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유머
박정선 지음 / 산지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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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세 살기혼 여성의 잔인하도록 숨 막힌 연애? 불륜?

 

‘마흔세 살 기혼 여성의 가슴 떨린 연애가 있다. 잔인하도록 숨 막힌 기다림…’


책 뒤표지 글에서 눈길이 머문 곳은 ‘마흔세 살’ 딱 여기! ‘기혼 여성의 가슴 떨리는 연애’ 이런 말은 좀 흔하잖아. 마흔세 살, 이 말만 없었어도 어쩌면 이 소설,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이 겨울에 웬 가을의 유머?’ 콧방귀 훌렁 뀌면서.

 

‘그래, 내 또래 혼인한 여자의 연애라니까, 친구 이야기처럼 만나 보자. 연애소설쯤이야, 뭐~.’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여는데, 첫 장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라스코동굴벽화’가 어쩌고 하는 내용이 맨 앞을 떡 차지하고 있다. 연애 소설 들머리 치곤 뭔가 낯설다. 조금 무거운 기운까지. 흐음~. ‘연애’의 ‘연’ 자도 나오기 전에 예술 언저리 들먹이는 연애소설이라. 시작부터 남다르네. ‘읽다 말거나 푹 빠져 읽거나’, ‘물건이거나 허당이거나’ 둘 중 하나겠구만. 기왕 보는 거 ‘물건’으로 남을 책이면 좋겠구만. 슬며시 찾아든 긴장감을 안고 책장을 넘긴다.

 

주인공 승연, 그리고 ‘전업주부여자’ ‘가정교사여자’ 세 사람이 수다 떠는 장면이 나오면서 무거운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보통 연애소설처럼 흘러간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 드라마로 보든 영화로 만나든 책으로 읽든, 뭐가 됐든 빠져들게는 된다. ‘사랑’, 인류의 처음이자 마지막 감정 아니겠나.

   

몰래 하느라애타는, 해를 끌어 올리고 끌어 내리는 그 사랑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면서 그 미소에 21일 동안 목이 까맣게 타들어 간 그리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담아내기로 한다.” (34쪽)

 

“금요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아침마다 내가 해를 끌어 올리고 내가 해를 끌어 내렸다. 6일이라는 시간을 하루로 압축시켜 버리고 싶었다. 나는 금요일을 기다리기 위해 사는 것 같았다.” (113쪽)

 

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리움’ 앞에, ‘몰래 하느라’ 애타는 그 사랑 앞에 감정이입 제대로 몰아쳐 주신다. 이런 느낌만으로도 읽는 재미와 보람 충분했을 터인데, 이 소설 여기서 멈추질 않는다. 자꾸 ‘사랑, 그놈’ 말고 ‘사람의 마음’까지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삶의 지혜’가 담긴 좋은 말씀도 막 쏟아지고.

 

“한 번 병들면 가장 고치기 힘든 것이면서도 어떤 동기로 하여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말끔히 고쳐 버릴 수 있다는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다.” (32쪽)

 

“남에게 내 자랑을 하면 믿으려 하지 않고, 남에게 내 흉을 말하면 그보다 더 험하게 여긴다는 서양 속담을 생각하면서 내가 단순하고 성급했다는 자책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 가까운 사이일수록 인정하기 어려운 게 인간이라고 했다.(…) 엄마는 이웃이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때 좋은 것이라고 했다.” (84쪽)

 

“자기 마음을 자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정말 자기 앞에 한없이 약한 존재였다.” (123쪽)

 

“머리가 애써 생각해 놓은 것, 꿰맞춰 놓은 것을 가슴이 모래성처럼 허물어 버렸다.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186쪽)

 

사랑만 풀어내기에도 바빴을 텐데 삶까지 파고드는 이 소설, ‘물건’ 될 조짐이, 향기가 솔솔 퍼져 나온다. 그리고, ‘예술론’을 ‘연애’와 ‘꽃’ 이야기에 사라락 녹여낸 여러 문장들을 만나면서, 밑줄 좍좍 긋는 그 순간부터 이 소설, 나에게 ‘물건’으로 자리 잡는다. (‘예술’과 대화할 수 있는 글은 그게 뭐든 닥치고 좋아하는 나라서 더 그럴 테지.) 게다가 별로 관심이 없던 ‘꽃’과 ‘꽃꽂이’에도 마음이 끌린다. 세상에, 꽃꽂이 해 보고 싶다는 마음까지 솟더라니. 꽃꽂이 예술가인 승연이 슬슬 흘리던 꽃과 예술 이야기, 참 멋지고 깊었다.   

 

소설 보면서 밑줄 좍좍!

 

“가을 국화를 선비에 비유한 것처럼 내 나름대로 국화 향기를 정의한 게 있다. 라일락 향기에서 ‘미치도록’을 뺀 나머지의 그윽함이라고 불렀다. 라일락 향기가 발길을 붙잡아 세운다면 국화 향기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뒤돌아보게 하거나 생각에 빠져들게 한 탓이다.” (82쪽)

 

“예술작품은 창작자가 자라 온 성장의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약 성장이 우울하고 어두웠다면 자기 혁명을 일으켜 그것을 과감히 뛰어넘든지 아니면 그것에서 처절하게 비통해지든지 하라고 했다.” (91쪽)

 

“선생님은 (…) 꽃은 살아 있는 바로 ‘자신’이라고 인식할 것과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듯이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57쪽)

 

“프로는 잘 버릴 줄 알아야 해. 꽃은 절정이 지나자마자 버려야 해. 시시각각 변하는 것만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거든. 변하고 또 변해서 인류문명이 이만큼 발전한 거구.”(207쪽)

 

