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부산
김민혜 외 지음 / 산지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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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소설집-모자이크 부산”

 

제목이 독특했다.
여섯 사람이 쓴 이야기를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다니,
약간 봉 잡은 느낌도^^

 

테마소설집 <모자이크 부산>.
작가마다 서로 다른 ‘곳’을 주제로
기억을 더듬으며 아픔을 드러내고
희망을 껴안고자 애쓴다.
때론 지독히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선
모습도 보인다. 희망도 꿈도 내던진 채.

 

시민공원, 증산공원, 임랑 바닷가,
초고층 아파트, 돌산마을, 거제리.

 

소설 속 배경이자
주인공과 다름없다 해도
섭섭하지 않을 만큼,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부산’에 있는 ‘장소’들이다.

내가 만나 본 곳도 있고
이름조차 처음 듣는 공간도 있다.

 

장소에 얽힌 추억과 기억이,
(아마도) 상상과 더해져
끈적하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우리가 과거를 떨쳐내고
미래로 나아가는 시점은
지난 아픔에 대해 얘기하며
애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야 우리 모두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_박영해 ‘작가노트’에서

 

“마지막 문장을 쓰는 순간,
‘공중부양증’을 앓던 내 몸이
땅 가까이 내려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정체성에 눈을 뜬 존재로서
최초의 기억을 더듬는 건
아픔을 이해하는 공간으로의 여행이고,
치유의 길이다.”
_안지숙 ‘작가노트’에서

 

‘지난 아픔’, ‘최초의 기억’이
공간과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클 수 있다는 것을
작가노트에 새긴 글에서 새삼스레 배운다.

 

어찌 보면 늘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도 같다.
사랑도 행복도, 미움과 원망마저도.

 

<모자이크 부산>을 만난 덕분에
내가 사는 공간을 좀 더 세밀하게
헤아려 보고 싶어졌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이 바뀌었고,
또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차근차근 돌이켜 보면

 

박영해 작가의 글처럼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
안지숙 작가의 말처럼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을는지...

 

하루에 한두 편씩 나눠 보는 재미가
참 쏠쏠했다.
 
내가 모르는 삶,
내가 겪지 못한 시간,
내가 볼 수 없을 사람들.

글로 알고, 느끼고,
또 만나게 해 주니
역시 소설이 좋구나.

소설 여섯 권을 본 듯한
충만함을 안고 
<모자이크 부산>을 덮는다.
 
이 밤도 어디선가 글농사 짓느라
머리는 복잡해, 허리도 아프고 있을
세상 소설가들한테
수줍은 응원을 보내고만 싶다. 
 
“역시, 소설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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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새촙던 봄날 - 자분자분, 밀양 어느 댁 양념딸 이야기 이야기는 맛있다 1
박선미 지음 / 상추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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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에 만나 더 뜨싯하게 아린 이야기, 언젠가 새촙던 봄날 >

 

몽실몽실 포근한 겨울이불 속에서
봄날처럼 따스한 이야기를 만난다.

 

아직 내 곁에 머물고 있는 감기님 덕에

몸 쓸 기력은 딸리고.
애써 몸 부릴 일 만들 거 없이 팔자 좋게
자다 먹다 힘 좀 나면 책을 본다.

 

봄날 다가오면 볼까 싶던 요 이쁜 책,
아프니까 눈에 팍 뜨인다.
이불에 누워 한 장 두 장 보다가
그만 다 읽어버렸네.
아껴가며 조금씩 보려구 했더만.

신기하게도 책 보는 시간엔
멍하게 아프던 머리도 멀쩡해지는군.

 

 

밀양 어느 댁 양념딸,
박선미 샘과 그이 어머니가
자분자분 애틋하게 살아가던 이야기.

 

시골살이 이야기가 담겨 있음에도
어떤 건 도시내기인 내 어린시절 같고
또 다른 건 지금 내 사는 모습도 같고.
허나 도저히 같을 수 없는 건
글마다 넘쳐나는, 딸과 어머니 사이에 오가는
진하게 알콩달콩한 사랑 나눔.
난 울 엄마랑 살갑게 지내본 적이
아무리 생각해도 잘 없기에.

