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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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의 미술 기행은 좀 독특한 일면이 있다. 그에게 그림이란 단순히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기분전환용이나 집 거실에 걸어두기 위한 장식용같은 미적 체험이 아니다. 그의 미술 기행은 고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며 그 과거의 여행길에서 그는 끊임없이 그림 속에 나타난 정치, 사회,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독자인 우리들에게 그 고통의 기억를 환기시킨다.   

그러한 그의 미술기행은 자신의 가족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씨 삼형제의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와 질끈 묶여져 있고 그 매듭이 풀릴 때까지는 무렵 19년이란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두 형이 유학생 간첩단이란 조작사건으로 옥중에서 19년을 보내는 동안, 서경식 선생의 감옥은 마음이었다. 두 형을 돌보면서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 짐작할 만한 것이 그의 그림 순례이다. 그는 80년대 초반, 그가 서양미술에 눈을 뜨면서 관심을 보인 것은 어느 한 시점에 집중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 전후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그림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시대를 순수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어느 세기나 늘상 전쟁은  있어왔다. 하지만 유럽대륙에서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살상 경험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기폭제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대량 살상무기가 나타났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남편이, 아버지가, 아들이, 형제가 죽음을 당했다. 서경식,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과 동일시하며 주목하고 선책한 것은 양대 세계대전으로 인해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하는 현실의 고통과 현실의 고통을  화가 자신의 내부에서 투영시키고 분열을 그린 추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이전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그의 관심사는 양 대전의 가해 국가인 독일 그림과 유대인 그림이었다. 그가 이 책에서 끄집어 낸 화가들은 뛰어난 색채 화가이자 나치즘의 동조자이자 나치당의 당원이었(52p)지만 예술 실천에 있어서는 나치와 전혀 무관했던 에밀 놀데, 나치에게 퇴폐미술이란 낙인 찍혀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자 극도의 피해망상으로 권총 자살한 키르히너,  추한 그림이지만 추하다라고 단정 짓거나 외면 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125p)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오토 딕스와 나치 시대에 유대인이 겪었던 사실과 치욕을 그린 펠릭스 누스바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 독일 작가들 이외에 다룬 고흐도 결국 그의그림 속에 나타난 원근법이 고흐 자신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그대도 반영하는 결과였다는 해석을 내림으로써, 서경식 선생인 다루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그의 근원적 고통과 연대하고 투영하고 있다. 결코 섣불리 볼만한, 가벼운 맘으로 건드릴 만한 만만한 미술기행이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서양미술사는 年代 별로 나타난 사조의 투쟁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진중권 교수(개인적으론 그의 다혈질 성격 참 좋아한다만)가 기술한 서양미술사에 대해 실망한 적이 있었는데, 진중권 교수는 서양미술사를 기법이나 형식의 카테고리로 묶어 서양미술사를 기술했다. 그의 그러한 시도(어찌보면 참 신선한)가 잘 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만한 실력도 없으니깐. 하지만, 서양미술사는 연대기로 기술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서양미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대별로 사조를 묶을 수 있다. 바로크시대, 로코코 시대니, 신고전주의 시대같은. 어느  한 연대의 사조가 쇠락하면, 다른 사조가 등장하는데, 그 때 우연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사조의 기법과 형식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사조의 쇠락은 또 다른 사조를 불러오면서,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이렇게 쌈박질 해대서 서양의 콘텐츠가 많아진 것일 수도. 관습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인지) 수백년 동안 서양미술사는 그렇게 변천해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20세기는 어떤 특정한 뚜렷한 사조가 없다. 왜냐하면 추상이 등장했기 때문에. 