“류초희 선생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이상과 현실 사이, 그 비좁은 행간에서 몸부림치는 존재라는 것, 현실은 곧 정형이란 틀이며 인간은 끊임없이 그 현실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지만 현실은 늘 자기의 틀 안에 붙잡아 놓기를 고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술을 통해 정형의 틀을 벗어나 보고자 하는 것이며(…)” (208쪽)

 

 

살다 살다 소설 보면서 이렇게 밑줄 많이 긋기는 처음이다. 무슨 인문학 책도 아닌데 말이지. (나는 책 보면서 밑줄 치는 걸 좋아한다. 어쩌다 그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울퉁불퉁 선 위에 얹힌 글자들을 보면서, 깨끗한 책 지저분하게 만들던 그때랑 지금 내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할 때 밀려오는 그 뿌듯함이란. 밑줄을 긋지 않고서야, 밑줄 친 뒤에 찾아오는 이 짜릿함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바로 지금처럼! 더구나 나처럼 한 번 본 책 다시 처음부터 읽는 일 잘 없는 게으른 사람한테는.)

 

‘삶’와 ‘예술’이 제 아무리 잘 버무려졌어도 이 책의 정체성은 ‘연애소설.’ 어차피 삶도 예술도 궁극엔 ‘사랑’을 하고자, 표현해 보고자, 극복이라도 해 보고자 있는 것 아니겠나. 소설 끝자락에 여느 아침드라마처럼 삼각관계가 제대로 펼쳐진다. 물론 ‘물건’ 소설답게 꽤 괜찮은 분위기로.

 

결혼은 계약이고 연애는 자연이라더라.”

 

“내 그리움은 불꽃이고 전업주부여자는 대형 소방호스였다.” (194쪽)

 

날마다 헬스클럽에서 수다 떨던 통통한 전업주부여자가, 애타게 사랑하던 그 남자의 부인이었다니. 단 하루를 더 기다리지 못해 몰래 ‘애인’을 마중하러 나간 공항에서, 몰래 ‘남편’을 마중하러 나온 친한 동무를 만났을 때 그 심정이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대형 소방호스. 직설인지 은유인지 헷갈릴 만큼 완벽하게 와 닿는 표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면 ‘삼각관계’가 아니지. 역시나 헬스클럽 동무, 삐쩍 말라서 같은 여자가 봐도 도저히 매력이라고는 느낄 수 없던, 아는 것만큼은 정말 많았던 그 ‘가정교사여자’가 남편 애인님으로 기어이 나타나 주신다. ‘여자’ 근처에도 못 갈 듯하던 쑥맥 남편이 연애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가 찰 노릇인데….

 

전업주부여자에 이어 가정주부여자까지 끼어든 삼각관계를 알게 된 순간, 마음속에서 유리창 백 개가 한꺼번에 와르르 깨지는 소리가 나더라는 그 마음, 사실 여기까진 백 프로 감정이입이 안 됐다. “참을 수 없이 그가 보고 싶어 은행으로 달려가야 했을 때, 누군가가 중세시대 노예를 내리친 채찍으로 나를 후려쳐 주기를 바라던” 그 지독하게 애타는 마음보다는, “살얼음이 언 초겨울처럼 서늘해진” 지금 마음이 그나마 견디기 조금 낫지 않을까 짐작 정도 해 볼 뿐.

 

“결혼은 계약이고 연애는 자연이라더라. 계약은 깨지지 않는 한 계속되지만 자연은 3개월마다 딱, 딱, 바뀌잖아. 울고불고 붙잡고 늘어진다고 가을이 안 가니? 이제 곧 겨울이 온다니까. 두고 봐.” (205쪽)

 

‘연애’를 ‘자연’에 비유하다니. 아, 정말 딱이다, 딱! 도파민, 세로토닌이 어쩌고 하면서 호르몬 들이대며 사랑의 유효 기간이 어쩌고 하는 것보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지당한 말씀인가. 앞으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런 물음이 다가올 땐 저 문장을 고대로 써먹고야 말테다!
 
“자꾸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웃고 있는 동안 가을이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220쪽)

 

“나는 제목을 지을 때마다 몸살을 앓았다. 이 양 말대로 제목을 미리 지어 놓은 게 좋을 것 같았다. 서너 달씩 걸리는 제목이 내 입에서 곧바로 흘러나왔다. ‘가을의 유머’였다. (…) 비극이라는 가을 미토스와 내가 감내해야 할 현실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222쪽)

 

 

겨울에 나와서 참 다행인 소설, 가을의 유머

 

아하, 이제 알겠다. <가을의 유머> 이 책이 왜 가을이 종지부를 찍은 이 겨울에 얼굴 빼꼼히 내밀었는지. 가을에 나왔으면 어쩔 뻔했나. 저 숨 막힐 듯 애타는, 지고한 떨림이 유혹하는 연애를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을, 살랑이는 가을바람이 지독하게 부채질하지 않았을까.  춥고 시린 ‘겨울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이 계절에 읽었기에 망정이지. (그래서 그런가. 왠지 이 소설, 남편은 읽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얄팍한 생각마저 드는구만. ^^)

 

“왜 바람이라고 하겠어.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 지나가도록 두는 수밖에 없는 거야.”(148쪽)

 

“좀 더 살아봐. 사랑이란 운명이구나!라는 말을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찾아와 준다면 인간으로서 행복한 일이겠지.”(158쪽)

 

‘바람’과 ‘사랑.’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낱말. ‘불륜’이라는 딱딱한 말은 당최 여기에 끼어들 자격이 없어 보인다.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이렇게 마음 가다듬으며 소설을 마치려는데, 맨 뒤에 나온 ‘작가의 말’ 덕분에 한바탕 웃고야 말았다.