 

너그럽고 넉넉하고 속 깊은 엄마,
연한 배 같고 입 속 쌔처럼
얌전하고 착하고 예쁘던 양념딸.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와 몸짓에
마구 빨려들어간다.

 

*
“내한테는 너거들이 하늘이나 똑같다.
너거 입에 들어간 기 바로 하늘로 간 거다.”
장독 뚜껑을 닦으면서 덤덤하게 던지는 엄마 말에
얼마나 설레던지. 온몸이 둥실둥실
하늘을 나는 듯 들렁들렁.
시키지도 않은 걸레질을 하며 내내 흥얼흥얼거렸다.
“명태가 하늘로 날아갔대요오오오,
우리 입으로 다아 다아 들어갔대요오오오.”

*
쉬어 빠진 국수도 버리지 못하고 찬물에 헹궈 드시던 엄마가 하시던 그 말이 귓가에 울려서.
“누가 밥을 맛으로 묵나?”

*
“엄마, 인덕이 뭔데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핸 만치 본치가 있으마
 된다. 이짝이 생각해 주는 거만치 저짝도 내를
 서운키 안 하고, 쪼께이라도 이짝을 생각해 주면
 그런 기 인덕 있는 거 아이겠나?”

 

사랑과 믿음과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엄마와 딸.
부러움 가득 안고 두 사람 사이를 어정쩡하게
오가던 나는 책 속에 조금씩 스며들어
곳곳에 숨어 있는 울 엄마를 만난다.
선미샘 마음 따라 내 마음도 촉촉하게 흐른다.

 

*
엄마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 한쪽도 떨어져
나가고 없는 것만 같고, 물렁 다리를 걷는 것처럼
발 아래가 울렁불렁해서 어떻게 집까지
걸었는지도 몰라.

*
‘일도 없다니, 하루에도 열댓 장씩 벗어 내는
 오줌 바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홑청 벗겨 빨아
 요 이불 꾸미는 일은? 그것만 하나. 오 분을
 못 넘기고 불러 대는 그 잔손거리는?’
입 밖으로 차마 내지 못하고 꺽 삼킨다. 그걸 뻔히
알면서 한 달이나 집을 등지고 살던 년은 누구더냐.

*
포슬포슬 보드라운 미영이 코끝을 살살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두부 덩어리가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책장을 넘기며,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아릿함에 같이 젖고.
책장을 거두며, 뜨거운 두부가 넘어갈 때처럼 애잔한 그 무엇이 울컥 올라와
끝내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흐른다.
슬퍼서가 아니라 따뜻해서 번지는
청주처럼 맑은 눈물.

 

보통 엄마가 나오는 이야기는
엄마를 버얼써 하늘로 보낸
나 같은 늙은고아한텐 쥐약인데.
이 책은 서럽지 않게 아프지 않게 나를 울린다.
그리고 보듬는다.
울 엄마도 나도 괜찮노라고.

 

*
“야야! 선하기 살면 선하게 풀리고
 악하기 살면 악하기 풀린다 안 카더나.
 엄마는 이래 고달파도 나중은 좋을 끼다
 싶으니 견디고 산다.”

“너거들 잘 커서 넘한테 욕 안 듣고 살면
 그기 내한테 사는 힘이다.”

선미샘 어무이 말씀이 귓전에 계속 맴돈다.
꼭 하늘에 있는 울 엄마 목소리만 같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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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 광대
권리 지음 / 산지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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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뇌구조가 궁금해지는 책
권리 소설집 <폭식 광대>, 기이하고 신비롭고 재미나다

 

소설가 이름도, 제목도 참 독특한 책을 만났다. 권리 소설집 <폭식 광대>. 작고 얇아서 금방 읽었는데 마음에 뭔가 ‘툭’ 하고 던지는 힘은 은근히 강하다. 그래서일까, 소설에 관해 잘 모르면서도 나에겐 낯선 표현, ‘이거, 문제적 소설 같아’ 하는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시작부터 하도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람에.