서경식 선생의 이 책을 읽으면서, 20세기 이전에 나타난 미술 사조의 변화가 진보라는 개념과 함께한 변화가 아닌 단지 기법과 형식만 바꾼 아름다움에 대한 재창조, 재발견의 끊임없는 변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이 때의 아름다움은 추를 배제한 개념의 미다. 20세기에 들어오고 양대 대전을 겪으면서, 글이든 그림이든 문화적인 그 어떤 쟝르를 불문하고 작가들의 의식과 인식에 변화를 준 것이고, 그 인식의 변화중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쩌면, 美라는 의미 자체가 보는 아름다움이 아닌 느끼고 고통스러워하고 외면하고 싶은 추까지도 포함한,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진보시킨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서경식 선생의 이 미술 기행은 많은 생각과 또 다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고 보다 더 넓은 안목과 혜안을 가져다 주었다. 대체로 글들은 쉽게 읽힌다. 단지 그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캐치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책을 읽어야한다.  미술사나 어느 특정한 시기의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인간주의 관점에서 쓴 서경식 선생의 미술기행인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픈 책이다.   

덧 : . 이 책 읽으면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떠 올랐는데, 어렸을 때  못 생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보고 외국사람들이 아름답다(beautful, beautiful)라고 연발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외국 사람들은 눈도 없나 무슨 저런 매부리코의 여자가 이쁘다고 하는거야라고 콧방귀 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네들은 단순히 이쁜 외모에 대한 찬사가 아닌 그녀의 재능까지도 포함해서 그녀에게 아름답다라고 한 표현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정말이지 몰랐었다. 미는 단순히 겉모습만 이쁜 것이 아닌데....하지만 우린 아직도 美라는 게 이쁘다라는 개념으로 남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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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으로 실린 Life in technicolor 는 사운드만 있고 보컬은 없다. 콜플의 이 앨범 사서 첫곡인 Life in technicolor 들었을 땐, 그저 그렇는데 Life in technicolor ii 를 만들어 리로드했나보다. 보컬이 들어가니 또 새로운 맛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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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랄린 - 닐 게이먼이 어린이를 위해 쓴 공포판타지 ㅣ 고학년을 위한 생각도서관 20
닐 게이먼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노진선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5년 7월
절판


몇 년전 투니버스에서 <이누야사>란 작품을 아들애와 처음 봤을 때, 작가의 사물적 상상력에 놀랬었다. 작가는 어느 날 우연히 스쳐지나가다가 우물을 보았을 것이고 그 우물을 보면서 만약에 저 우물이 지금 이 장소가 아니고 다른 세계, 다른 시간대와 연결되었다면 어떨까,라고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이누야사>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우물이 남들에게는 일상에서 언제나 보던 사물에 지나지 않지만, 루미코에게는 우물이란 작은 사물적 상상력에서 이야기가 출발한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글쎄, 그거야 어디까지나 나의 엉뚱한 발상이여서 실상은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데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매개를 통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사물적 상상력은 루미코도 잠깐 빌려온 상상력. 시초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최초의 여자아이를 등장시켜의 저 너머 다른 세상에서 짜릿한 모험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저 너머 다른세상이라... 모리스 센닥, 자신의 삼부작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여자아이의 모험이야기를 그린 제목은 다른 세상에서의 여자아이들의 모험 이야기를 그린, 그 밖의 다른 모든 작품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문구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오즈의 마법사>,같은 저 바꺝 세상에서의 여자 아이의 모험담의 뒤를 잇는 최근의 작품중에서 읽은 책은 닐 케이먼의 <코랄린>이었다. 영화와 달리 닐 게이먼의 <코랄린>의 캐릭터은 집중적이다. 코랄린이 중심적이며 그녀 혼자 모든 역경을 극복해나가지만, 감독이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셀릭은 더욱 더 이야기는 부풀리고 캐릭터들은 화려하고 정교한, 영화의 색깔만큼이나 이쁜 해석을 선 보였다.