 

“주인공 승연과 석환의 만남을 단절시켜 버린 것은 잔인한 짓일까? 아직도 작가(나)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그렇다면 이들을 어쩌란 말인가. (…) 이들의 만남은 아무리 순정해도 불륜이다. 불륜을 미화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임을 고백한다.”
 
‘바람’은 철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사랑’이노라고, 가슴 미어지는 문장들로 그려낸 분이 쓴 저 솔직한 반전 고백. 이 또한 참 유쾌 통쾌한 ‘가을의 유머’였다. 겨울에 읽은 ‘가을의 유머’, 물건 중에 물건이노라고 마음속 어느 자리에 확인 도장 ‘꾹!’ 찍는다. 그제야 글쓴이가 궁금해진다. 책날개에 있는 소개 글 보면서 무릎을 ‘탁!’ 친다.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도 쓰고 시조도 쓰고 있음.《백 년 동안의 침묵》을 비롯한 소설 다수,《사유와 미학》을 비롯한 평론집 여럿 펴냄.’

 

 

쩐지, 쩐지 어쩐지이~ 연애를 징검다리 삼아 예술과 욕망론을 솔솔 풀어내던 글맛이 남다르더라니. 작가의 말에 헤겔, 프로이트, 스피노자에 이어 앙드레 지드, 키에르 케고르까지 나와 주신 것도 다 까닭이 있었다. 자기 마음을 부정하는, 뛰어넘는 ‘연애소설’ 하나 써 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럼에도 “정형은 현실이며 뿌리이기에, 아무리 찬란한 이상도 현실이라는 뿌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이 마음속 깊이 박힌 ‘창작의 뿌리’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에 승연과 석환을 헤어지도록 만들었을 테지.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한다

 

불륜((不倫)이란 한자말을 풀이하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데가 있다.’는 뜻이다. 남편 말고 부인 말고, 혼인한 '다른 사람'과 얽힌 사랑 관계를 이를 때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거참, 이상타.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지고지순한,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한 ‘도리’ 아닌가? 그런 ‘사랑’이 죄가 될 수는 없을진데, 그 ‘사랑’을 한 사람들한테 무슨 근거로 돌을 던질 수 있으려나. ‘부부’라는 ‘남편과 부인을 아울러 이른다.’는 이 메마른 풀이말에 기대서? 방패막이로도, 무기로도 삼아서 

 

“작품이 마음먹은 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는 것도 고백한다. 실패가 채근하는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다시 항해를 떠나기로 한다. 작가의 욕망은 오직 최상의 작품을 써 보겠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최상의 작품을 창작하리라는 욕망이 나를 이끌어 줄 것으로 믿는다.
_2016년 가을, 해운대 장산 아래 집필실에서 박정선.”

 

마음먹은 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는 자칭 ‘실패작’이 이렇게 많은 생각과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작가의 욕망이 제대로 반영된 최상의 작품이 나오면 그땐….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버무려진 선 굵은 소설을 주로 써 왔다는 박정선 소설가. 그래서 연애를 다룬 이 소설이 좀 뜻밖이기도 했다는 기사도 보이던데.

 

작가의 다음번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최상의 물을 만나고자 얕은 곳의 물을 거부한 채, 지심을 향해 뚫고 내려가는 차나무 뿌리처럼’, 오로지 최상을 욕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마음껏 불타오른 그런 ‘연애소설’을 만나고 싶다.

 

선이 굵든 얇든, 불륜이든 사랑이든, 그건 독자들 마음에 맡겨 주시고, 부디 다음번엔 ‘마음먹은’ 대로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써 보시기를.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한다.’고, ‘자기 마음 자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당신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연애’와 ‘욕망’은 해부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은 아닌 것도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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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학 2017-02-1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을 찾는 차나무뿌리.꽃모양러너100개.천년같은 21일.달콤한 인내의 끝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안지숙 지음 / 산지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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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독신 중년 여성들의 길 찾기.’

뒷 표지 소개 글이 내 관심을 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던 안지숙 소설집,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을 보았다. 

 

‘독신 중년 여성들’은 무조건 당기는 힘. ‘독신’ ‘중년’ ‘여성’ 가운데 나는 ‘독신’말고 두 가지나 포함되니까. (사십 초반, 중년이 맞긴 한 걸까?) ‘비정규직’은 밀어냈다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당기는 힘. 어쩔 수 없이 아프고 서러운 낱말인지라. (어쩌다 한 번 일이 생기는 귀촌 프리랜서는 비정규직 축에도 못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보니, 나를 밀기도 당기기도 했던 낱말들, ‘비정규직, 독신, 중년, 여성’이 천천히 서로서로를 보듬어 안으며 섞인다. 누군가에게는 있을 법한, 또 누군가에는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속으로 숨어 있기 더 쉬운, ‘평범하고도 평범치 않은’ 우리네 여성들의 삶, 사랑 그리고 아픔.   

 

일곱 개 소설 차근차근 읽어 내고, 마지막에 나오는 ‘바리의 세월’까지 읽고 나니 마음이 답답하고도 뜨끈 애잔하다. 책 끝에 나오는 ‘작가의 말’까지 마저 보니 이 소설집이, 또 많은 소설들이 가진, 내게 없는 그 ‘밝음’과 ‘힘’이 무언지 조금 알 듯도 하다.   

 

 

내게 없는 소설의 그 ‘힘’이란, 작가의 말을 대폭 베껴서 써 보자면……. (작가의 말이 꼭 내 마음 같아서, 그런데 작가의 말보다 더 생생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작가의 말을 아주 제대로 빌려 본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게도 되고, 남의 상처가 헤집어진 이야기들 속에 어설픈 감정이입으로 빠져들며 통증도 같이 느껴 보고, 그러면서 내 이 상처란 놈은 곪을 건덕지도 없는, 밴드 몇 번 붙이고 말면 될 걸 째고 꼬매는 대형 수술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엄살 잔뜩 부린 나약함의 표시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내 빈약한 상처에서 비롯된 통증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없던 철도 조금이나마 들게 되었다.’

