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 하루키가 말하는 '내가 사랑한 음악'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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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루키의 음악에세이집인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에서 다룬 뮤지션들은 시더 월튼, 브라이언 윌슨(비치스의 리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D장조 D850, 스탠 게츠, 브루스 스프링스틴, 제르킨과 루빈스타인, 윈턴 마샬리스, 스가시카오, 프랜시스 풀랑크, 우디 거스리이다. 이 전의 재즈 에세이집과는 달리 락음악에서부터 클래식까지 두루두루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뮤지션은 브라이언 윌슨과 브루스 스프링스틴이었다.

재즈라는 음악쟝르를 그닥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팝스화된 재즈가 아니라면 정통 재즈는 굳이 찾아서 듣는 편은 아니다. 재즈를 듣고 있노라면 귀가 심심하다고나 할까나. 어릴 때부터 비트가 들어간 음악에 익숙하다보니 지금도 재즈는 영 아니올시다이다. 블루스음악도 마찬가지. 하루키같은 소설가가 언급하는 재즈 매니아가 멋스러워 (한마디로 겉멋들어서)  몇 번 재즈음악 듣기를 시도는 해 봤지만, 역시나 재즈는 내  취향은 아니구나 하는, 멋적은 결론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나는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록음악에 거의 흥미를 가지지 않고 살아왔으나 ,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레코드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었다. 두장짜리 앨범인 <The river>를 자주 들었고, 거기에 수록된 <헝그리 하트>는 특히나 좋아한 노래였다.

보통 팝의 전성기가 80년대였다고들 하니 지금 생각해 보면 라디오만 틀면 거의 24시간 팝음악이 흘러나왔던 중고등학교시절 내내  내 귀는 호사의 극치였지 않았나 싶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알 게 된 것은 그의 84년도 최고 히트 앨범  <Born in the USA>를 통해서였는데, <Born in the USA>를 히트 시키고 나서 연달아 Dancing in the dark 과 Cover me 가 빌보트 차트 상위에 오르면서, 이 정도로 히트곡이 많으면 브루스의 앨범 한 장 정도는 갖고 있어도 되겠다 싶어, 그의 앨범 <Born in the USA>를 레코드가 아닌 테프로 (가격이 더 쌌다) 구입했었다. 구입 즉시, 앨범에 수록된 곡 한곡 한곡을 듣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Born in ths USA, Dacing in the dark나 Cover me 같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보다는 I'm on fire 나 downbound train 같은 씁쓸하고 아린 노래가 더 맘에 들었다.  게다가 그때가 브루스의 절정기여서  AFKN에선 그의 Born in the USA 이전의 앨범에 수록된 곡도 간간히 흘러나왔는데, 그의 The river, Hungry heart 라는 곡도 그 때 알게 되었다.  그의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음악세계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라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들면서 우리나라에서 발매된 그의 테프를 틈틈히 모으기 시작했다. 80년대 그의 정규 앨범은 우리 나라에서 발매 되지 않아서 실제 그의 <Thr river>와 <Nebraska>는 90년대 초반 CD로 구입했다.


 정작 브루스를 알게 해준 Born in the USA , Born to run 테프는 찾다가 찾다 못 찾았다. 

1949년 9월 23일 본명 Bruce Frederick Springsteen은 뉴저지주에 있는 freehold의 중산 계층이 모여 사는 공장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진정으로 음악에 눈을 뜬 것은 9살때였는데 1956년 9월 브루스는 당시 수백만의 시청자를 가졌던 에드 설리반 쇼에서 록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았던 것이다.  어린 브루스는 프레슬리에게 압도당해 어머니를 졸라 그 다음날로 기타를 샀다. 하지만 기타를 치기에는 그의 손이 작았고 정규적인 교습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던 만큼 브루스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1963년 실질적으로 18달러를 주고 자신의 첫 기타를 구입하고 사촌에게서 기타코드를 배우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샘쿡, 비틀즈, 척 베리, 팻 도미노, 롤링 스톤즈, 만 프레드만, 로이 오비슨, 그리고 모타운과 스택스 사운드의 음악을 들어면서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가는 동시에 음악활동을 반대하는 부모와 대립하며 불화를 겪었다. 클럽을 전전하거나 세션활동하는 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고, 음악 활동 초기에 그는 뉴 밥딜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그 뉴 밥 딜런이라는 칭호를 벗어던지며, 1975년 발매된 <Born to run>를 통해 노동계급의 대변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꿈과 절망, 혼란, 일상적인 일에서 오는 권태, 잃어버린 사랑과 우정, 도피, 욕망, 생존 투쟁, 장를 향한 열망등을 솔직담백하게 묘사함으로써 록이 새로운 메시아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매김하게 시작한다. 그 후 <The river>와  보컬과 기타로만 만든 <네브라스카>와 그를 슈퍼 스타로 만들어 준 <Born in the USA>를 발매하였고 지금2000년에도 여전히 그는 활발한 순회공연과 앨범을 내고 있다.

