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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팔이 의사
포프 브록 지음, 조은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24일 밤 어느 방송국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피부과 의사 행세를 해온 연극배우의 실체를 파헤쳤다. 출연했던 작품만 40여 편에 달하는 중견 배우였던 홍 씨는 직접 극본을 쓸 만큼 재능이 많았던 사람인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가 사람들은 그가 필리핀에 가서 공부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후 홍 씨는 레이저기 납품업체 직원들을 졸라 작동법을 배워 근무했던 병원의 의사 몰래 불법 시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의료기기의 작동법을 배운 홍 씨는 불법 시술을 넘어 피부과를 개업하기에 이른다. 병원이나 의원은 의사만 개업할 수 있지만 의료생협은 의사만 고용하면 일반인도 개업할 수 있다는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2016년 부산에서 병원을 개업한 홍 씨는 원장 행세를 하면서 다수의 환자에게 무면허 의료 시술을 했다는 게 골자였다. 이날 방송에서는 그로부터 시술을 받고 부작용에 시달리는 피해자들도 등장했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도 쉽게 알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걸까? 그것은 아마도 더욱 젊고 예뻐지고 싶어 하는 대중의 욕구를 어느 사기꾼이 교묘히 파고든 결과가 아닐까 싶다.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두들겨보는 돌다리의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숫제 점검도 없이 사기꾼의 말 한마디에 쉽게 넘어간 피해자도 다수일 터, 과학이나 제도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여러 욕구가 존재하는 한 그 욕구를 이용하여 다른 계획을 획책하거나 도모하려는 사기꾼은 언제든 발호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기 행각이 있었다. 피해 규모로 본다면 홍 씨는 뻔뻔한 사기극의 주인공 '존 R. 브링클리'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대중의 탐욕을 그 표적으로 삼았던 것과 연기와 언변이 탁월했던 점은 유사하다.
"물론 의료 사기는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번성했었다. 대부분의 사기가 탐욕을 표적으로 삼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의료 사기는 칼 융의 명제인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기적에 대한 갈망'을 깊숙이 파고든다. 게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사람들은 대체로 바보가 된다." (p.23)
논픽션 작품의 대가 포프 브록이 쓴 <돌팔이 의사>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는 아니겠지만 시신의 숫자로 따지면 결선까지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의료 사기를 저지른 천재 악마 '존 R. 브링클리'와 그를 끝까지 뒤쫓은 '피시바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브링클리는 시들어가는 정력을 회복시켜주겠다며 염소의 고환을 제거해 사람의 음낭에 넣는 외과수술을 시행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염소 고환 이식술을 통해 발기부전 치료의 돌파구를 찾았다는 그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듣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자가 되었다. 당시 미국 의사들 수입이 7,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었는데 그는 자그마치 1,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는 단순히 의료 사기꾼에서 그치지 않았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났던 그는 광고를 위해 라디오 방송국과 송전탑을 짓고, 컨트리 뮤직을 처음으로 라디오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브링클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의학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수많은 가정을 병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염소 고환 이식술을 통해 많은 남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주지사에 출마하기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한 계산'과 '자신을 신과 혼동하는 사고'가 섞인 브링클리의 특이한 기독교관에는 반유대주의 요소가 늘 도사렸다. 브링클리는 1932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위치타의 목사였던 제럴드 B. 윈로드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국제문제가 유대인 음모론이라 지적했고, '전통적이고 신을 두려워하며 자녀를 둔 미국인들'만을 축복해주었다. 암울했던 1930년대에 유럽에서 파시즘이 폭발하자, 미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상들이 마치 배수관의 뱀처럼 출몰했다." (p.325)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면 모든 게 어리석고 황당하게 여겨진다. '아무리 회춘도 좋지만 염소의 고환을 자신의 음낭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게 말이나 돼?'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도 현재의 상식과 기준에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 의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당시의 의학적 수준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시술법을 개발했다고 한다면 그의 말에 반문을 제기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게다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숙명적인 공포를 완화하기 위한 자구책이 될 수도 있는 회춘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더해진다면 그 믿음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예뻐질 수 있다고 광고를 하면 면허도 없는 가짜 의사에게 수천 명이 달려드는 판이니... 인간의 탐욕을 파고드는 사기꾼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회춘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탐욕도... 사기꾼에게 속지 않는 비결은 자기 스스로에게 언제나 '나의 탐욕은 안전한가?'라고 묻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