닐 게이먼의 사물적 상상력은 벽이었으며 벽을 통해 outside over there가 있었다. 그의 그림책에 대한 거부감과는 달리 <코랄린>은 상당히 재밌게 읽었었고, 이런 시공간을 초월한 모험담은 언제나 나에게 자극을 준다. 물론 닐은 안정적인 완결로 끝냈으며 그러한 결말은 동화에서 건드릴 수 없는 터부 아니겠는가. 영화<코랄린>은 책보다 볼거리가 많은 엔테테이먼트적인 요소가 강했다. 닐의 아이디어는 번뜩였고 셀릭은 이미지로 구체화 했다고나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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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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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목적이나 의도에서 이런 인터뷰를 시도했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 중 특히나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시도, 기록해 한권의 책으로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리뷰어의 말대로 개나 소나 별의 별 내용을 기록해 책으로 내는 일본문화와 달리 우리 나라는 기록문화가 인색하다는 점에서 이런 시도는 환영받아 마땅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 온 외국사람들은 경계선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곳에서 인종적,언어적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나라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경계선에 선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듣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수 년간 산 사람들 치고는 한국어도 빈곤하고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도 빈곤하다. 미수다만도 못한 인터뷰의 내용은 마치 우리 나라에 처음 온 사람들의 겉햝기식의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년 전에 일본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아이들과 일본 동네의 아무역에나 내려 낯선 그 동네를 몇 시간이나 서성인 적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 그 누구도 우리들을 흘금 볼 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우리도 그런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 때 동네 한바퀴를 돌고 나서의 인상을 이 책의 인터뷰이들과의 인터뷰에서 느꼈다. 인터뷰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콕 집어서 질문하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서울 영상위원회에서 해외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는 마크 시그문드정도만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고 할까. 자신의 한국에서의 생활을 자랑하는 인터뷰인지 아니면 경력을 쌓기 위한 인터뷰인지 헷갈렸다. 

좀 더 진중하고 세밀한 질문을 준비했어야하는 인터뷰어의 노력이 아쉽고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폭 넓은 외국인(심지어 마크 시그문드의 말대로 이주노동자들까지 껴안은)들을 대상으로 어떤 기준(예를 한국에 10년이상 거주, 한국어를 잘해야한다는가 배우자가 한국인이라 한국을 보는 시각이 보수적인지 아니면 진보적인가하는)을 내세워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 또한이 한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보완해서 경계선에 선 사람들의 인터뷰가 좀 더 폭 넓게 열려져 있고 기록문화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인터뷰집이 2권에서는 발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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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자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병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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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하버드는 버트 휠도블러를 교수로 초빙하였고 그는 그 초빙을 수락하였다. 에드먼드 윌슨과의 본격적인 개미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1989년 고국 독일의 바바리아의 부르츠부르 대학에서 사회성 곤충을 연구하기 위한 특별과를 창설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는 하버드를 떠나는 문제를 두고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자 우리는 개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책을 하나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의문을 던졌다. 어째서 역사상 그 누구도 개미에 관한 책을 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규모의 일이라면 굉장한 노력과 시간이 들겠지. 그러나 이 얼마나 한번 해볼만 한 일인가! 체구가 작은 세계 헤비급 권투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 한 때 비범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말한 것처럼 바로 불가능에 도전한다는 것 말이야. 결국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990년 하버드 출판부에서 나온 <개미들>이었다. 2단 조판을 하여 732쪽 에 이르는 이 책에는 수 백개의 그림과 천연색 도판, 그리고 삼천개의 문헌 소개가 들어 있다. 이 책의 무게는 대작에 대한 나의 기준을 채우고 남을 만큼 7.5파운드나 나갔으며 3층 높이의 건물에서 떨어뜨리면 사람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305~306p)  

