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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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리듬의 반복이 음악이 되고 사람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듯이 단조로운 권태가 반복되면 오히려 삶의 자극이 되고, 깨달음이 되고, 때로는 삶의 철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쓴 알베르 까뮈나 <고도를 기다라며>를 쓴 사뮈엘 베게트가 이를 입증했다. 며칠 전 나는 이와 유사한 소설 한 권을 읽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몇몇 작가에 의해 단조로운 권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보려는 시도는 있어왔지만 막상 시중에 내놓은 그들의 작품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인간의 삶이 단순한 기다림'일 뿐이라는 깊은 철학적 자각이 없다면 한 권의 소설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설명하거나 돋보이게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재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그러므로 단순화된 배경과 인물 구성, 의미없는 대사와 내러티브만으로 한 권의 유익한 소설을 써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비가 멈추질 않아. 동료 a가 말했다. 멈추질 않네. 동료 b가 말했다. 새벽에 잠깐 그쳤었어. c가 말했다. 점심시간에 E의 동료들은 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p.25)

 

젊은 작가 김엄지의 소설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는 자신의 권태로운 삶을 주어지는 대로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 E의 모습을 조망한다. 그렇지만독자에게 주어지는 E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나이가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회사원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떤 업종의 회사인지, 그곳에서 맡은 업무는 무엇인지 등 어느 것 하나도 속 시원하게 밝히지 않는다. 관심 끊으라는 듯 말이다. 

 

"E는 올해 봄부터 나이가 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봄부터 망설임이 늘었다. 사소한 고민에 빠졌고,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화가 났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E는 자주 포기하고 싶었다. 울적했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p.57)

 

결혼을 하지 않은 듯 보이는 E는 그저 밥 먹고 출근하고 다시 밥 먹고 일하고 퇴근하고 자고 이따금 동료들과 어울릴 뿐이다. 주말이면 밀렸던 잠을 자거나 빨래를 하고, TV를 본다. 이런 일련의 것들로 구성된 인간의 삶이 바쁘게 오가는 청설모의 삶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게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터, 따지고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별게 아니구나, 싶다.

 

2010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는 작가는 박민규나 황정은만큼이나 독특하다. 소설에서 회사원 E는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스케일링을 하고, 치료를 요한다는 의사의 말에 우울해져서 여자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들른다. 장갑을 선물하려 했지만 여자의 휴대폰은 꺼져 있다. 새해가 되어 일출을 보기 위해 산에 오른다. 다시 출근을 하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상사를 욕하며 술을 마신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이런 일상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그러는 사이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가령 동료 a가 사라지고, 사라진 a를 대체할 다른 인물 d가 들어온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진 게 없고 여전히 상사는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여자는 끝내 연락이 되지 않고, 실종된 a로부터의 새로운 소식도 전해지지 않는다.

 

"E는 눈을 감고 걷고 싶었다. 거의 충동이었다. E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고, 전봇대와 쓰레기, 젖은 길, 빗물이 흐르는 단 하나의 방향, 비둘기, 갈색 개, 그 모든 것들이 더 명징하게 떠올랐다. 아아." (p.141)

 

화창한 일요일이다.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적당한 속도로, 적당한 거리를 산책했고, 적당한 미소를 지었으며, 적당히 행복해 보이려 노력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마치 박물관에 세워진 밀랍 인형처럼 하나의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표정이 살아있는 건 오히려 청설모와 같은 동물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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