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간결하고 섬세한 문체와 적절한 비유에 감탄하곤 한다. 그런 재능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많은 독서와 꾸준한 메모, 그리고 필사와 습작, 어쩌면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혹독한 훈련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유추는 에쿠니 가오루의 선친 역시 수필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필가 에쿠니 시게루. 그들 모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문득 소설가 한승원과 그의 딸 한강 작가를 떠올리곤 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은 제목만큼이나 신선한 작품이다. 잘 찍은 스틸컷 여러 장을 길게 이어 붙인 듯한 이 소설은 스토리보다 하나하나의 문장에 집중하게 된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하루하루가 무심히 흘러가는 듯하고 세상 어느 것에도 집착하거나 사랑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바삭바삭한 가을 길을 가볍게 산책하고 있는 듯한 기분.

 

대화하기 가장 편한 상대는 나를 평가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 한마디로 집착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집착이 없는 까닭에 관계는 언제나 바람에 나부끼듯 가볍기만 하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별에 마음은 언제나 불안할 테니 말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이런 성격의 인물 하나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오래전에, 다케오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하나코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때였다. 마음이 맞아,라고 다케오는 말했다. 봄이었고, 따뜻한 밤이었다. 그날 낮 둘이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나는 다케오에게 버림받았다." (p.113)

 

소설은 리카와 다케오의 이별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은 8년 동안이나 같은 집에서 동거한 사이였다. 말이 8년이지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부부나 다름없었던 그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던 것은 여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얻은 집,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이 나가고 남겨진 한 사람은 그 집에 혼자 눌러앉게 되었다는 현실을 리카는 차마 인정하지 못한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p.16)

 

집착이나 기대가 없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는 또 다른 여자. 정상적인 관계였더라면 각자가 뿔뿔이 흩어져 소식도 모른 채 지냈을 터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다케오의 새 연인이 된 하나코가 리카의 집에 눌러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케오가 그랬던 것처럼 임대료의 반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리카는 하나코를 끈으로 다케오와의 관계가 이어지는 게 싫지 않았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부엌뿐. 나머지는 전부, 전부 변했다. 긴장감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이다.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옛날보다 더욱 다케오를 좋아하고 있었다. 엄마처럼, 친구처럼. 그리고 그래도 연인처럼." (p.112)

 

하나코의 건조한 삶을 리카는 이해하지 못한다. 애인이 있으면서도 언제든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낼 수 있는 태연함,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유분방함, 그럼에도 타인의 그런 모습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중성을 지닌 하나코. 다케오는 제멋대로인 하나코로 인해 힘들어하다 결국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맘에 들어하던 광고회사의 영업직을.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하나코는 아무 때고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다. 골프장에도 가고, 심지어 리카가 가르치는 아이의 집에서도 여러 날을 보냈다. 아빠와 아이만 있는 그 집에서. 그럼에도 리카는 혼자 있는 날이 반복될수록 하나코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리카는 결혼하여 홍콩에 사는 료코에게 의지하곤 했다.

 

"나와 료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마도 만사에 임하는 자세. 료코는 무슨 일이든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자기 스스로 나서니까 돌아갈 장소가 있다. 무언가를 잃어도 제로로 돌아갈 뿐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없다." (p.20)

 

말하다 보니 스토리를 너무 많이 꺼내 놓은 듯하다. 스포일러가 된 느낌. 그러나 스토리의 후반부와 결론은 말하지 않겠다. 말을 하고 나면 괜히 쓸쓸해질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상상의 외줄에 흔들흔들 매달려 그네를 타다가 아주 가끔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착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현실과 마주한다는 건 그리 달가운 일도 아니고, 현실을 직시하는 삶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한 채 상상의 세계를 흐느적흐느적 적당히 거닐다가 잊을 만하면 가끔 한 번씩 현실을 바라보는 삶, 언뜻 가짜인 듯 보이는 그런 삶을 우리는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시시각각의 현실을 인식하는 삶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지칠 때면 상상의 세계로 잠시 도망칠 수 있는 삶, 그게 좋다. 소설에서 하나코의 삶이 무심하고 단조로운 듯 보였던 까닭도 그녀가 줄곧 현실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밤에서는 벌레 냄새가 난다. 풀과 벌레와 공기가 뒤섞인 냄새, 어린애 같은 냄새다." (p.63)

 

장마철이다. '비는 충분히 싸늘하고, 관능적이고, 부드러웠다. 하나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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