 

오늘날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영감님이 오셨다.”(9쪽)

 

책 맨 앞에 나오는 ‘광인을 위한 해학곡’의 첫 문장이다. 갑자기 웬 영감님?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궁금증 잔뜩 안고 죽 읽어 보니 영감님이라 함은 예술로 세상을 연출하고 싶었다던, 독특하고 기이하다 못해 광인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 ‘장곡도’를 이르는 말이었다. 어디 주인공만 그런가? 글 흐름도 완전 독특하고 기이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장곡도 자신도 풀지 못한 삶의 미스터리를 우리가 풀 수 있을까? (장곡도가 남긴) 이 시가 미스터리를 푸는 일말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여러분의 뇌와 심장의 활동에 달려 있다. (52쪽)

 

글 끝자락에서 만난, 독자까지 글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이런 문장, 낯설다. 하지만 흥미롭다. 저 글 바로 밑에 이어진 장곡도의 다음 시 또한.

 

건방진 소녀소년이 될 준비를 하라.
불편한 장난을 감수하라.
충격에 민감하라.
성스러운 기침을 하라.
당신은 행복하다.
코미디가 분노를 만나 냉소가 된 사회를 살고 있으니
현대에는 광인의 눈이 더 정확하다.
비광인은 2개의 눈을 갖고 있으나, 광인은 7개의 눈을 갖고 있다.
유희의 눈, 무질서의 눈, 악의 눈, 주의산만의 눈,
불일치의 눈, 거절의 눈 그리고 텅 빈 눈이다.
인간이여, 텅 빈 눈을 가져라!

 

‘비광인’보다 ‘광인’이 훨씬 멋지게 느껴지게 만드는 시. ‘광인’처럼 7개의 눈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나는 시. 장곡도의 미스터리는 작가의 미스터리이기도 했을까? 그렇다면 작가도 광인의 눈을? 이해가 될 듯 안 될 듯 아리송한데도 빨려 들어가듯 ‘광인을 위한 해학곡’을 보고 나니 작가의 다음 미스테리가 막 궁금해진다. 냅다 나머지 소설들로 달려 보기.

 

소설 ‘해파리’는 동물 해파리가 주인공인 듯 비치지만 실은 외국인 노동자들 삶을 그려내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홀로 짐작해 보고. 도심 속 어느 외딴 마을이 야금야금 땅속 구멍으로 사라져 버리는 내용인 ‘구멍’은 강남 어느 부촌과 그 옆에 딸린(?) 판자촌을 생각나게 한다. 주제는 이렇듯 ‘사회의식’이 뚜렷해 보이는데, 글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마치 SF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소설에는 이상하게도 자꾸 빠져든다. 거참, 기이한 일.

 

드디어 마지막 소설, 책 제목이기도 한 ‘폭식광대.’ 인류 최대의 식성을 자랑했던 한 남자의 일대기라는데. 처음 읽었을 때 하도 괴기스럽고 이상하고 좀 무섭기도 해서 내용이 잘 스며들지 않았다. 두 번째로 보고 나니, 뭔가 느낌이 온다. ‘광인을 위한 해학곡’에서 작가가 ‘광인의 시’를 빗대어 괴기한 이 시대에, 이 시대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소설에서 비로소 찾은 기분마저 들었다.

 

“세상에는 저를 우스꽝스럽게 보는 시선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통해 자신들의 내면의 악마를 마주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음식을 먹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 즉 자신의 탐욕스러움, 사회에 대한 불복종, 무조건적인 의지 등과 같은 추한 기분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연극적이고 악마적인 행위를 보이게 함으로써 저는 잠시 잠깐이나마 그런 고민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죠. 사람들은 저를 보고 죄책감을 건너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저는 이 행위를 하고 있음을 남에게 알림으로써, 이 행위 자체의 부도덕함, 부조리, 비인간성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남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등 뒤에서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먹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일 제가 먹는 것을 거부하여, 이것이 이러저러한 형태로 배설된다면 아주 무서운 효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 저는 이를 막기 위해 기꺼이 여러분을 위한 탐욕의 악마가 되겠습니다. 저의 희생이 여러분의 행복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150~151쪽)

 

 

사실 책을 읽는 내내, 현실과 상상을 마구 넘나드는 기이한 이야기들 때문인지 작가의 정신세계가 많이 궁금하던 차였다. 나와는 다른 세상을 마음속보다는 머릿속에 지닌, ‘사차원’스런 뇌구조를 가졌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폭식광대’의 주인공 남자가 폭식 대회를 앞두고 길게 남긴 저 말을 보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소설의 형식은 독특하되 생각만큼은 낮은 곳, 아픈 데로 향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솔솔 생겨났다. 아니나 다를까.

