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박완서 선생님의 타계 10주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출판계는 추모라는 이름으로 선생님의 작품을 리커버하는 등 자본의 방식에 최적화된 추모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듯 하다. 그런 인연으로 내 인생에서 소중한 작가로 남을만한 선생님의 글을 만나게 되었으니 자본의 추모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본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알릴레오북스에서 <엄마의 말뚝>을 다루었고, 역시나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님도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리커버판의 추천사를 쓰고 인스타 독서회를 한다고 하니, 자본에 의한 추모가 아닌 사람에 의한 추모로 선생님의 작품을 접할 수 있어 좀 더 의미 있지 않는가 하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시민 작가님의 권유로 시작된 나의 선생님 작품 읽기는 <엄마의 말뚝>를 필두, 유작 등을 모은 <기나긴 하루>,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정도에 머물러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만,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크게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 시절의 아픔을 그려낸 전쟁문학, 이후 전쟁을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의 고통을 그려내는 분단문학, 자식을 먼저 돌려새운 어머니의 처절한 아픔 등을 그려낸 모성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전쟁과 분단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인 것은 부인할 수 없을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쟁이나 분단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아프고도 서늘한 시선인 듯 하다.
그것도 역사의 어떤 부침에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로 강건하게 두발을 땅에 붙이고 격랑에 몸이 휘어져라 흔들려도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는 서릿발 강한 정신이다.
소설집 [기나긴 하루]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선생님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선생님의 인생과 작품세계가 자전적으로 잘 요약되어 있는 듯 하다.
6.25를 소재로 한 작품세계에 관해서 한정해서 본다면,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이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반전소설로 읽히길 바란다고 하면서 당신의 글쓰기는 전쟁에 대한 복수나 고발을 향한 욕망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욕망의 깊은 심연에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그 시절을 처절하게 견디어낸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증이 짙게 깔려 있는듯 하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석양을 등에지고 그림자를 밟다>중에서)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석양을 등에지고 그림자를 밟다>중에서)
선생님의 목소리로 들어보는 당신의 작품은 이념의 충돌로 인한 전쟁 때문에 너무나도 소중한 하나 하나의 우주가 무의미하게, 그것도 한 순간에 집단적으로 수많은 우주들이 소멸해 버리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고 마음에 아로새긴 아픔을 원고지에 한글자, 한글자 피눈물로 처절하게 눌러 쓴 살아남은 자의 아픔과 결기의 문학이었다.
하지만, 분단문학에 관한 선생님의 작품은 전쟁을 겪은 세대의 아픔만 기록하는데 안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후유증이 전쟁을 격지 않은 후대에 까지 연년세세 흘러내리며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쟁의 아픔이 유전하는 이야기, 이 유전이 변이를 일으켜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가치관 등이 갈등하는 이야기, 그리고 인간이 격어서도 안되고 격지도 말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제 선생님은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선각자라는 한 어른으로 자리메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편 읽지 못한 선생님의 말과 글이지만, 그중에서 아래의 <엄마의 말뚝>에 수록된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문은 아직까지 선생님의 작품이 분단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유의미한 메시지를 주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선생님의 작품을 의미깊게 독서해야 하는지를 적시해 주는 듯 한 새기고 싶은 말씀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이제는 하나의 기정사실입니다. 분단은 오래 전에 피 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되었고, 통일을 꿈꾸지 않은 지도 오래입니다. 통일이란 말은 도처에 범람하고 있습니다만 산 채로 분단된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호로서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 흘리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토막 난 채 아물어버리면 다시는 이을 수 없게 되리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문학이 구호에 봉사하느냐, 이런 숨겨진 처절한 아픔 편에 서느냐, 기로에 서 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이 부당하게 겪는 아픔과 슬픔, 몸부림, 그러면서도 결코 단념할 줄 모르는 그들의 꿈, 그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정신을 쥐어뜯어야 할 만큼, 우리를 일률적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구호의 최면술은 날로 막강해지고 있습니다."
"아물었으되 피 흘리고 있음을, 딱지 앉았으되 곪고 있음을, 잘 차려입었으되 벌거벗었음을, 춤추고 있으되 몸부림치고 있음을 보고 느끼고 말하는 게 문학의 운명적 형벌이자 자존심이라면 저도 잠시 한낱 비통한 가족사를 폭로한 것 같은 수치심에서 벗어나 제 선배 수상자들이 그랬듯이 이 상 앞에서 늠름하고자 합니다."
<제5회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중에서>
조만간 선거가 있을 예정인가 보다.
달력에 선거일자가 표시되지 않아도 수구언론과 보수정치권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북한 핵문제를 다루고 있는 걸 보면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통일이 직업인자들'의 망령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소리지르는 것을 역하게 느끼면 어김없이 선거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이 이 시대와 이 세대가 격는 사라지지도 않고 오늘날까지 지독하게 꿈틀거리는 분단의 아픔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통일이 직업인자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당신 같은 자들 떄문에 "아물었으되 피 흘리고 있는 자들, 딱지 앉았으되 곪고 있는 자들, 잘 차려입었으되 벌거벗고 있는 자들, 춤추고 있으되 몸부림치고 있는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비통한 가족사를 폭로함으로서 문학의 운명적 형벌을 기꺼이 수행하다 돌아가신 박완서라는 작가가 계셨고, 그분은 타계하셨지만 그분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서 당신같은 자들의 감언이설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