하루키가 지적하고 있듯이, 브루스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격한 소리로 질러대는, 미국애찬가쯤으로 알고 있는<Born in the USA>는 브루스가  "미국에 태어났네 라고 외칠 때 거기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분노가 있고, 희의가 있고, 슬픔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자부심보다는 미국정부에 대한 비난과 분노에 대한 그의 격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앨범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랑스러운 성조기 앞에서 오줌을 누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조기에 대한, 미국정부에 대한 경멸은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뿐인 노동자들의 삶에서 연유하고 있다.

Born in the USA

Born down in a dead man's town
The first kick I took is when I hit the ground
You end up like a dog who's been beat too much
Till you spend half your life just coverin' up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Born in the USA

Got in a little hometown jam
So they put a rifle in my hand
Sent me off to a foreign land
To go and kill the yellow man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Born in the USA

Come back home to the refinery
Hiring man says, "Son, if it was up to me!"
Went down to see my VA man
He said, "Son, you don't understand!"

I had a brother at Khe Sahn
Fightin' off them Viet Cong
They're still there
He's all gone
He had a woman he loved in Saigon
I got a picture of him in her arms now

Down in the shadows of the penitentary
Out by the gasfires of the refinery
I'm ten years burnin' down the road
Nowhere to run, ain't got nowhere to go

Born in the USA
I was born in the USA
Born in the USA
I"m a long gone daddy in the USA
Born in the USA
Born in the USA
Born in the USA

죽은 사람만 사는 듯한 마을에서 태어나 내가 최초로 한 킥은 땅을 차는 일이었지.  너무나 많이 얻어 맞았어 개처럼 인생을 끝내. 이제 인생의 반을 그것을 치유하느라 보내야 하지. 미국에서 태어나 작은 고향 마을에서 말썽에 휘말렸어. 그러자 그들은 내 손에 라이플를 주었고 그리고는 나를 외국땅으로 보냈지. 가서 황인종을 죽이라구. 미국에서 태어나 고향으로 돌아와 제련소에 들어갔어. 고용주는 말하길, 이봐 그게 만일 나한테 달렸다면'이라고. 재향군인회 사람을 보러갔지. 그는 말하길 이봐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라고. 미국에서 태어나. 나는 케산에 형이 한 명 있어. 그는 베트콩과 싸우고 있지. 베트콩들은 아직 그곳에 있는데 그는 가버리고 없어.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나는 망나니라우. 사이공에서는 그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지. 이제 내갠 그녀의 품에 있던 그의 사진 한장이 남아 있어. 교도소의 그는 아래 있다가 제련소의 가스 불길에도 내몰린채 나는이제 10년째 길거리에서 헤매고 있지 달릴 곳도 갈 곳도 없이. 미국에서 태어나(100%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슴. 특히나 첫 두문장 자신 없슴)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 간 것은 1984년 여름이었다. 당시 미국을 방문했던 이유 중 하나는 소설가 레이몬드 카버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에 도착해 공항에서 택시를 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발매된 지 얼마 안 된 LP <Born in the USA>이 거대한 광고 간판이었다. 그 광경을 지금도 뚜렷히 기억하다. 거대한 성조기와 색 바랜 청바지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진 빨간 야구 모자, 그렇다 1984년은 그야말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위한 해였다....중략.......위싱턴주 올림픽 반도에위치한 레이몬드 카버의 집 거실에서 그와 마주 않자 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문득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헝그린 하트>의 가사를 떠올리게 되엇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곡의 가사는 생각해보면 마치 카버의 소설 한 구절 같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거기에 공통되어 있는 것은 미국의 블루컬러 계급이 가지고 있는 폐쇄감이며 그로 인해 사회 전체에 야기된 "황량함"이다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은 대개 말이 없고 대변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쓸데 없이 말을 많이 하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이 살아 온 방식이다. 그들은 다지 묵묵히 일하고 묵묵히 살아왔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미국 경제의 기틀을 뒷받침해왔다. 레이몬드 카버가 이야기로서 문장에 묘사하고,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이야기로서 노래한 것은 그와 같은 미국 노동자 계급의 생활이면 심정이며 꿈이며 절망인것이다. 레이몬드 카버, 브루스 스프링스턴 그들 두 사람은 그렇게 80년대을 통해 미국의 노동자계급을 위한 소수의 귀중한 대변인 되었다.