 

1. 13년
첫 번째 단편집이다. 나무늘보처럼 게으르면서도 집요하게 13년간 꿈틀댔다.
‘어려운 일은 쉬울 때 하라.’
이것은 내 좌우명이자, 이 책이 빛을 보기까지 13년이나 걸려야 했던 이유이다.

 

2. ‘여기 사람이 있어요.’
재개발 아파트 건설로 인해 터전을 빼앗긴 어느 소시민의 인터뷰 한마디가 <폭식 광대>를 탄생시켰다. (‘작가의 말’에서)

 

책 끝에 짧게 나오는, 작가의 말 1번과 2번을 연이어 보면서 그냥 좀 기뻤다. 내 생각이 조금은 들어맞은 듯해서. 그래도 여전히 신기하다. 주제의식은 자못 심각한데 소설 전개는 어쩌면 이리도 (어둡긴 하나) 판타스틱 분위기로 끌어냈을까나. 작가의 뇌구조가, 아니 예술세계가 다시금, 아주 많이 궁금해진다. 소설집을 다시금 주르륵 훑다가 내 마음과 꼭 닮은 문장을 찾았다!
 
사람들은 장곡도를 보면 궁금해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창조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가? 과연 저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영감은 무엇일까? (11쪽)

 

재밌다고만 말하고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웠던 권리 소설집 <폭식광대>.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 있을 저 문장을, 짧은 단편집 하나로 ‘문제적 소설’이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말을 저절로 이끌어낸 작가한테 고대로 돌려주고프다.

 

‘권리 씨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영감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특별한 소설 세계로 안내해 준 기이하게 재미난 글과 작가를 만난 기념으로, 새로운 의식 하나를 삶에 보태 볼까나.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면 광인 장곡도를 생각하며 “영감님이 오셨다!” 하고 외치기. 이 생각도 꽤 좋은 것 같으네. 아마 지금 나에게 영감님이 오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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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어장 가는 길 - 미시적微視的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
최희철 지음 / 해피북미디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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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펼쳐지는 특별하고 숭고한 노동 이야기

 

바다를 좋아한다. 바다만 보면, 기다리는 일도 사람도 없다면, 몇 시간이고 그대로 바다만 본다. 엄마 아빠 두 분 다 나고 자란 곳이 제주. 내가 바다를 사무치는 듯 좋아하는 건, 돌아가신 부모님의 내력이 내 안에서 꿈틀대기 때문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사는 곳은 작은 산골마을. 귀촌하기 전에는 훌쩍 바다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건만 산골 살면서는 언감생심 바다 구경할 짬을 잘 내지 못한다. 물고기를 비롯한 바다 음식들도 냉동으로만 가끔 만날 뿐.

 

산골 살이 4년째, 눈으로도 입으로도 바다와 조금씩 멀어져 가던 차에 ‘글자’로 바다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주 멀고 먼 바다 이야기, 원양어선 선원들의 삶을 기록한 《북양어장 가는 길》 덕분에.       

 

“원양어업이란 ‘도전이나 개척’이라기보다는 이미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게 우리 삶을 기대려 했던 방식 혹은 시도였다.”(17쪽)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를 보면서 고사리며 취나물이며 저절로 자란 것들을 채취하는 산살림이랑 스르륵 겹친다. 양식이 아닌 원양어업은 바다에 살고 있는 것들을 ‘거저’ 담아오는 일.  산에 있는 풀이며 열매들을 ‘허락 없이’ 가져오는 산살림랑 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몸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접속하여 주름을 펴는 일이다. 무두질처럼, 살아왔던 시간을 보드랍고 말랑말랑하게 하는 것이다. 주름 속에서 새로운 바다를 읽어낼 수 있었다.”(6쪽)

 

글쓴이가 몸의 기억들로 써내려 간 바다 이야기. 머나먼 바다에서 파도와 어둠과 눈보라와 안개와 싸우고, 잠을 허락하지 않는 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때로는 생명이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만나야 했던 그 시간들이 애틋하고 처절하다. 그물과 벌이는 사투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 착각이 들 정도.

