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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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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의 미술 기행은 좀 독특한 일면이 있다. 그에게 그림이란 단순히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기분전환용이나 집 거실에 걸어두기 위한 장식용같은 미적 체험이 아니다. 그의 미술 기행은 고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며 그 과거의 여행길에서 그는 끊임없이 그림 속에 나타난 정치, 사회,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독자인 우리들에게 그 고통의 기억를 환기시킨다.   

그러한 그의 미술기행은 자신의 가족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서씨 삼형제의 가족사는 우리 현대사와 질끈 묶여져 있고 그 매듭이 풀릴 때까지는 무렵 19년이란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두 형이 유학생 간첩단이란 조작사건으로 옥중에서 19년을 보내는 동안, 서경식 선생의 감옥은 마음이었다. 두 형을 돌보면서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강 짐작할 만한 것이 그의 그림 순례이다. 그는 80년대 초반, 그가 서양미술에 눈을 뜨면서 관심을 보인 것은 어느 한 시점에 집중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 전후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그림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시대를 순수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지엽적이긴 하지만, 어느 세기나 늘상 전쟁은  있어왔다. 하지만 유럽대륙에서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살상 경험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기폭제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대량 살상무기가 나타났고 그로 인해 무수히 많은 남편이, 아버지가, 아들이, 형제가 죽음을 당했다. 서경식,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과 동일시하며 주목하고 선책한 것은 양대 세계대전으로 인해 화가에게 영향을 끼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하는 현실의 고통과 현실의 고통을  화가 자신의 내부에서 투영시키고 분열을 그린 추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이전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그의 관심사는 양 대전의 가해 국가인 독일 그림과 유대인 그림이었다. 그가 이 책에서 끄집어 낸 화가들은 뛰어난 색채 화가이자 나치즘의 동조자이자 나치당의 당원이었(52p)지만 예술 실천에 있어서는 나치와 전혀 무관했던 에밀 놀데, 나치에게 퇴폐미술이란 낙인 찍혀 자신의 작품이 팔리지 않자 극도의 피해망상으로 권총 자살한 키르히너,  추한 그림이지만 추하다라고 단정 짓거나 외면 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125p)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오토 딕스와 나치 시대에 유대인이 겪었던 사실과 치욕을 그린 펠릭스 누스바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 독일 작가들 이외에 다룬 고흐도 결국 그의그림 속에 나타난 원근법이 고흐 자신의 내적 갈등과 고통을 그대도 반영하는 결과였다는 해석을 내림으로써, 서경식 선생인 다루고 있는 모든 작가들은 그의 근원적 고통과 연대하고 투영하고 있다. 결코 섣불리 볼만한, 가벼운 맘으로 건드릴 만한 만만한 미술기행이 아닌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서양미술사는 年代 별로 나타난 사조의 투쟁이었다라고 생각한다.  진중권 교수(개인적으론 그의 다혈질 성격 참 좋아한다만)가 기술한 서양미술사에 대해 실망한 적이 있었는데, 진중권 교수는 서양미술사를 기법이나 형식의 카테고리로 묶어 서양미술사를 기술했다. 그의 그러한 시도(어찌보면 참 신선한)가 잘 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럴 만한 실력도 없으니깐. 하지만, 서양미술사는 연대기로 기술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서양미술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대별로 사조를 묶을 수 있다. 바로크시대, 로코코 시대니, 신고전주의 시대같은. 어느  한 연대의 사조가 쇠락하면, 다른 사조가 등장하는데, 그 때 우연하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사조의 기법과 형식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 사조의 쇠락은 또 다른 사조를 불러오면서, 기법과 형식의 변화를 가져왔다.(이렇게 쌈박질 해대서 서양의 콘텐츠가 많아진 것일 수도. 관습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인지) 수백년 동안 서양미술사는 그렇게 변천해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20세기는 어떤 특정한 뚜렷한 사조가 없다. 왜냐하면 추상이 등장했기 때문에. 

서경식 선생의 이 책을 읽으면서, 20세기 이전에 나타난 미술 사조의 변화가 진보라는 개념과 함께한 변화가 아닌 단지 기법과 형식만 바꾼 아름다움에 대한 재창조, 재발견의 끊임없는 변화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봤다. 이 때의 아름다움은 추를 배제한 개념의 미다. 20세기에 들어오고 양대 대전을 겪으면서, 글이든 그림이든 문화적인 그 어떤 쟝르를 불문하고 작가들의 의식과 인식에 변화를 준 것이고, 그 인식의 변화중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쩌면, 美라는 의미 자체가 보는 아름다움이 아닌 느끼고 고통스러워하고 외면하고 싶은 추까지도 포함한,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진보시킨 것은 아닐까하고 말이다.  

서경식 선생의 이 미술 기행은 많은 생각과 또 다른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고 보다 더 넓은 안목과 혜안을 가져다 주었다. 대체로 글들은 쉽게 읽힌다. 단지 그가 독자에게 보여주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캐치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책을 읽어야한다.  미술사나 어느 특정한 시기의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인간주의 관점에서 쓴 서경식 선생의 미술기행인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픈 책이다.   

덧 : . 이 책 읽으면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떠 올랐는데, 어렸을 때  못 생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보고 외국사람들이 아름답다(beautful, beautiful)라고 연발했던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외국 사람들은 눈도 없나 무슨 저런 매부리코의 여자가 이쁘다고 하는거야라고 콧방귀 뀌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네들은 단순히 이쁜 외모에 대한 찬사가 아닌 그녀의 재능까지도 포함해서 그녀에게 아름답다라고 한 표현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정말이지 몰랐었다. 미는 단순히 겉모습만 이쁜 것이 아닌데....하지만 우린 아직도 美라는 게 이쁘다라는 개념으로 남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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