미국 문학은 사회병폐나 부조리한 세계 또는 미쳐 가는 세계와 내면적 자아의 충돌 같은 세계는 많이 그리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들과 관련된 문학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하루키는 그와 같은 현상에 대해  " 미국의 문화나 예술이 기본적으로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한, 지적 엘리트 계층에 의해 형성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진지하게 묘사하려는 예술가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미국문학을 잘 모르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반공감이 가는 말이다.  미국 문학이 지적 놀음에 빠져 있는 사이, 스프링스틴은 80년대 노동자들의 일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The river>  

I come from down in the valley where mister when you're young
They bring you up to do like your daddy done
Me and mary we met in high school when she was just seventeen
We'd ride out of that valley down to where the fields were green

Wed go down to the river
And into the river we'd dive
Oh down to the river we'd ride

Then I got mary pregnant and man that was all she wrote
And for my nineteen birthday I got a union card and a wedding coat
We went down to the courthouse and the judge put it all to rest
No wedding day smiles no walk down the aisle
No flowers no wedding dress
That night we went down to the river
And into the river we'd dive
On down to the river we did ride

I got a job working construction for the johnstown company
But lately there aint been much work on account of the economy
Now all them things that seemed so important
Well mister they vanished right into the air
Now I just act like I dont remember, mary acts like she dont care
But I remember us riding in my brothers car
Her body tan and wet down at the reservoir
At night on them banks I'd lie awake
And pull her close just to feel each breath shed take
Now those memories come back to haunt me, they haunt me like a curse
Is a dream a lie if it dont come true
Or is it something worse that sends me
Down to the river though I know the river is dry
Down to the river, my baby and i
Oh down to the river we ride

10대 시절에 만난 메리를 임신시키고 19살 생일날에 그는 출근카드와 결혼예복을 입고 법원으로 가 서약을 한다. 결혼식날 웃는 사람은 없고 결혼 행진도 없으며 결혼식 꽃도 그리고 웨딩드레스도 없다. 핑크빛 서약이나 부푼 희망의 미래 따윈 없다. 뻔히 보이는 미래의 절망을 안고 부서진 꿈(shatted dream)을 뒤로 한채, 10대부터 노동자의 삶을 선택하고 아마도 평생 그는 노동자로서 살아 갈 것이다. 삶의 저주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월급으로 그날 그날의 삶을 선택하고 더 나아질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미래의 "황량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통 사람들처럼 스물타운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존 쿠거 멜랜켐프의 small town이란 곡에서) 스물 타운에서 태어나 자라 그 곳의 커뮤니티와 관계를 맺으며 죽는 곳. 친구들과 부모들이 살고 있으며  적은 기회와 교육 받으며 자란 스물 타운. 평범한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하지만 절반은 희망을 접고 살아야하는 것은  절망의 길(알콜 중독 같은)로 인도하는 것이리라. 그 속에서 서로의 결속은 있어도 삶이 더 나아지라는 법은 없다. 

