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예전부터 좋아해온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한 건 쉰세 번째 생일을 맞은 2년 전이었는데, 겹겹이 포개지고 복잡한 과거의 세계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암담한 혼돈을 반영하는 듯한 모습에 또 한 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 속의 한 구절이 불현듯 어느 신문 기사에 통찰력을 제공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장면에서 반쯤 잊었던 일화가 떠오르고, 낱말  하나를 단초 삼아 긴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들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1년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다시 읽는다면 개인적인 일기와 일반적인 책의 중간쯤 되는 뭔가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P.9)

이 책의 성격에 대하여 작가는 위와 같이 밝히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 일기와 작가가 선정한 12권의 책을 통한 사색.  작가의 시선을 통해 한 자 한 자  일깨워진 그 12권의 책은 나의 일상에서 마치 1년을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다.
평생을 독서광으로 살았던 작가의 해박함과 놀라운 기억력,  일반 독자의 수준과는 너무나 먼 거리감으로 그의 시선을 좇아 한 해를 순환한다는 것은 내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어른의 발걸음과 억지로 보조를 맞춰야 하는 세 살 배기 어린애의 심정으로  이 책을 읽었다. 
작가가 언급하는 작가만도 수백 명에 이르고, 한 번쯤 읽었음직한 작품도 나의 기억력은 그를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그의 독특한 발상과 같은 주제에 대한 통시적 언급은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의 6월은 아르헨티나 작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으로 시작되었다.
시간에 얽힌 실제하는 삶.  그 4차원의 일상을 작가는 영상과 같은 2차원의 평면에서 영원성을 부여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작가의 일상은 활자화된 2차원의 평면에서 시간이 정지된 채 멈추어 있다. 
7월.  H.G.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사악한 신과 잔혹한 괴물의 이중성.  운명이 인간과 짐승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8월. 인도에 사는 백인 소년이 라마승과 정신적인 유대감을 나누며 친구가 되어 서로 우정을 쌓고, 순례를 통해 점차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 <킴>.
순례자의 발걸음처럼 결국 끝이란 없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9월.  결국에는 아무것도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샤토브리앙의 작품 <무덤 저편의 회고록>
현재가 항존(恒存)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건'이라는 항존하는 유령을 필요로 하는 대중.  필사의 운명을 지워버리려는 몸부림.  죽음이 우리를 건드리더라도 우리를 파괴하는 건 아니며 단지 우리를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다.
10월.  아서 코넌 도일의 작품 <네 사람의 서명>
권태로움에 대한 치유로 균형을 모색하는 것.  균형 회복은 모든 추리소설의 주제일 것이다.
11월.  금슬 좋은 부부 사이였던 에두아르와 샤로테 사이에 에두아르의 친구인 대위와 오틸리에가 끼어들면서 그들 사이에 싹트는 애정의 반응을 묘사하는 괴테의 작품 <친화력>
우리는 운명이 우리를 위해 이미 골라놓은 가능성을 선택한다.
12월.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안락함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그레이엄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집과 조국,  고향을 추억한다.
1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상주의적 인물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적 인물 산초를 통하여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읽으며 삶이 의미있다고 우리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믿고, 인정하고, '맹세로' 다짐할 것을 요구한다.
2월.  이탈리아의 소설가 디노 부차티의 작품 <타르타르 스텝>
군대라는 폐쇄적인 공간과 명예욕에 찌든 인간상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 부차티의 작품은 오직 자신에게만 주어진 시간의 길을 걸으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하려는 주인공 도르고는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모든 작가와 화가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단 하나의 똑같은 주제만을 말한다."고 했던 부차티의 말처럼.
3월.  10세기 말 일본의 황후를 모시던 궁녀인 세이 쇼나곤의 <필로우 북>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네 일상을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의 저작. 그 기억의 편린.
4월.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 <떠오름 Surfacing>
한 여성이 퀘벡 북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야기.  폭력과 죽음의 떠오름.  역사를 지닌 것은 뭐든 제거하고 오로지 야생의 자연하고만 소통하고자 하는 주인공.
5월.  브라질 작가 마차도 데 아시스의 자전적 작품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
죽음을 통해 우리가 왜 태어나는지에 대한 해묵은 질문의 답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는 사후에 쓰는 회고록.  마차도 데 아시스가 생각하는 사후는 자아성찰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쓴 작가 안정효를 생각했다.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작가.  어쩌면 알베르토 망구엘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 속 구절들이 백과사전처럼 정렬되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곳에는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잠재된 언어의 자연스런 나열이 훨씬 자연스러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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