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났던 사람을 보면서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일수록 ’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인식하는 것 중에 ’인맥’이라는 용어가 있다. 내 생각에 ’인맥’은 경제적 여건이나 사회적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일시적 결합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혹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그 까닭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약자의 입장에서 강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인맥’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떠벌릴 수 있겠지만,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를 알고 지내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이다. 강자에게 그것은 부끄러운 사실일 뿐이고 자랑할 만한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마치 짝사랑 하는 사람이 자신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인맥’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착각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보듯이 한병태에게 엄석대는 ’인맥’이고 친구일 수 있겠지만 엄석대에게 한병태는 결코 ’인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약자의 입장에서 인맥은 ’연대’가 더 정확하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봉사나 헌신에 가깝다. 자신의 이해타산을 목적으로 모이는 일시적 결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는 강자를 이길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연대’에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 마치 선천적으로 ’연대’를 미워하는 유전인자를 타고난 듯하다. 그들의 DNA에 깊이 각인된 것처럼.
때로는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는데 자신의 딴에는 한껏 머리를 써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질게 대우하면서 취한 영리 행위가 마치 자신이 선천적으로 부자가 될 가능성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자랑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약자의 주변 환경은 구조적으로 그런 기술을 배우고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들이 취한 행동은 강자가 보기에 너무나 어설프고 서툴러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같은 약자의 입장에서도 한두 번은 통하지만 장기적으로 묵인되는 것은 어렵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금전적으로 부족하니 영리 행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되고 자신의 환경이 개선되는 것인데, 봉사나 헌신이 마치 오직 남에게 주는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피에르 신부님이나 테레사 수녀님, 또는 법정 스님이 보시기에도 그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연대’는 결국 자신을 위한 가장 빠른 영리 행위이자 가능성의 실현이며, 삶의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시련을 극복하게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나와 타인을 위하는 상생의 원리인 것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마르크스 주의나 공산주의를 선동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배려와 사랑의 실천은 결국 나를 위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인격적 대우나 절대적 믿음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의 작은 사랑과 봉사는 얼마나 큰 감동으로 기억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리 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지낼 때가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