하루키는 브루스와 레이몬드 카버를 비교하면서, 두 사람의 작품이 놀랄만큼 흡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공통되는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담긴 황량하고 통절할 정도의 리얼리티다. 스프링스틴은 노동자 계급의 젋은이들의 심정을 실로 정직히, 정말로 솔직히 묘사했다 거기에는 생생히 살아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스프링스틴은 그 이야기를 로큰롤이라는 강력한 도구에 실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루키의 글은 짧지만 정곡을 찌르는 맛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락음악 중에서 브루스만큼 노동자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그리고 씁쓸하게 묘사한 락커는 없었다. 게다가 브루스만큼 미국적인 락커도 없다. 그가 우리나라에 어필하지 못한 것은 상당히 그가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내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숀펜의 감독 데뷔작인 <하이웨이 페트롤>은 브루스의 <네브라스카>의 곡이 모티브가 되었으며 미드 콜드 케이스 3x11는 드라마 전체가 그의 곡으로 헌정되었으며 극의 모티브 또한 그의 곡 the river다. 그의 노래속에 표출되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직설적인 노랫말은 현재 우리네 월급쟁이의 보편적인 일상과 다를 바 없다. 그의 노랫말은 희망적인 메세지보다 어두운 정서가 깔려 있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치부를 노출시킨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가슴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걸려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락이라는 음악 형식이 그 껄그럽고 어두운 것을 토하게 해 준다. 알 수 없는 마력이라고나 할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문학이 고도의 지적 놀음에 빠져있는 동안 미국의 대중문화(팝음악이든지 영화라든지 아니면 드라마)가  추상성을 배제하고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금도 브루스는 미국 어디에선가 순회공연을 하면서  하루 일을 마치고 오는 관객들과 헝그리 하트나 리버를 같이 부르며 반미국을 외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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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쟁이 엄마 비룡소의 그림동화 148
유타 바우어 글.그림, 이현정 옮김 / 비룡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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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쓰러운 고백이지만 난 적어도 일주일 3~4번 정도는 하루가 저물무렵, 저녁밥을 하면서 시원한 캔맥주 한잔을 들이킨다.  벌컥벌컥 마시는 시원함과 알콜이 주는 노곤한 알딸딸함이 그날 그날 아이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어느정도 풀어주기 때문이다. 결혼 하기 전,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중노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밑빠진 독에 퍼붓는, 끝없는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24시간 365일 사적인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을 의미하고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기에서 부모와 아이의 불화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우리는 아이가 로봇처럼 움직여 주길 바란다. 시키는 대로.  하지만 하지마, 안돼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먹은 아이는 맹세컨데 없다. 그 자그마한 몸에서 표현해내는 거부의 몸짓은 투정 그 이상이다. 반항이라고는 뭣하지만 여하튼 뭐해라든가 하지마라고 하는 말들이 군대마냥 아이에게 들어먹히리라고 생각하면 오산. 뺀질뺀질거리기 시작하면서 나 보란듯이 가볍게 거역하기 시작하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히질 않는다(한마디로 막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엔 참아야지 하고 맘 먹다가 점점 신경이 거슬리는 것도 잠깐, 아이의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마침내 폭발하기에 이르른다. 폭발은 화산 폭발 저리가라다. 표정은 험해지고 말소리는 굉음에 가깝다.  펑!

