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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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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중에서)

 

책읽기에 대하여 언급한 문학평론가 '김현(본명 김광남)'의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나는 김현 작가를 통하여 비로소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의 한 장르로서 이해하게 되었다.  비평이 단순한 논쟁이나 악의적으로 폄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또는 문학작품의 해설이나 소개쯤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 김현 작가의 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문학평론에 매료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적으로 김현 작가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아쉽게도 1990년 48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죽은 이후 나는 이렇다 할 평론집을 읽은 적이 없다.  책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서평집은 간혹 읽은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그저 참고 도서에 불과했을 뿐 평론집으로서의 가치를 느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 모처럼 좋은 문학평론집을 읽었다.  더불어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은 좋은 번역서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맘에 쏙 드는 책을 만났을 때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행복해진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은 으레 작가의 이름 뒤에 숨겨진 '옮긴이'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번역을 하는 사람에 따라 원서가 주는 감동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작고하신 이윤기 작가 덕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두고 있던 책들은 대개 이름도 알지 못하는 번역가에 의해 번역되기 일쑤였고, 나는 어느 정도 번역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여기에는 원서를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외국어 실력 탓에 번역본이 갖는 고질적인 병폐- 이를테면 번역 오류로 인한 이해 불가의 문장들-를 익히 알면서도 그 불만을 속으로만 삭일 뿐 육두문자를 곁들여 화를 내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작가의 얼굴>은 독일의 노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쓰고 김지선이 옮긴, 평론집으로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생소한 이름과는 달리 글은 술술 읽힌다.  평론이 갖는 딱딱함이나 현학적인 문체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의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저자는 독일인의 98퍼센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설문 결과가 보여주듯 꽤나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저자는 이 책 <작가의 얼굴>에서 스스로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를 한 점 한 점 소개하며 그들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다.  이 책에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평생 수집한 작가들의 초상화가 60점 넘게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40여 명의 작가들의 문학작품을 논하고 있다.  괴테와 하이네, 토마스 만과 브레히트 등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더불어, 생소한 이름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이 많다.  저자도 유대계 독일인이다.

 

게다가 올해 93세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깊이 있는 비평과 해박한 지식을 선보이고 있다.  평론으로서 당연히 득하여야 하는 '정직함'과 '명료함'을 바탕으로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어떤 작가, 어떤 작품에 대해서건 자신이 판단하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논쟁적인 듯도 하여 저자가 거만하고 독선적인 인간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사게도 한다.

 

"하지만 많은 낭만주의 시들이 지닌 내면성이라는 게 나는 참 마음에 들지 않고, 아니 때로는 정말이지 넌더리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진부한 서정성과 태평스러운 목가시풍, 무아경의 자연 예찬과 괴이한 비합리주의, 과장된 열광과 도취, 그 모호함과 평온함.  이 모두가 어찌나 철없고 갑갑한지."    (p.73)

 

문학의 한 장르로서 평론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작품과 독자 사이의 벌어진 간극에서 비롯되는 억측과 왜곡을 제거함으로써 둘 사이의 친밀을 도모하는 일이며, 나와 같은 일반 독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유망한 작가의 작품을 읽게 하는 것으로서 평론이 갖는 일차적인 임무를 달성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가는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여 작품을 해석하거나 어떤 유명 작가의 위세에 눌려 칭찬 일변도의 글을 쏟아내거나, 자신의 지식을 돋보이기 위하여 독자는 감히 안중에도 없이 현학적인 문체로 일관하는 등 평론가로서의 고귀한 의무를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평론으로서의 모범적인 글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하인리히 뵐'에 대해 그가 평한 글은 특히 매력적이다.

 

"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가 되었으나, 언제까지나 여전히 약자들의 형제요, 그들 중 하나였다.  혹은 이렇게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그는 '보통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군인이었던 뵐이 쾰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얼마 전 출판되어 그를 아끼는 많은 독자들과 팬들에게 당혹감과 나아가 실망감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이 편지들이 우리가 몰랐던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숙하고 때로 미련하며, 편협하고 간혹 국수주의적이며, 고지식하고, 걸핏하면 유순하게 체념하며 신에게 모든 걸 의탁해버리는 그런 청년의 모습을.  수백만 다른 독일 군인들처럼 그도 전쟁으로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 명성이 까마득히 높아진 뒤에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박해받고 고통받는 사람들, 짓밟히고 쫓겨난 인생들을 향해 있었다.  그랬다.  정말로 뵐은 늘 '보통 사람'의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랬기에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우뚝 설 수 있었으리라."    (p.300~p.301)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많지 않았다.  나는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그의 저서 <사로잡힌 영혼>을 발견하여 그 자리에서 대출을 했다.  깨알 같은 글씨로 500여 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덤처럼 읽을 생각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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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3-11-11 13:44   좋아요 0 | URL
축하드립니다^^

꼼쥐 2013-11-13 13:2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운이 좋았던 듯해요.

블루버드 2013-12-06 13:42   좋아요 0 | URL
서평을 보니 사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

꼼쥐 2013-12-06 16:40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도 있을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