일반인인 우리들에게는 낯설지만 세계지성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에드먼드 윌슨의 <개미들>의 탄생배경은 이렇다. 1991년 과학책으로는 다섯번째로 플리처상을 받았고 윌슨과 휠도블러에게계 최고의 개미연구의 권위자란 난공불락의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에드먼드 윌슨, 개미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그리고 환경운동가라고 그를 정의하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엄청나게 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진화생물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지적통합자 에드먼드 윌슨은 1929년 미국 앨라배마주 버킹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그 결과 그는 잠시 위탁가정에 맡겨져 있었다. 결코 유복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그의 유년시절이 그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불행한 가정에 대한 은신처는 자연이었고 바다였다. 그리고 그가 어떤 종류의 자연연구가가 될것인가에 대해 결정지은 것도 그의 유년시절이었다. 어느 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파라다이스 해변에서 피라미로 미끼를 써서 낚시를 하다가 핀피시를 낚아올렸다.  핀피시는 등지느러미를 따라 곧바르게 서는 10개의 바늘과 같은 가시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핀피시를 낚다가 그의 얼굴을 덮혀 그의 오른 쪽 눈 동공을 찔렀다. 그 사건으로 그는 오른쪽 눈 시력을 잃었으며 성장하면서 고주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력까지 문제가 생기자 시력과 청력이 나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자연연구가의 길은 곤충밖에 없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내내 주변에 살고 있는 생물과 곤충에 빠져들었고 학교 성적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였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성적은 터무니 없이 모자랐다. 후에 자연연구를 계속 하기 위하여 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학교 공부에 매진하였지만 그가 처음 지망한 명문사립대인 밴터빌트대학교의 장학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를 구해준 것은 모든 고등학생에게 개방된 앨러배마 대학이었다. 그는 앨러버마 대학에서 관찰만 했던 청소년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깊은 자연탐색은 계속 되었고 놀라운 성과(논문)을 계속해서 내었다. 그의 놀라운 자연 탐색과 결과물(논문)은 윌리엄 브라운의 도움으로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하버드의 재정적 도움으로 그는 좀 더 넓은 세계(열대지방같은)로의 탐사가 시작되었고 생물학의 기초와 사유 그리고 통합을 이루며 그의 학문적 성취도 인정되어 젊은 나이(29세)에 그는 하버드 교수의 자리까지 거머쥐게 된다. 하버드 교수 시절, 그의 자연적 관찰과 생물학적 통합은 계속 되었는데,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왓슨의 분자생물학에 의해 그의 집단 생물학은 후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왓슨과의 불편한 관계속에서, 타고난 종합가인 그는 하나의 통일적 이론을 완성하게 되는데(311p), 오랜 동안 지속된 그의 자연 탐사와 관찰 그리고 이론적 통합이 이루어 낸 책이 사회생물학이었다. 사회생물학은 인간행동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근거를 토대로 자연의 모든 생물 심지어 인간까지도 포함했기 때문에 그는 논쟁과 공격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회생물학은 자칫 우생학의 빌미를 마련해 나치와 같은 인종차별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급진적인 진보세력과 좌파 지식인들(예를 들어 스티븐 제이 굴드와 특히나 르윈틴)의 공격을 받을 정도로 그의 사회생물학은 70년대를 뒤흔든 과학책이 되었다.  

이 책은 한 명의 자연연구가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정치적이든 대중적이든 오프한 채, 한 눈 팔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길을 천천히 독자들에게 안내하는 회고담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 스며든 진솔함과 솔직함은 독자인 나에게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감동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할 정도로 울림이 컸는데, 그의 깊은 사유의 문장이 젠체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불행한 어린시절,  자연연구라는 안식처에서 시작된 그가 진화생물학이라는 자연 탐험가의 마지막 은신처(206p)에 이륙하기까지 이룩한 학문적 이론과 그 이론을 위해 수모와 논쟁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은 돌탑처럼 투박했으며 묵직하다.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인생에 성공하기 위하여 과학을 하는 사람과 과학을 하기 위해 성공적인 인생을 이끄는 사람이다. 윌슨은 후자에 속하는데, 소년 시절의 꿈이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거대한 학문적 물줄기를 지켜보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단순하면서도 사려 깊은 글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의 글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나 사물의 통찰력은 그의 자서전 곳곳에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야망과 불안으로 가득찼었고 강한 사회적 양심을 소유하지 못했다. 20년 후 구시대적인 남부는 끝났다.  인종차별을 깨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시민운동가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즉 오직 한 마음으로 도덕률에 진실하고 육체적으로 용감하며 인내하는 영웅이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유산을 이러한 면에서 충분히 새롭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나는 앨라매바를 떠났다.세상은 변했다 나도 변했다. 그러나 내가 소년 시절이나 쳥년 시절에 진보적 성향의 자유주의가였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어떤 선견지명이나 용기를 가졌던 사람도 분명히 아니다. 어쨌든 나를 과학으로 이끈 인생 궤도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연연구가의 길을 딸 이런 상활을 그래도 지나쳤으며, 이제 와서 자존심 강하고 고통받은 문화에 대해 겉만 번지르르한 사화의 말을 전할 만큼 오만하거나 위선적이고 싶지는 않다. 