아이를 키우면서 고함을 지르지 않는 부모는 없다. 적어도 부모이거나 부모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무난한 성격인 나조차 아이가 저지르는 못마땅한 행동에 분을 못 이겨 고함을 지른 적이 몇 번 있었다. 정말로 몇 번!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갖 몹쓸 말을 쏟아내면서 고함을 미친듯이 지른 적이 있었다. 난 적어도  너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러니 제발 엄마인 내가 하는 말 좀 들어달라는 애원을 고함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소리 친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엄마가 소리치기 전에 말 좀 잘 들었어야지 하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는 로봇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한 명의 살아있는 인격체라는 것을. 결국 난 아이들에게  몇 번 소리 지른 것으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소리치지는 않는다.  살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고함을 지르지 않는 이유는 딱 한가지이다. 죄.책.감.  엄마의 고함에 주눅에 든 아이를 보면서 희열을 느끼며 가정에서 우월적 위치를 재차 확인하려는 새디스트적 관계를 거부하거니와  고함 친 후, 시원하다거나 통쾌하다는 그런 느낌보다는 알 수 없이 밀려드는 죄책감으로 몇 시간이고 몸살을 앓고 나서는, 결코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나 자신의 분노를 잠재우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고함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지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유타 바우어는 자신의 <고함쟁이 엄마>라는 그림책에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엄마의 언어폭력과 고함은  아이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 신체의 일부분들은 도처에 널부러진다. 어디 몸만 상처 받았겠냐 마음은 칼로 난도질 당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도 결국에는 엄마 몫이다. 맨 마지막에  엄마펭귄은 아기 펭귄의 몸을 하나 하나 찾아 꿰매주고는 미안해라고 말한다. 아, 미안해할 짓은 하지 말자.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인 <criminal mind> 1x14 에피소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살면서 부모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재능은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재능을 학대하고 낭비하고 있다고(There is no greater gift in life that of being a parent. Yet so many of us abuse and squander that gift.) 모든 육아서적이 아이들편이듯이, 부모가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욕망보다 희생이 앞서야한다는 각오를 다져야겠다. 그나마 나에겐 시원한 맥주가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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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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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치로는 슬로 리딩이란 한권의 책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다. 책을 감상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책읽기 방법이라고 정의하면서 슬로 리딩하는 독자를 슬로 리더라고 명하고 있다.  그는 천천히 책을 읽게 되면 독자는 작자가 준비해둔 장치나 고안을 잘 찾아내면서(게다가 소설의 노이즈까지)  독서가 재미있어지며, 작품을 이해하는데 천천히 읽기만한 방법이 없다고 쓰고 있다.

얼핏 책을 천천히 읽어야 한다는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찬양은 구구절절히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난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피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의 슬로 리딩에 대한 주장은 쓰는 사람은 누구나 읽는 이들이 자신의 책을 슬로 리딩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글을 쓰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입장에서, 작가의 노고에 독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책 한권을 읽기 위하여 그는 한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볼펜을 쥐고 앉자서 교과서적인 분석을 하라고 권하고 있다. 마치 작가의 의도적 장치나 고안을 놓치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든 듯이. 물론 작가의 의도나 장치를 모르고 지나치면 독서의 효용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굳이 작가의 의도를 꼭 알아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중의 하나는 작가의 의도말고도 여러 길로 나뉘어진  다의적인 해석이라고 바르트가 말하지 않았던가. 게이치로는 오독을 인정하지만, 작가의 눈밖에 난 오독은 인정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오독은 편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오히려 게이치로의 그러한 생각이 더 편협해보인다. 맘껏 오독하라. 작품 곳곳에 깔려 있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체든 모르고 넘어가든지 간에, 작가가 왈가왈부할 것은 못 된다고 본다. 작품가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 가치보다 더 풍부한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는 독서의 양에서 질로의 전환야말로 스피드한 시대에서 썩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한 한 덕목으로 보는데..... 이거, 이거야말로 책 좋아하는 사람의 읽기 욕망과 수집 욕망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이 어째 우스운 꼴이 되버렸는데,  난 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많은 책은 그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준다고 믿고, 수 많은 책을 접하는 짜릿한 자극은 우리를 끊임없이 책으로 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재즈 뮤지션 마이스 데이비드의 예를 들면서, 마일스가 어렸을 때 단지 세 장의 레코드만을 가졌을 뿐이었다며, 그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세장의 레코드을 끊임없이 듣고 듣고 또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 마일스 데이비드가  세장이 레코드만으로 만족하지 못해 밤에는 재즈 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기 위하여 이 클럽저 클럽을 돌아다니며 클럽 난간에 앉아 (그림책 벤의 트럼펫 한 번 읽어보길), 열심히 클럽안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을 듣는 어린 소년이  떠오르고 낮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올라 긴장하며 라디오를 끼고 사는 데이비드가 떠오른다. 난 결코 마일스 데이비드가 위대한 재즈 뮤지션이 된것은 단지 세장의 레코드만을 들어서가 아니고, 그끊임없이 다른 음악을 접하기 위하여 찾아 돌아다니는 그의 음악에 대한 내재된 열망과 갈망때문이었을 것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좋아하면서 그 열정을 식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분히 바람둥이 기질을 타고 나야한다는 것이다.  요전에 읽는 책 수집가 릭 게코스키나 존 벡스터는 평생 집 안 가득 책을 들여놓는 것도 모자라  최대한 자기들이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임대해서라도 책을 보관하고 팔기도 하는 경우를 읽었는데 그들이 단지 몇 권의 책에 만족하지 못한채 자신들의 지적자극을 충동질하는 책을 찾아 헤매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물론 즐거워서겠지! 다행이 그 대상이 여자가 아닌 책이라서 다행이지.