 

백수에 준하는 중년 여성인 내가 생생하게 체험한 소설이 가진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알량하게 살아온 여자의 자학개그 

 

“하나같이 알량하게 살아온 여자의 자학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글쓴이가 작가의 말에 남긴 저 글귀. 겸손함보다는 진실함이 느껴져서 좋다. 이 소설이 자학개그에 지나지 않는다면 내 인생도 아지매개그에 불과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허나 인생은 개그가 아니다. 이 책이 들려주듯 철저하게 아프고 힘들고 외로울 때가 많은 것이 우리네 삶 아니겠나. (누구나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체로는.) 

 

글쓴이 스스로 ‘내 상처에 내가 무너진 이야기들’을 담았다는 이 책. 우리가 사는 세상 어느 모퉁이에서 잔뜩 지쳐 사는 여성들의 삶은 덤덤하게 어둡다. 때론 칙칙하게 어둡다. 그러다가는 사무치게도 어둡다. 내가 미처 겪지 못한, 알지 못했던 ‘어두움’들이 많다. 내게 없는 이 소설의 어두움은, 나를 밝은 곳으로 나가고 싶도록 이끄는 불빛 같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없을 터. 어둠은 밝음을 있게 하는, 밝음을 비추는 불빛이나 마찬가지겠지. 특히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에서는.        

 

‘체험은 작가의 밑천이고 맷집이다. 체험은 경험보다 몇 수 위이며 맷집은 현실과 소설을 버티는 힘이다.’

 

조갑상 소설가가 이 책에 남긴 헌사 가운데 한 구절. 맷집이라. 현실뿐만 아니라 소설에도 맷집이 필요한 거였구나. 작가의 경험과 체험이 얽히고설킨 맷집으로 아로새겨진 소설. 그 소설을 읽는 행위는 경험일까, 체험일까.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 글자를 읽고, 글자 속 이면을 마음에 새기는 책 읽기. 내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행위이니 소설을 읽는 것도 ‘체험’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것도 나약하고 엄살투성이인 내 현실을 버텨낼 맷집을 키우는 일이 될 수 있으려나?

 

 

엄살투성이 현실을 버티게 해 주는 ‘맷집’

 

생각해 보니 삼십대까지는 소설이 없어도 살만 했다. 버틸 필요 같은 것도 없었다. 아픈 일도 많았지만 행복한 일이 그보다 더 많아서,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나는 밝았다. 더구나 십오 년 가까이 나는 정규직이었다. 소설을 펼쳐들 시간도, 소설이 필요한 시간도 없이 그저 잘 살아왔다.    

 

사십대 초반, 그러니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사십대 안팎’이라고 말하는 그 ‘중년’이 된 지금, 행복한 일보다 아픈 일이 조금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말로는커녕 글로도 남기기 힘든,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그런 아픔들…….) 하물며 지금은 별 계획 없이 산골로 귀촌한 백수 아지매. 나이만 먹었지 실수는 그대로, 어쩌면 더 많아지기만 하는데 세상은 중년 여성인 나를 예전처럼 곱게 봐주지만은 않는다. 버텨낼 힘이 필요해졌다. ‘소설 체험’에 기대서라도 맷집을 키우는 게 필요해졌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내게 없는 미홍의 밝음> 덕분에 그 맷집의 한 켜가 얕게나마 보태진 듯하다. 그게 참 고맙다. 소설에, 그리고 소설가에게.

 

책날개에 박힌 작가 소개 글, 뒤표지 추천하는 글을 두루 보니 오십대 중반에 쓴 이 책이 작가의 첫 소설집이란다. 대박! 이 책이 처음이면 오십년 넘는 인생살이의 맷집을 맛볼 기회가 앞으로도 엄청 많이 남았다는 거랑 같은 말이잖아!

 

내게 없는 소설의 ‘밝음’, 그리고 ‘힘’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안지숙 작가. 오랜 시간 그이의 몸과 마음에 새겨두었을 그 체험의 맷집을 새로운 이야기로 또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좀 더 단단하게 한 켜 한 켜 쌓아 보고 싶다. ‘소설 체험’만이 안겨줄 수 있는 바로 그 ‘맷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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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변호사 - 삼례 나라슈퍼, 익산 택시 기사 살인 사건, 그리고 재심
박준영 지음 / 이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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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들의 변호사>와 함께한 이박삼일 서울 여행기

 

집안 일, 먹고사는 일 겸사겸사 해서 연말을 서울에서 보냈다. 어쩌다 서울 갈 일이 생길 때면 고속버스나 지하철에서 볼 책을 꼭 챙긴다. 옷가지며 이것저것 가방이 한 짐이어도 책 무게 보태는 걸 잘 포기하지 못한다. 결국 못 읽고 돌아올 때가 많으면서도.

 

그렇게 ‘짐’으로 그칠 때가 많은데도 책을 고를 때면 은근 신경이 쓰인다. 너무 무거워도 안 되고, 너무 진지해도 그렇고. 보통은 내심 읽으려고 점찍어 둔 책 가운데 덜 두껍고 (내용이) 덜 무겁다 싶은 것에 손이 간다. 특히, 눈길은 자꾸 가는데 왜 그런지 읽는 순서에서 자꾸 밀리던 책이 우선순위가 될 때가 많다.