 에드먼드 윌슨의 대한 나의 우연한 스침은 장대익 교수가 에드먼드 윌슨과의 인터뷰을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0622004959&Section=04 그 땐 에드먼드 윌슨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거의 없어 그의 작품을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리처드 도킨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서, 그와 이론적 궤를 같이하는 에드먼드 윌슨의 글은 좀 더 쉬울까 싶어서 찾아 읽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모두 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이론을 내 세우지만, 도킨스의 글이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도킨스의 글이 너무 어렵고 딱딱해 어떨 땐 그는 코미디프로를 보고 웃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데 반해, 윌슨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고 따스함이 풍겨 휠씬 더 접근이 용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을 이해하냐면.....큭, 전혀 아니다. 둘다 어렵긴 매 한가지다.  

하지만 난 그들이 과학의 실제적인 접근법을 이용하여 어떤 문제에 대해 추론하고 검증하고 이론을 도출시키는 것이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 더 맘에 든다. 이런 일류 지성인들의 글을 읽으면서 좌절하는 것이 있다면, 나의 지식망에 대한 헐거움일 것이다. 그들의 지식망은 너무나 탄탄하고 빽빽하고 촘촘해서 그들의 지식세계와 이론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오기로 그들에게 질질 끌려다녀도 얻은 것은 한 줌의 용어와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의 동사뿐.  그들의 전체적인 이론은 머리 속에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의 지적 세계에 앨리스처럼 뛰어들어가 모험하고 싶다. 언젠가는 나의 헐거운 지식망이 테두리에서부터 짜여져 가운데까지 촘촘하게 짤 수 있다면, 그들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싶어서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 모험심이 지식망의 올을 끊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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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지식인들이 없을까요?통섭,통섭 주장해도 무엇하나 제대로 논리적이게 그리고 재밌게 이런 세계를 못펼치네요.

1905 2010-04-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윌슨의 삶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 몰라요. 저 사람이 동물의 사회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닿지 않는 원시림을 누비면서 자신의 연구 주제에 몰두했다는 상상을 하면 짜릿해요. 전 도킨스도 좋지만 윌슨쪽에 더 정이 가요. 저 사람책은 어렵기 하지만 진짜 작가로서의 우월감이 배어있지 않더라구요. 인간적으로 정이 가요. 그의 연구가 우파논란이 있긴 책을 읽어보면 사회적인 면모는 좌파 같아요^^

scott 2010-04-2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의 집님 리뷰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윌슨이 걸어온 삶 자체가 도킨스랑 비교가 안되네요. 도킨스는 글만 딱딱하게 쓰는게 아니라 말도 그렇게 해서 적이 많아요. 그를 살린건 그의 저작물을 읽고 그의 의견에 동조해주는 독자들이 라고하더군요. 그 독자들은 도킨스를 직접 만나서 애기 해본적이 없어서 동조한다고 할정도로 도킨스는 쉽지않는 다가가기 힘든 학자래요. 그만큼 서양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학문의 세계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어요. 이들의 특징은 책만 읽고 글만 써서 발표하는 학자들이 아니라 실천하는 학자들이라는 건데 그만큼 자신이 연구한 세계를 꽤 뚫어 볼수 있는 통찰력과 설득력으로 무장하고 있죠. 우리나라처럼 붕어빵 기계로 풀빵 찍어내듯이 글쓰고 말하는 학자들이 아니라는거죠.기억의 집님ㅋㅋ 이런류의 글들 자꾸 읽게 되면 소설들 시시하게 느껴질꺼에요. ^.~

1905 2010-04-29 16:08   좋아요 0 | URL
도킨스의 이론이 뛰어난 것은 사실인 거 같아요. 그리고 상당히 자신의 이론을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고 독선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이런 사람 무섭죠.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는 카리스마가 있어 매력적이긴 해요. 저도 이런 글 한번 써 보고 싶을 정도로.
네, 맞아요. 소설이 사실 시시해요.
그래도 신간 나오면 사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