 

그동안 쉽게 입으로 가져갔던 바다 속 먹을거리들이 이다지도 힘든 시간들을 지나와야 했다니, 조금 아프다. 원양어선을 타는 선원들의 삶, 가까운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의 삶과는 뭔가 많이 다르겠구나. 아무 때고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는 망망대해라는 것만으로도.

 

바다살림을 산살림과 견주었던 건 아무래도 알맞지 않은 듯하다. 산은 언제든 내려갈 수 있는 곳. 허나 머나먼 바다는 그럴 수가 없다. 육지에 닿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바다 위에서 오로지 바다만 바라보며 펼쳐지는 노동. 다른 무엇과 견주기 어려워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삶일지라도 참 특별하고 숭고한 일로 다가온다. 바다를 몸과 마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일이다. 바다 위 노동이란, 삶이란. 

 

‘배’라는 닫힌 공간에서 긴 시간 지내야 하는 선원들. 저절로 그네들만이 누릴 수 있는 놀이들도 생겨난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훌라, 윷놀이 들은 기본이고 거북이나 가재 같은 것으로 박제를 만들기도 한다고. 배 만들기가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는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배’ 안에서 작은 ‘모형 배’를 만들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마음에 와 닿는다.

 

웬만한 일터에서 잘 빠지지 않는 ‘술’ 이야기도 여지없이 나온다. 배에 실린 술은 한정돼 있을 테니 그 술에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조리실에서 술김에 칼싸움이 벌어진 날, 배에 있는 모든 술을 바다에 던져야 했던 날, 그런 지시를 내렸을 때 선장의 마음은 얼마나 아렸을 것이며,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던 선원들은 또 얼마나 애가 탔을꼬. 읽는 내가 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겠더라는. 다행인 건 그렇게 버린 술이 다른 배의 그물에 걸려들었다는 사실. 소주를 건져 올린 그 배의 선원들은 바다가 준 선물인 줄만 알고 정말 맛나게 먹었다는 뒷이야기가 이어질 때 짜릿한 해피엔딩 소설을 보는 것처럼 행복했다는 말씀.

 

“‘미시적 사건으로서의 1986~1990년 북태평양어장’이란 당시 겪었던 구체적인 사건들의 ‘자세히 보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없었거나 말하지 못했던 것들의 숨은 의미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머리말에서)

 

‘몸의 기억’을 ‘글자의 기록’으로 남겨 준 책 덕분에 바다 위 삶과 노동을 구체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특별한 삶을 만났으니 그 시간은 나에게도 특별하게 남을 터.

어릴 때 부모님 따라 제주도에 가면서 배를 더러 타곤 했다. 대여섯 시간 가까이 배 멀미로 뒹굴다 갑판 위에 올랐을 때, 저 멀리 희끄무레한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을 보면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배와 육지를 잇는 흔들다리를 건널 때는 짧은 거리가 한 없이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리 밑에 출렁이는 시커먼 바다에 빠질 것만 같아 두렵기도 했고.
 
식구들과 함께 반나절 배 위에 있으면서도 그렇게 육지를 그리워했건만. 수십 일 때로는 몇 달 넘게 바다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던 마음은 얼마나 지극할까. 지극한 그 마음을 누르고 누르면서 바다 위 삶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께 존경스러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가만 있자…. 밥을 먹을 때면 쌀이 나오기까지 땀 흘리며 애쓴 농부님들께 고마워하자는 말을 많이들 하잖아? 헌데 물고기를 먹을 때 바다에서 고생하는 어부님들을 생각하자는 말은 잘 못 들어 본 것 같다. ‘땅 농사’도 ‘바다 농사’도, 모두 우리네 먹을거리를 받쳐 주는 소중한 노동인데 말이지. 지금부터, 나부터, 바다 먹을거리들 마주할 때 바다살림에 힘쓰는 많은 노동자들을 떠올려 봐야겠다. 집에 있는 바다 음식이라곤 멸치랑 참치 캔 정도지만, 다시 멸치 우릴 때도 참치 캔 딸 때도 원양어선에 타고 있을 선원들을 한 번씩 생각해 보자꾸나. 당신들의 특별한 노동과 희생 덕분에 바다 내음 가득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으니 참말로 고맙고 고맙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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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눈 - 2013년 제28회 만해문학상 수상작, 2013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조갑상 지음 / 산지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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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끝이 없는 시작이 어디 있으랴..