 

이번 이박삼일 서울 여행 길동무로 뽑힌 책은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 씨가 쓴 <우리들의 변호사>. 예약 주문으로, 저자 친필 사인까지 담긴 이 책을 받은 건 지난해 12월 중순.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이야 굴뚝이었지만, 산골살이에도 연말이라는 핑계는 어김없이 뒤따른다. 받자마자 프롤로그만 살짝 읽고는 접어 둔 이 책을 뚱뚱한 가방에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몇 쪽이라도 읽으면 좋고, 아님 말고.

 

고속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책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여지없이 쏟아지는 잠. (버스에서 찾아오는 잠은 언제나 달콤해~.) 휴게소에 도착했다는 방송에 눈을 뜨고, 볼일 보고 돌아와선 의무감처럼 책을 펴든다. 다시 잠들 가능성이 높지만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 책 짐을 보탠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

 

 

서울에 있는 동안 다 읽고야 말겠어!’

 

그러나, 그런데! 읽기 시작한 뒤로 단 한 순간도 눈을 감지 못했다. 책 속으로 무지막지하게 빨려 들어갔다. 눈물까지 또르르 흐르고……. 서울에 도착할 즈음, 잡힌 약속을 취소하고 싶을 만큼 계속 이 책을 보고만 싶었다. 허나 그럴 수는 없는 일. 터미널로 들어서는 순간 다짐했다. 이박삼일 동안 어떡하든 짬을 내서 이 책을 다 보자.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이 벅찬 느낌을 글로 꼭 남기자.

 

드디어 서울 도착.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책 생각뿐. 약속한 곳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다른 때 같으면 와이파이를 마음껏 즐기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책만 봤다. 시간은 왜 이리 빨리도 가는지. 만나기로 한 곳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주문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빈틈을 타서 또 책을 본다. 산골에서 먹을 기회가 드문 우리들의 짜장면과 짬뽕님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은, 눈길은 책으로만 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서 만남을 가졌다. 슬그머니 책을 꺼내 커피 옆에 놓는다. 그 자리에서 읽을 수는 없지만, 힐끗힐끗 쳐다보며 ‘너를 서울에 있는 동안 다 읽고야 말겠어!’ 하며 다짐을 한다. 커피숍을 끝으로 첫날은 이 책을 더 꺼낼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 (그나마 해장 밥상 밑에 슬그머니 놔두는 것으로, 이 책을 서울에서 다 읽겠다는 첫 마음을 밥과 함께 곱씹었다.) 용케도 지하철 안에서는 잠시나마 책 만질 시간이 생겼다.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코끝은 또 시큰해지고, 다시금 불타오르는 의지! ‘집에 가기 전까지 꼭 읽을 거야. 집에 가면 바로 글을 써서 애절하고 따뜻한 이 이야기를 널리널리 퍼트릴 테야!’ 

 

 

일도 많았고, 술도 많았던 이박삼일이 지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버스 안. 잠을 자야 마땅한데, 눈꺼풀이 무거운데, 책을 꺼냈다. 다행히 내 자리 위에 있는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세 시간 동안 남은 쪽수를 마저 다 넘겼다. 해냈다! 박 변호사 발끝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이가 살아오고 살아낸 시간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는 마음이 뭉클뭉클 밀려온다. 새로운 마음을 다져야 할 새해 첫날 드는 이 벅찬 마음이란! 이 마음을 얼른 글로 담고 싶었다.

 

그때 그 대목에서 다시 흐르는 눈물

 

다시 또 그러나! 빠듯한 서울 일정에 책 읽기까지 보태져서 그랬을까, 몸살이 찾아왔다. 이틀을 몸살기에 허덕이고(누워 있으면서도 이불 옆에 ‘우리들의 변호사’를 고이 모셔두었다.), 그러다 또 먹고살 일과 이어진 일이 닥쳐오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늘이 되었다. 허나, 나는 잊지 않았다. 이 책이 준 감동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그 뜨거운 열망을. 책을 연다. 나를 울먹이게 하고, 선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그 대목들을 찾아본다. 그때 그 감정이 살아서 다시 펄떡인다. 눈물도 딱 그때 그 대목에서 흐른다. 눈물 젖은 그 자리마다 여러 빛깔 포스트잇을 붙였다. 열흘도 더 지난 그 느낌으로 재빨리 찾아가기 위한 나만의 고속버스다.   

 

“기사님 옆 보조 의자에 앉아 내려갈 수 있게 해 주신 덕분에 겨우 버스를 탔습니다. 3시간 30분 동안 울고 또 울면서 내려갔습니다. 그때 같은 버스를 타고 내려갔던 분들 중 단 한 분도 저한테 뭐라 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폐가 되는 일이었을 텐데 말입니다.”(42쪽)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를 가장 먼저 눈물짓게 했던 저 글귀. 나 또한 어머니, 아버지 하늘로 보낸 지 한참이 돼서 그랬을까, 버스 안에서 읽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울고 또 울면서 내려갔을 그 심정, 울고 또 우는 다 큰 남자를 말없이 위로해 주었을 승객들 심정이 그대로 느껴져서, 버스 안에서 나도 혼자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김신혜에게 다가가려 하자, 교도관이 제지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호송차에 타려는 손녀에게 다가갔습니다. 교도관들이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교도관 중 선임이 말을 꺼냈습니다. “한 장 쓰자!” 시말서 한 장 쓰자는 거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손녀딸의 손을 잡는 순간, 김신혜를 붙잡고 있던 교도관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도, 김신혜도 마찬가지였습니다.”(91쪽)

 

“<그것이 알고 싶다> 김신혜 편을 찾아보시면 제가 떨면서 찍은 영상,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토요일이 방송이었는데, 금요일에 교도소 보안 담당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방송으로 영상을 확인하게끔 하는 것보다 몰래 촬영한 사실을 미리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의 얘기가 뜻밖이었습니다. 제가 몰래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억울함이 밝혀진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방송이 나간 뒤 교도관을 비롯해 교도소 내부 관련자 14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김신혜 씨는 재심 청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186쪽)

