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운명이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자연스레 샘솟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속에는 일종의 패배의식과 같은 감정도 없지 않아서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종종 꺼려지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청소년기의 아이들처럼 꿈을 꾸고, 백 년도 못 살 인생이지만 천 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내고, 60, 70이 되어도 항상 헤라클레스와 같은 체력을 유지하도록 교육받아 온 셈인데 그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일견 의심이 들곤 한다.

 

나와 인연이 있는 한 스님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신 적이 있다. 속세에 사는 사람이나 산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이나 인간은 누구나 욕심을 에너지로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부든, 명예든, 권력이든, 해탈이든, 성불이든, 득도든  간에 목표로 하는 대상이 서로 다를지언정 목표를 향한 욕심이 얼마나 크고 작은가에 따라 사람의 수명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욕심이 없다는 것은 삶의 에너지를 잃는 것이기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그러므로 속세에서 말하는 '내려놓기'란 탐하는 대상을 바꾼다는 의미일 뿐 욕심을 없애는 게 아니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부터 우리는 '저 사람도 나이가 들면 나와 같겠지.' 하는 연민이 싹트게 마련이고, 타인의 삶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됨으로써 배려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동지의식과 같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흐른다. 일정한 루틴을 따라 큰 변덕 없이 흐르는 몸의 시간은 매번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간에 한계와 매듭을 지어주는 것은 몸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사람이 마치 100년은 더 살 것처럼 크게 욕심을 내는 걸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그게 마치 선인 양 가르쳐왔던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한계를 인식한다는 건 결코 좌절이나 패배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배울 수 있는 까닭에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다.'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 않던가. 겸손하다는 건 자신의 운명이나 한계를 인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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