순간으로 시대를 담는 소설의 세계"

 

한 사람이 쓴 소설을 연이어 읽었다.
<테하차피의 달>로 담백한 소설 맛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조갑상 소설가의 <다시 시작하는 끝>과 <밤의 눈>.

 

 

단편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은 작가의 첫 창작집이란다.
1990년에 나왔다 절판된 것을 몇 년 전 다시 펴냈다고.
1980년 등단해서 십 년 가까이 쓴 글을 모았으니
뜨거운 80년대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맛볼 수 있겠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는데.

 

“그의 소설은 (…) 노골적인 정치의 이념과 구호를
생경하게 발설했던 당시의 언어들에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에 대해 쉽게 발설하지 않고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을 탐색했다. 그 탐색의 진정성은,
설명해대지 않고 담담히 보여주기만 하는
그의 남다른 소설적 문법이 담보하고 있다.”

 
책 뒤에 실린 전성욱 문학평론가의 해설에 나오듯
아픈 시대를 오롯이 담기보다는 시절을 살짝 비껴가듯,
꾸역꾸역 조심조심 살아가는 소시민, 중산층의 삶이
책 전편에 덤덤하고 묵직하게 흐른다.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평범한 듯 사실감 있게 다가오는
한 사람, 두 사람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간도 충분히 좋았다.
짧은 글마다 그윽한 울림이 퍼져 나와
내 마음에 잔잔한 물결도 쏠쏠하게 남겼고.

 

“저 창호지의 두께보다도 내 신변의 안전은 두터운가”


“김 생원은 책을 밀쳐놓는다. 눈이 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글에 뜻이 없다기보다는 글 속에 뜻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시절이 바람 같아 책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생각과 태도만은 비탈길 내려갈 때 딛는 발자국같이
조심스럽고 단단하기만 하다.” (223~224쪽)

 

소설이라 하면 아름다운 문장, 기억하고 싶은 글자들
여럿 만날 법도 한데, 이 책은 밑줄 잘 긋는 나에게
위에 옮겨 적은 딱 네 군데만 연필을 들게 했다.
미사여구 없는 담백한 문체. 그 덕에 제법 두꺼운 이 책에
질리지 않고 계속 빠져들 수 있었던 걸까.

 

‘순간으로 시대를 담는 조갑상 소설세계의 원점’

 

표4에 나온 책 소개글이 눈에 확 들어온다.
책 속 이야기들은 거의가 어느 한 날, 또는 며칠 정도쯤 되는
짧은 시간을 그렸다. 그럼에도 오래, 깊이 생각하게 만들곤 했다.
꼭 긴 소설 한 편 보고난 뒤처럼.
왜 그럴까 슬쩍 궁금했는데,
위 글귀에서 그 답을 작게나마 찾은 것 같다.

 

<다시 시작하는 끝>에서 유일하게(?)
시대의 아픔을 대놓고 드러낸 소설이 있다.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사라진 하늘’이 그것.

 

뭔가 더 말할 듯 말 듯 아스라이 끝난 이 소설이
나를 <밤의 눈>으로 이끈 것도 같다.
‘민간인 학살과 보도연맹의 비극’이라고
책표지에 또렷하게 밝힌 바로 이 소설로.

 

 

담담하게 이어지는 무채색 문장은 여전하나
소재가 워낙 굵직한지라 긴박하고 긴장감이 넘친다.
눈과 마음 질끈 감고 읽게 되는 장면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순간도 많았다. 

