절 '플랜더스의 개'라는 텔레비젼용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지독한 슬픔을 배웠다는 작가는 52부작의 만화가 방영되는 매주 아침마다 삼십 분을 울고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또 삼십 분을 울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죽음을 직시하라고 알려주는 동화가 무척 드물지요.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만 보여주는 동화가 대부분입니다. 죽음을 다루더라도 아주 아름답게 살짝 겉만 건드리고 넘어가지요. 소멸에 관한 책, 불행에 관한 책, 죽음에 관한 책이 동화에도 핵심으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p.37)
작가가 소개하는 대개의 책들은 제목이 낯설지 않다. '어린 왕자', '모모', '모두 다 예쁜 말들', '한 여자', 남아 있는 나날', '디어 라이프', '이것이 인간인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달과 6펜스', '폭풍의 언덕' 등 누구에게는 인생의 책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책들 일색이다. 그러나 각각의 책에 대한 작가의 소감은 일반 독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직업이 소설가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라기보다는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책과 더 가까워진 까닭이 아닐까 싶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디어 라이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뻑뻑한 단편들을 한꺼번에 읽으면 안 됩니다. 한 편 읽고 하루 쉬었다가 또 한 편 읽고, 단편이 열 편, 자전적 이야기가 네 편 정도 실려 있으니까, 한 달 정도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어요. 각 편마다 생각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빨리 읽으면 중요한 지점들을 놓친다는 생각이 듭니다." (p.132)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는 독자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면서 또 다른 독자나 작가로 성장하듯이 김탁환의 '읽어가겠다' 역시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독서력을 자극하여 작가가 소개하는 소설 모두를 읽고 싶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존 버거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만큼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는 기억들로 가득 차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이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겠다.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가가 좋아하는 책에 대한 소개의 글이라기보다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이자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즐겨 읽었던 책을 통하여, 자신이 즐겨 들었던 음악을 통하여 내가 있는 지금 이곳으로부터 달아나기도 한다. 그 오래된 기억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슬픈 현실을 벗어나도록 하게도 한다. 자신이 읽었던 책을 누군가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구애의 몸짓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