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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7월
평점 :
내가 읽었던 어떤 책에 대한 감상이나 리뷰를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읽는다는 것 역시 호기심이 동하는 일이지만, 그 사람의 글에서 읽히는 마음결이 나와 비슷할 때, 나는 저으기 안심하게 된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던 나는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엄마의 칼질 소리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차분히 가라앉았던 침묵과 주변을 감싸는 익숙한 냄새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이란 이렇듯 손톱이 자라는 것과 같은 무심함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이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서 되짚어 보면 크게 웃자란 손톱을 발견한 듯 크게 놀라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의 놀람을 몇 차례 경험하다 보면 삶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지고 만다. 자신의 옷자락에서 먼지를 털어내듯 말이다.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하루와 하루 사이를 박음질하듯 이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매일매일 그저 자신에게 최선이라 믿는 길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한, 사노의 질문은 길 잃은 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날 것이다." (p.192)
백수린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를 동요케 하는 어떤 큰일이 없이 하루하루가 그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으로 채워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서 높낮이가 없는 이차원 평면처럼 맨송맨송하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의 길지 않은 시간만큼은 안심해도 된다는 신의 계시가 나의 일상을 지켜줄 것만 같은 것이다. 작가가 리뷰에 앞서 소개하는 여러 종류의 빵 내음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구수하게 풍겨올 것 같고, 그렇게 느끼는 나는 작가가 소개하는 책에 허기가 동한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 목록에 쌓여만 가는 책의 제목들...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읽고 난 후 세상을 보는 시선을 바꿔주는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수업』은 나에게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두 번 다시 나무를 그 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가로수,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뒷산의 나무를 보면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p.226~p.227)
요즘 나는 군에 간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내는 느낌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아주 잠깐 서로가 꼭 묻고 싶었던 질문들만 모아서 쫓기듯 통화를 하는 그 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겨진다.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 그러니까 서로가 여유 있게 대화하고 하시라도 전화나 문자가 가능했던 그 시절에는 그렇게 다급하게 묻거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을 질문들을 나는 요즘 제한된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쏟아내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만남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 시기에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아들이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릭 라이어던의 작품에 빠져 지냈는지와 같은 그런 한가한 질문은 요즘 하지 않는다. 아들이 제대를 하고 조금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각자의 소감을 말하기에는 어떤 책이 좋을지 나 혼자 이따금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캐나다 소설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좋아하지만, 바람이 몹시 불어 쓸쓸한 어느 밤, 누군가와 갓 구운 단팥빵을 나눠 먹으며 단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면, 다시 읽고 싶은 것은 『디어 라이프』다. 이 단편소설집에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저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어둠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p.257)
백수린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은 작가 자신이 읽었던 책에 대한 가벼운 감상(평론이 아닌)을 기록한 책이지만 나는 마치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읽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 역시 이 책을 통하여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독자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읽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하고 바랐던 작가의 바람이 반쯤 이루어진 셈이 되는 것이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지고 있다. 바깥으로 오랫동안 나돌기에는 무더위의 장벽이 너무 높고 두터운 느낌이다. 이런 날씨에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한 권의 책을 읽는 게 제격이다. 뭐니 뭐니 해도 여름은 역시 독서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