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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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 밟히는 흙은 적당히 부드러웠습니다. 봄비 치고는 꽤나 많은 양의 비가 내렸습니다. 새벽 산행.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의식과도 같은 나의 오래된 이 습관은 비가 그친 다음날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청량한 공기와 더욱 선명해진 풍경, 그리고 낙엽 더미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와 코를 자극하는 솔향기. 아침을 깨우는 새의 울음소리는 어제보다 더욱 또렷했습니다. 이렇듯 매일매일의 다른 풍경과 일상이 모여 세월이 되고, 궁극적으로 어느 누군가의 삶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기온이 더 올라 아카시아 꽃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올 때면 계절은 다시 여름을 향해 달려갈 테지만 지금 이대로의 모습은 누가 뭐래도 봄.


산을 내려오는데 한적한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앉은 벤치 주변으로 그들이 살아온 세월이 햇살처럼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서로 아무런 대화는 없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풍경 사이로 무수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백 대비가 선명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벤치 주변에 내려앉았습니다. 긴 꽁지깃을 까딱거리며 우아하게 평형을 잡은 까치는 가는 다리로 총총걸음을 옮기며 땅 속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쪼고 있었습니다. 까치도 어쩌면 노부부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그들 모습에 넋을 놓았던 나처럼 말입니다. 서둘러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며칠 전 읽었던 폴 오스터의 소설 <바움가트너>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때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있었고, 사라진 사람은 한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  (p.68~p.69)


소설의 주인공인 바움가트너는 평생의 반려자였던 애나를 갑작스레 잃고 방황합니다. 70대의 노교수인 그는 글을 쓰다가 문득 누이에게 전화도 할 겸, 참고할 만한 책을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글을 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를 보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장갑을 낄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는 맨손으로 냄비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만 손가락이 데고 맙니다. 냄비는 바닥에 내던진 채 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검침을 나온 기사를 안내해 주다가 미끄러져 무릎을 다치게 됩니다. 애나가 없는 일상은 엉망진창의 나날입니다.


그렇게 두 달이란 시간이 흘러 다쳤던 무릎도 나았고 작업중이던 키르케고르에 대한 책도 완성합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그는 로지타로부터 들었던 그녀 아버지의 사고를 떠올립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였지만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는데 바움가트너는 그 사고 소식을 매개로 머릿속에 남아 있던 '환지통'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환지통'에 대한 생각은 곧바로 자신의 삶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지난 삶 속으로 빠져듭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p.77)


아내가 평생 써왔으나 한 번도 발표한 적 없는 글들과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이 뒤섞이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허구와 환상 그리고 과거에 대한 회상을 두려움 없이 접하게 된 그는 애나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느낍니다. 애나의 친구이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주디스에게 청혼을 결심하기도 하고, 아내의 미발표 원고를 검토하고 연구하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젊은 여성 학자를 위해 그녀가 머물 차고의 숙소를 점검하는가 하면 엉망으로 변한 마당의 조경 계획도 세웁니다.


"아마도 무엇보다 책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책이 다는 아니다. 바움가트너는 애나의 죽음이 여기에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케이프 코드 해변에서 그녀가 말릴 기회도 주지 않고 물로 달려 나갔던 그 마지막 날. 애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몸을 담그러 가겠다고 말할 때 이미 일어나 있었고, 바움가트너는 타월 위에 널브러진 채 책을 읽고 있었다."  (p.237)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햇살 속에서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생각하거나 반추해 볼 새도 없이, 마치 빗방울이 미끄러운 나뭇잎 위를 또르르 흘러내리듯 금세 흩어져버리곤 합니다. 그렇게 흩어져버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하고,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며, 사랑하는 이와 영원히 이별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침 산행에서 보았던 어느 노부부의 뒷모습처럼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마주한 풍경 위에 무언의 언어로 묻고 답하면서 지나온 삶을 되돌이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폴 오스터의 <바움가트너>는 지극히 단순한 구성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사유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소설입니다. 나 역시 하룻밤에 후루룩 읽어내지 못하고 멈춤과 사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아침 산행에서 내가 노부부의 뒷모습에 넋을 놓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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