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 막 자신의 삶을 시작하였으며, 또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어제와 비슷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터, 그 모든 게 자연의 섭리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련의 변화이고 과정이지만 우리가 각각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까닭은 삶을 통하여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인이 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을 마감한 사람에 대한 애도와 고인에 대한 명복을 빌어주는 게 살아 있는 자들의 예의일 터, 구구한 억측과 낱낱의 공과를 통한 분분한 비난 혹은 칭찬, 자신의 이념의 필터에 의한 섣부른 재단 등은 살아 있는 자들 간의 논쟁을 위한 논쟁에 불과할 뿐 과거가 된 박원순 시장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호사가들은 그와 같은 불필요한 논쟁을 이어가곤 한다. 굳이 논쟁이 필요하다면 성추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살아가는, 예컨대 박희태 전 국회의원이나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등과 같은 이들의 공과를 가지고 논쟁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한 사람이 삶을 마감한다는 건 그와 맺었던 다양한 관계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은 '관계의 종말'이라는 한 마디 말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삶을 이어가는 우리들이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 앞에서 우리는 조금 더 경건하고 겸허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구구한 억측이야 어떻든 서울시장이었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나는 그분의 명복을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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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7-1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꼼쥐 2020-07-11 21:05   좋아요 0 | URL
부디 영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