 

“한용범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달을 보았다. 밤의 눈.
허벅지인지 옆구리인지가 뜨끔하다 싶더니 앞사람들이
벼 가마니 쓰러지듯 풀썩 몸을 덮었다.
그는 달이 공포가 밤의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음을
의식을 놓기 직전에야 알았다.” (149쪽)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 그걸 운명이라고 이름 짓고 말기에는
죽은 자들이 너무나 억울했다. 그는 살아 있는 자신이
죽은 자들을 위한 몸이었으면 싶었다.” (283쪽)

 

‘견디고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견디며 기다리는 그 자체도 희망일 것이었다.’(357쪽)

 

‘끝이 없는 시작이 어디 있으랴. 몸을 부지하고
세월을 버티지 않는다는 건 죄였다.’ (363쪽)

 

세상일에 두루 아는 게 적다 보니
보도연맹과 이어진 사건들은 사실 잘 모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이런 소설을 본 것인지,
이 책이 유독 서글프고 억울한 이야기를 담은 것인지.
보는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아픈데도,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늦은 밤인데도 책을 놓지 못했다.

 

‘참으로 십수 년 만에 느껴 보는 자유였다.
자신의 온몸이 자유롭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한번 시작된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 회한이어서는 안 된다. 내일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어야 했다.
(…) 무한한 건 인간에 대한 신뢰, 자신이 사는 이 세상과
내일에 대한 믿음이었다.’ (379쪽)

 

손에 든 지 거의 하루 만에 책을 다 읽으면서,
책의 마지막에 다다르면서,
주인공 옥구열 따라 나도 어느새 울고 있었다.

 

사는 목적을 돌에 새겨 놓듯 유별나게 새기고
사는 것 같아 몸도 맘도 되고 되다는, 옥구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싶다는
그 마땅한 바람이 죄가 되어,
글로만 봐도 치가 떨리는 모진 삶을 지나온 그이.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할 말을 하는
그저 한 사람 국민으로 살고 싶다던 옥구열의 독백은, 눈물은
내 마음을 적시고 또 적셨다.  
 
‘망자가 산 사람을 만나게 하다 1972/ 그해 여름 1950/
유족회 1960/ 표적 1961~1968/ 긴 하루 1972/ 밤하늘에 새기다 1979’

 

이 글의 목차다. 지난 시간을 불러내는 첫 장을 빼고는
1950년부터 시간 순으로 이어진다.
해방 뒤 펼쳐진 우리 현대사 30년에서
보도연맹, 그리고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얼룩진 아픔들이
뭉텅뭉텅 묻어나는 이 소설.  

 

그러고 보니, 어제가 4월 3일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벌어진 대학살. 4.3항쟁의 그날.

엄마 아빠 모두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분들인데.
혼인도 제주도에서 하셨고. 아빠는 37년생, 엄마는 44년생.
두 분 살아계실 땐 아쉽게도 4.3에 대한 이야기 한번
물어보지 못했다. 얽힌 이야기들이 분명 많았을 터인데. 

 

하긴 어디 4.3뿐이랴.
되새기고 곱씹고 바로잡고자 애써야 할 역사가 너무나 많다.
하물며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일들이, 아픈 역사가 자꾸만 생겨나고 있으니.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내 손에 갇혀 있었다.
이제 그들은 소설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나 세상과 만난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독자들을 많이 만나
위로받고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_작가의 말에서 

 

다 진짜는 아니지만 모두 다 거짓말도 아닌,
어쩌면 실화가 훨씬 더 소설 같을 수 있는,
창작과 실화를 넘나드는 조갑상의 소설 덕분에
오랜만에 책으로 지난 세상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책 한 권 읽었다고,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위로할 자격이
냉큼 주어지는 건 아닐 테지.
그저 아프게 하늘로 간 이들도, 아프게 남아 있는 이들도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정도,
할 수 있으려나, 해도 되려나.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상식과 정의, 인권과 복지를 말하려면
먼저 이 소설부터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부끄럽고 고통스럽지만, 다시는 이런 야만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결코 덮어선 안 될 진실이기 때문이다.”
_김주완(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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