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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평점 :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의 소설을 그닥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 생각날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바닷가 관광지의 어느 횟집을 지나칠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배는 고픈데 딱히 눈에 띄는 식당은 보이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 끼 때우고 나면 허기는 면해지겠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취향이나 선호를 내려놓게 되는 상황. 물론 책을 읽는 것과 같은 2차원적 욕구를 생존을 위한 1차원적 욕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간은 남고 머리는 어지러울 때, 말하자면 현실의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거나 어려운 책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무겁게 하고 싶지 않을 때, 사적 보복을 다루는 범죄 소설을 읽곤 한다. 사적 보복을 다룬 소설이 대개 그렇듯 구성은 단순하지만 보복은 매우 잔인하며, 개인의 원한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 시스템의 허점은 크게 부각하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책의 내용에 크게 공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소설의 주인공이 대신해 주는 것에 대해 열광하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모든 행위가 불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이크는 버디 리 눈의 살기 어린 광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그의 정맥에 흐르는 분노였다. 자신의 일부까지도 사멸해버리는 독이었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부분들. 그것은 아이크의 정맥에도 흐르고 있었다. 강력하지만 치명적인, 단단하지만 무모한 그 무엇. 그건 도리어 스스로에게 날을 들이밀어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 분노였다." (p.197)
S. A. 코스비의 소설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역시 사적 보복을 다룬 범죄 소설임은 분명하다. 이전의 범죄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의 전면에 동성애와 인종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의? 엿이나 먹으라 그래.'라고 생각하는 대부분 국가의 사법 체계에 있어서 개인의 원한이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숫제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권력 계층의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한 도구일 뿐 수없이 많은 소시민의 원성을 하나하나 들어줄 만큼 한가하거나 그렇게 자비롭지는 않은 까닭에 범죄 소설은 끝없이 생성되고 또 읽히게 된다. 불합리하게 피해를 입은 어느 소시민이 자신의 피해 구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법 체계에 분노하여 직접 보복에 나서게 된다는 뻔한 구조의 소설을 언제까지고 읽고 소비하는 것이다. 싫증을 내거나 조금도 질리지 않은 것처럼.
흑백 동성 부부였던 아이지아와 데릭이 어느 날 와인 바에서 나오는 도중에 잔인하게 살해된다. 그러나 수사는 지지부진한 채 진전이 없고, 이를 답답하게 여긴 데릭의 아버지 버디 리는 장례식에서 만났던 아이지아의 아버지 아이크를 떠올린다. 조경 회사를 운영하는 아이크를 찾아간 버디 리는 아들 부부의 사건을 같이 조사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거절당한다. 며칠 뒤 아들 부부의 묘비까지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이크 역시 분노하고 버디 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버디 리와 아이크 두 사람은 모두 전과가 있다. 게다가 아이크는 수감 시절 교도소 내 갱단 두목을 한 전력도 있다. 버디 리의 아내는 그가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로 혼자 사는 처지가 되었고, 아이크는 석방 후 굳게 결심을 하고 아내 마야와 아이들을 돌보며 사업에 매진해 왔다. 두 사람은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 반드시 원한을 갚겠다는 뜻으로 의기투합해 아들들이 살았던 집부터 수색을 시작하는데...
"여전히 무지하지만, 그래도 배워나가고 있죠. 나도 그렇고요. 우리 둘 다 배우는 중이에요 우리 모두 후회스러운 말들을 했고, 되돌리고 싶은 헛짓거리들을 했어요. 당신 인생의 어느 순간들에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이제는 그런 농담에 웃지 않으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p.309)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은 채 차마 해서는 안 될 모진 말과 행동으로 아들들을 마음 아프게 했던 두 사람은 결혼조차 제대로 축복해 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며 반성하는 한편, 전과가 있는 흑인으로서 아이크가 다시 범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혹독하게 참아왔는지 같은 전과자이지만 백인인 버디 리는 뼈저리게 느낀다. 단서를 찾아가던 그들은 트랜스젠더 파티걸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그녀에 얽힌 범죄 집단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직감한다.
"맞아요. 흑인이란 사실은 숨길 수 없죠.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숨겨야 한다는 그 사실이 바로 핵심이에요. 킹 목사도 말했잖아요. 어딘가에 있는 불평등은 어디에나 있는 평등에 위험이 된다고요." (p.221)
아들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나선 두 아버지의 앞길은 그야말로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난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사건은 이제 파티걸 탄제린의 배후로 이어진다. 미모의 트랜스젠더 탄제린은 사실 현직 판사이자 주지사 후보로 나선 제럴드 켈케퍼와 교제를 하는 사이였고, 제럴드는 버디 리의 전처인 크리스틴의 현재 남편이기도 했다. 주지사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탄제린과의 불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제럴드는 자신의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했던 아이지아와 데릭을 청부 살해했고, 탄제린마저 없애려 했다. 그러나 버디 리와 아이크의 개입으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검사가 수사권으로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고 했던 어느 검사는 이제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정적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깡패보다도 못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은 알아야 하고, 그와 같은 양아치 짓거리를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양아치보다도 못한 어느 전직 검사에 의한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야만의 시대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