 

“한 장 쓰자!” 네 글자에 또 울컥

 

“한 장 쓰자!” 저 네 글자를 보는 순간 또 울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 좋은 사람들이 참 많구나. 이런 사람들 덕분에 살 만한 세상이구나…….’ 그동안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교도관 분들한테 죄송함도 밀려온다. 몇 번 되지 않는 접견 경험에서 스치듯 만났던 그네들이 나는 왜 무작정 싫기만 했을까. 이런 분들이 계셨다는 걸 미처, 정말, 조금도 몰랐다. 사무치게 고맙고 또 든든하다. 박 변호사가 정의를 찾아가는 길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징검다리 몫을 해 준, 앞으로도 해 주실 거라 믿는 여러 교도관 분들께. 

 

이젠 박준영 변호사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된 것도 같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한테 그럴 일이 뭐 있느냐고? 모르는 사람한테도 미안할 일, 많이 있을 수 있다. 박 변호사처럼 ‘선한’ 사람한테는 특히나!

 

“돈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둥, ‘스토리펀딩’으로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는데 사무실 임대료도 못 낸다는 게 말이 되냐는 둥,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사람 다 다르게 생겼으니 그런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요. 신경 쓰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견디시나요?” “제가 맡고 있는 사건 중에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21년이나 감옥에 갇혀 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저야 뭐…….”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저로 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선한 연대의 물결에 힘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203쪽)

 

이제와 고백하건데, 나도 박 변호사가 말한 바로 그 ‘다르게 생긴 세상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솔직히 조금은 의심했다. ‘스토리펀딩 그렇게 여러 번 하면서 정말 파산 변호사 맞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느닷없이 뒤통수라도 맞은 듯 멍했다. 어이없는 의심을 했던 내가 지독할 만치 한심스럽고 부끄럽기만 해서. 그동안 나는 박 변호사에게 ‘재심’할 여지없는 ‘의심죄’를 짓고야 말았나니.

 

“페이스북에서 가족사진을 모두 지웠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당사자입니다. 억울함에서 나오는 절절함, 그 느낌의 진실성을 봅니다. 느낌을 가장 먼저, 그 다음에 기록을 봅니다.”(68쪽)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이 일로 내가 받는 불이익과 15년 넘게 억울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김신혜 씨의 고통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가?’ 답은 분명했습니다.”(186쪽)

 

“진범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날, 저는 페이스북에서 가족사진을 모두 지웠습니다. 우리 아이들, 보는 것만으로도 아까운 아이들의 그 예쁜 모습을 다 지웠습니다. (…) 밤에 열두 시까지 일하고 문 잠그고 나올 때면 뒤에 서 있을 것 같아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이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무섭고 두려워하면서 하는 일입니다.”(232쪽)

 

“돈을 받는 사건이 있으면 재심 사건과 같이 진행할 때 당연히 그 사건을 우선하게 될 겁니다. (…) 저는 돈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쪽으로 움직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재심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 앞으로도, 가진 게 없어서 도와 달라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도울 생각입니다. (…) 그렇게 살라고 제게 후원을 해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263쪽)

 

사건 기록보다 피해 당사자의 억울한 느낌을 가장 먼저 본다는, 돈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돈에 휘둘릴까 겁이 나서 돈 받고 하는 사건을 아예 끊어버렸다는 박 변호사.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악몽까지 꿔 가면서도 다른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애쓰는 우리네 평범한 아버지 박준영. 이런 사람을 의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제라도 뉘우칠 기회를 만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변호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지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재판할 때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 “저는 감형이나 가석방 필요 없습니다. 억울함을 밝혀 정의와 함께 승리하고 싶습니다. 제가 공정한 법과 절차에 따라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변함없는 김신혜의 입장입니다.”(93쪽)

 

“재심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에게 밥이 필요한 그 이유와 똑같습니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의 공감을 부탁드립니다.”(123쪽)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은,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이 ‘재심’이고 ‘재심’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재심’은커녕 ‘법’과 이어진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더 솔직하게는 ‘법’이라는 걸 좀 많이 싫어한다고 하는 게 맞을 듯.

 

그런 내가 박준영 변호사 덕분에 ‘재심’에 대하여 처음으로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이 같은 ‘착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마저 강하게 일어났다. 십 년만 젊었어도 되든 안 되든 무조건 도전했을 것만 같다. 지금도 이렇게 유혹을 느끼는데. (하지만 불혹을 넘긴 나이에 그런 어려운 일에 도전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을 ‘새롭게 도전할 일’을 찾는 분들이 많이 읽어서 ‘선한’ 변호사가 많이많이 탄생하면 참말 좋겠다.)

 


  
내 마음을 완벽하게 훔쳐 간 박준영 변호사님께

 

“재판을 잘하는 변호사, 물론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 억울한 사람들이 보낸 고통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으니까요. 말 잘하는 변호사, 글 잘 쓰는 변호사, 물론 좋습니다. 그래야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더 널리 알리고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정의로워지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거기에 더 보태 저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살아 보니 가장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습니다.”(188쪽)

 

저 글을 보는 순간엔, 박준영 변호사한테 전화라도 걸어서 이렇게 따박따박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박 변호사님, 내 말 좀 들어보소. 당신은 재판 잘하는 변호사 맞고요.(재심 사건들 거의가 무죄 판결된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소?) 자, 다음. 말하는 건 직접 들어보지 못했으니 넘기더라도, 글 잘 쓰는 변호사 또한 맞거든요.(의뢰인들 이야기를 이보다 더 절절하고 감동 깊게 쓸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요!) 거기에 보태서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 도사인 변호사까지도 맞답니다.(내 마음을 이 책 한 권으로 완벽하게 훔쳤으니, 그걸로 증거는 충분하지요? 증거를 더 데라고요? 새벽 세 시 넘는 시간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당신의 ‘선한 마음’을 널리널리 알리고파서, 졸린 눈 비비며 이 글 쓰고 있는 내가, 가장 확실한 증거 아니겠나요?)  

