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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ㅣ 테드북스 TED Books 1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2001년 9·11 테러 이후 우리가 가장 흔하게 들었던 말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 세계 사람들은 그 끔찍한 사건에 경악했고, 놀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지지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성공을 거둘 것이고, 테러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테러는 수그러들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고, 테러에 대한 공포도 여전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던 텔레비전 뉴스는 깜작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만수르가 미군 드론의 폭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얘기였다. 이럴수가! 내가 알던 만수르는 단 한 사람, 언젠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도 등장했던 중동의 부호이자 아랍에미리트의 왕족인 만수르(본명은 잘 모르겠다)였던 까닭에 미군이 왜 갑자기 만수르를 살해했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나의 착각에 불과했을 뿐 만수르는 내가 알던 그 만수르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무장단체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아흐타르 만수르였다. 만수르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본 바에 따르면 그는 10대 때부터 이슬람 저항 운동에 투신해 1987년 교전 중 13군데에 부상을 입었고, 1994년 출범한 탈레반의 창립 멤버로 오사마 빈라덴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2015년 6월 전임자였던 무하마드 오마르에 이어 탈레반의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그는 알자지라가 공개한 첫 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이슬람법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지하드(성전.聖戰)를 계속해야 한다."며 단합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지구상에서 테러가 사라질 가능성은 전무한 듯 보인다. 지금도 자행되는 이슬람국가 IS의 무자비한 만행과 그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난민, 그들의 만행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인 폭격, 그 와중에 희생된 사람들과 쌓여가는 분노... 언젠가 읽었던 후지와라 신야의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바위 투성이의 척박한 땅에서 만난 이란인의 모습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분노에 차 있는 듯 보였다고 그는 썼다. 분노는 결국 테러의 원동력으로 쓰일 터였다. 결국 테러를 지속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는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학습된 폭력과 피로 연결된 테러와의 연계성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해, 폭력의 종식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 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로 잘 알려진 잭 이브라힘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엘사이드 노사이르는 호전적 랍비이자 유대방위연맹 창립자인 메이르 카하네를 암살하고, 1993년에 있었던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 폭탄 테러 사건을 감옥에서 모의한 인물이었다. 잭은 테러리스트였던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그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과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테드(TED) 강연장에서 담담하게 발표하였고, 그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우리는 늘 위험한 환경에서 살았다. 근처에는 무슬림 가정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폭력에 시달렸다.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 없다는 이유로 얻어맞았다. 어머니는 길거리에서 조롱당했다. 머리쓰개와 베일을 썼다는이유로 유령이나 닌자로 불렸다. 안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우리가 노사이르 가족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두려움과 굴욕감이 다시 찾아왔고 우리는 또 이사했다." (p.73)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 잭의 어머니는 잭과 그의 누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아이가 셋 있는 무슬림 남자와 재혼했다. 말하자면 잭의 계부였던 그 남자 또한 잭과 그의 어머니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고 이곳 저곳을 떠돌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우연히 사귄 친구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유대인임을 알게 된 후 그는 비로소 자신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테러리스트의 아들 압둘라지즈에서 평화의 메신저 잭 이브라힘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다.
"어느 날 밤, 코뿔소 랠리 복장을 한 채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아메드가 뭐라고 하든 세상을 믿어보겠다고. 어머니는 사람들에 대해 한 번도 험담을 늘어놓지 않았지만 나보다 더 큰 독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날 어머니가 해준 말은 나의 남은 인생을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에 신물이 나는구나."" (p.118)
나는 '사람들을 증오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는 저자 어머니의 말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줄곧 카톨릭으로 살았던 그녀가 어느 날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무슬림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후 평생 행복이라곤 모르고 살았던 한 여인의 삶이 오죽했을까 싶었다. 내가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저자는 '아무도 나에게 공감이 무엇인지, 왜 공감이 권력이나 애국심이나 신앙보다 중요한지 알려준 적 없다'고 하면서 '내가 당한 짓을 남들에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의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또한 다음 세대에게 더 잘해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확신, 아버지가 끼친 피해의 일부를 사소하나마 힘닿는 데까지 보상하려는 욕구다." (p.126)
차곡차곡 쌓인 분노를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소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던가. 저자가 말했듯 그것은 단지 폭력과 평화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폭력을 선택하곤 한다. 게다가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킴으로써 암살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강연을 결심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용기는 아닌 듯싶다. 누적된 분노를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해소한다는 것은 어쩌면 용기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겁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저는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I am not my father.)"라는 말로 끝을 맺었던 잭의 연설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것은 어쩌면 흔들리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