 

“‘재심 전문 변호사’라는 별칭이 붙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그 이름에 맞게 살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더 많은 관심으로, 더 많은 분들의 참여로 저의 허기를 채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71쪽)

 

‘선한 연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보낼 책에 박 변호사는 이런 글귀를 남겼다. 처음 책을 열었을 때, 굵고 또렷한 저 글자를 보면서 산뜻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사인 남기는 거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래서일까. 저 네 글자는 책 읽는 동안 늘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다. 책을 덮은 뒤로는 아예 내 마음속을 차고 들어와 버렸고.

 

그런 내 마음에 충실하고 싶어서, 내 마음에 새겨진 ‘선한 연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샘솟는 열망을 누르지 못하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선하디 선한 박 변호사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채워 주고픈 욕심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하면 결국 마음을 얻게 돼 있다고 믿는다.’던 박 변호사의 그 말을 믿고, 정말 몇날 며칠 온 정성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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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김비 지음 / 산지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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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사는 사람들-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이야기>(윤수종 엮음, 이학사, 2002)라는 책이 있다. 이 책 맨 앞에 트렌스젠더 여성 소설가 김비가 쓴 글이 나온다. 제목은 작은 외침.’ 내겐 무척 낯선 이야기였지만 참 아픈 글이었다. 이 글을 쓴 뒤로, 김비 씨가 잘 지내고 있을지 가끔 궁금했다. 그러다 이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이 나온 걸 알았다. 소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김비에 대한 어설픈 관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불안과 두려움은 부끄러운 것일까. 희망을 꿈꾸지 못하는 내게 미래로 나아갈 자격은 없는 걸까. 이 이야기는 그런 비관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결국 앞으로 발을 내딛는, 삶을 향해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책 맨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가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썼을 것 같다는 생각.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므로.

 

비상계단에 갇힌 남수네 식구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내겐 좀 낯설었다. 그네들의 삶이 낯설다기보다는 올라도 올라도, 내려가도 내려가도 출구가 없는 공간이라는 설정이 그랬다.

 

나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주 불안하고 두려운데. 비관에 빠져 희망을 꿈꾸지 못할 때가 여전히 많은데……. 진짜로 출구가 없는, 그런 처절한 삶을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꽉 막힌 곳에 갇힌 사람들이 아등바등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야기에 공감이 잘 가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 사람들은 잘못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억울하게 갇혀 있는 상황인데도.

 

갇힌 이들 모두가, 아니면 일부라도 비상계단을 탈출하는 마무리가 나올 줄 알았다. 아니, 기대했다. 그런데 소설은 마지막까지 출구 없는 계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 안에 그대로 남는다. 몇몇은 을 예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 밖을 알 수 없는 둥근 구멍으로 떨어져 나가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덜 힘들게 살았나 보다. 그리고 힘든 사람들 이야기를 덜 만났나 보다. 출구 없는 삶에서 희망까지 갖지는 못해도, 살아 보겠다고 꿈틀거리는 이상한 절망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걸 보니. 이 책을 보면서 김비의 삶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었는데 아직은 자격미달인 듯.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 태어나 서른 살 나이에 여자로서 다시 태어난 김비 당신을 마음 깊이 응원하노라고,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노라고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의 다음 작품도 꼭 읽어 보겠다는 다짐도. 그땐 내가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해져 있기를 바라며.

희망이라고 다 옳은 게 아냐. 어떤 희망은 후련한 절망만도 못해.” (98)

 

후련한 절망.’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고 갔을 작가의 삶이 그려냈을 저 글귀.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말만큼은 꼭 기억해 두고 싶다. 절망에 허덕이다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지쳐 버린 어느 순간, 그 절망을 후련하게 내려놓을 용기를 내고 싶어질 때, 이 말을 떠올리리라. 그런 순간이 오면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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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0
최유준 지음 / 책세상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은 참 중요하다.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이 제목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책을 사거나 읽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했을까. 무슨 논문 제목처럼 길긴 하지만 제목이 , , 마음에 들어서 샀고, 읽었다.

 

어째서 특정 음악은 음악이라는 말을 독점해 쓰고 있는데, 다른 음악들은 스스로 알아서 대중음악이나 국악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음악은 음악이고 어떤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니. () 음악을 구분하는 불합리한 구분법이 한 가지 더 있다. 앞의 음악-대중음악-국악의 삼분법보다 더 이상한 모양을 한 이분법이다. 바로 예술 음악-대중음악이라는 이분법이다. 예술 음악이라니? 예술 문학, 예술 미술, 예술 무용, 이런 말들도 있던가? 예술 영화라는 말이 간혹 쓰이지만 그것은 특정한 영화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여러 경우에 탄력적으로 쓰일 수 있는 비평적 용어일 뿐이다. 도대체 예술 음악이란 무엇인가? 속을 들여다보면 예술 음악이란 기실 음악 대학의 학과를 점유한 음악, 제도권 교육 내의 주류 음악을 가리킨다(제도권 음악 대학에 국악과가 있으니 국악도 예술 음악인 셈이다. 믿거나 말거나다.)” (6)

 

책 맨 앞에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나온다. 형식에서 나름 파격이다. 보통은 들어가는 글부터 나오니까. 시작부터 은근 재미난 책이다, 사람이다.

글쓴이도 말하듯 우리 사회에서 음악또는 예술음악하면 흔히 클래식 음악을 떠올리게 된다.(국악을 떠올리는 경우는 잘 없는 듯하지?) 나 또한 어느새 그러고 있는 건 아닌지. 음악을 장르로 나누는 것은 상관없겠으나 모든 음악이 예술일진데 어떤 건 예술음악, 대중음악, 또 국악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다.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당연함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을 이 책은 던지고 있다. 참으로 마땅한 물음표가 아닌가.

 

, 그러면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에 그어진, 뭔가 잘못된 그 경계선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글쓴이가 내민 방법은 자율음악론실용음악론이라는 새로운 대안이다.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의 차이에 바탕을 둔 방법으로 어떤 음악 장르도 편견 없이 적용될 수 있다고 한다. 책 안에 표까지 그려서 새로운 이분법이 어떤 내용인지 밝혀 놓았다. 표를 풀고 몇 가지만 적어 본다. 아래와 같이.

 

*자율음악론 : ‘진실한 음악(작품)은 무엇인가’/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음악 내적인 것을 향해 구심적/ 제의, 오락으로부터 거리 유지/ 음악 미학적

*실용음악론 :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음악(행위)는 무엇인가’/ 공동체주의적(평등주의적)/ 음악 외적인 것을 향해 원심적/ 제의, 오락과의 연속성 유지/ 음악 인류학적 (155)

 

눈으로 스스륵 읽을 땐 그런가 보다 싶더니, 옮겨 적으며 다시금 살피니 꽤 말이 된다. 내 식대로 짧게 해석하면, 자율음악론은 음악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고 실용음악론은 음악이 어떤 몫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하자는 말인 듯.

 

맞아, 이거야!” 하고 무릎까지 치기에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예술 음악 대중음악 어쩌고 하는 구분보다는 훨씬 낫다.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잔뜩 묻어나는 새로운 구분. 이 책이 나온 지 10년도 더 되었던데 글쓴이는 이 새로운 음악 이론을 어떻게 넓혀 나가고 있는지 무척 알고 싶다.

 

음악은 그 어떤 예술보다 감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우리 삶의 환경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들어왔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음악을 통해 말을 배우고 생활 습관을 익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음악적 환경에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 음악은 그렇게 우리 삶의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든 음악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우리의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우리 삶에서 민요가 사라진다는 것은 때가 되면 찾아오던 철새 한 마리가 자취를 감추는 것과 같다. 음악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삶을 둘러싼 이러한 음악 환경에 대한 진지한 생태론적 시선에서 출발한다.”(163)

 

음악 담론이 생태론과 닮아 있다는 말이 눈에 쏘옥 들어온다. 음악은 공기처럼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어왔지.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잊을 때도 많지만.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은 사실 쓸데없는 말이지. 공기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나는 자꾸 말하고만 싶으니 어쩐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아스팔트 위 탁한 공기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까지 맑게 해주는 산 속 깨끗한 공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랑 비슷하게 여기면 그나마 말이 되려나.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은 모 아니면 도식의 위험한 물음이 된다. 같은 취향임이 확인되면 둘 사이의 동질감이 크게 늘어나지만, 취향이 다르면(특히 클래식 음악 취향과 대중 음악 취향으로 나뉘면) 둘 사이의 이질감은 수습하기 힘든 지경으로까지 깊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사람들의 취향을 확인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취향이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화해하기 힘든 위계적 질서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이 점은 취향의 사회학을 구성하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음악의 경우 그 양상이 극단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음악에 관한 한 우리의 취향은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취향 사이에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29~30)

 

그러고 보니,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그런 물음을 받아본 적도 잘 없는 거 같다. 윗글대로라면, 위험한 물음이어서 그랬을 수 있다는 말인데. 이제라도 누군가 내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할까? 여전히 나는 흔히 민중가요라고 말하는 노래들이 가장 좋은데. 그렇게 대답하면, “그건 무슨 노랜데요?” 하고 되묻거나, ‘운동권이었나 보네하는 선입견이나 주기 십상일 테고. 그러니 아마도, 머뭇거리다가 그냥 이거저거 들리는 거 다 좋아해요.’ 적당히 말하고 말 것도 같다. 팝송도 재즈도 판소리도 클래식도 내 귀와 마음에 와 닿는 건 다 좋아하지만, 어설피 말했다가는 본전도 뽑지 못할 가능성, 여전히 클 테니. 물어 온 상대방이 저 가운데 어느 한 쪽에 깊숙한 관심이 있다면,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어지겠지. 그러면 난 좋아한다는 말 말고는, 더 구체로 들려줄 이야기가 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괜히 이거저거 다 좋다고 말했네하면서 자괴감에 빠져들 테고.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늘 있던 음악인데, 어쩌다가 우리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뭔가 많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올 때, 그 음악의 제목을 선뜻 말하지 못하면 왜 저절로 부끄러운 기운에 빠져들어야만 했을까. ‘음악에 관한 우리의 취향이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는 말보다 좀 더 쉽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종다양한 음악적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과 음악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폭넓은 전망, 이 두 가지는 대중적이며 민주적인 음악 담론을 만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된다. 혹 음악 담론이 왜 필요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나는 록 음악 동아리의 후배를 다시 만난 듯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음악 담론은 우리 삶의 ()’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이다.” (164)

 

다양한 음악과 음악 현상들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 나부터 그러자고 다짐해 본다. 왠지 나부터 음악 민주주의에 걸림돌 노릇을 하고 있던 것도 같으니. 음악은, 나에게는, 살아가는 낙을 찾는 한 가지 방식을 넘어, 살아가는 까닭이자 살고 싶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니까. 갑자기 내 삶에서 자꾸 희미해져 가려는 음악을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야 사는 낙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여러 모로 잘 만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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