아니 저 먼 곳의 사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젠틀 매드니스>의 공저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김연수, 박중서,표정훈은 책에 미친 사람들에 대한 책을 번역했다는 공통점 말고도 그들 모두 만권 클럽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집안에 만권의 책이 있다라고 생각해보라. 짐작컨데 집안에 단 한치의  비어있는 벽이 있을리가 없다. 책으로 도배된 벽만이 집안을 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한사람이 일년 아니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몇 권이라고 생각하나. 분명한 것은 난 그들이 단순히 읽지 않을 책을 수집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책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욕망은 책읽기와 책 수집이라는 형태가 계속 될 것이다. 그들이 책을 만권을 다 읽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수 많은 양의 책들의 그들의 지적 활동의 기반임에는 틀림없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은 박학다식한 글로 여러 군데 기고하고, 몇 권의 장편소설로 이제 프로 소설가로 자리 잡은 김연수, 밀도 있고 정확한 번역을 하는 박중서. 이들이 단지 몇 권의 책만을 읽고 분석함으로써 그런 수준 높은 글을 쓸 수나 있었겠나. 꿈깨라!

책을 왜 좋아하는지 그리고 책을 왜 읽는지에 대해 게이치로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지 몇권의 책을 분석함으로써 소설 읽는 법을 익히고 세세한 기술적 측면을 섭렵한다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긴 책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알더라도 바벨의 탑을 쌓고 싶어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독서방법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이었다.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라고 편안하게 제안하는 그의 기상천외 엽기 발랄한 독서법은 내멋대로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난 그의 독서론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한 무거움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끝까지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  명작이라고 흔히 말하는 고전들을 꼭 읽어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남으로써, 책에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의 쟝르에 더 폭 넓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책을 읽는 방법으로 이렇게 제안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 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일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 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페낙의 독서법은 어떤 책을 중간부터 읽든, 끝까지 읽지 않던, 처음과 끝만 읽던지 그리고 다른 책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소화불량과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타이틀도 내걸리지 않는 일반 독자이긴 하지만 좋은 책과 좋은 문장은 금방 알아 챈다. 그리고 끊임 없이 그 문장과 상황을 머리속에서 되내인다.  마치 알스버그의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말한 은방울소리처럼.

책을 읽는데 있어서 intensive냐 extensive냐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읽는 것이 중요하다. 건너뛰든 생략하든 재독하든지 그건 독자의 몫이다. 신경쓰지 말아라.난 한권의 책을 교과서처럼 분석하느니 소파에 편안히 앉아 수 백권의 책을 내 멋대로 읽은 것을 선택하겠다. 게이치로 당신은 소설이나 잘 써라. 좋은 글은  재독하고 재독해도 싫증이란 것을 모르고 끊임없이 읽게 마련이다. 독자가 작품의 그 어떤 subtext를 찾아내든,이제 작품은 독자의 관할권 안에 있다 이제 편히 쉬어라.  독자인 내가 해주고 말은 이거다.

ps- 19세기에 묵독의 습관은 어쩔 수 없는 소설의 탄생의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고 본다. 소설 이전의 시와 희곡은 크게 소리내서 읽기 위하여 리듬과 운율에 맞쳐진 쟝르이다.  음유시인들이 수세기동안 떠돌아 다니며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리드미컬하게 운율에 맞춰 거듭 수정하면서 세대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시와 다른 문학의 쟝르(희곡같은 것)란 구전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묵독은 몇 몇 부유한 지식인들의 전용이지 않았나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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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4-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속이 시원한 리뷰네요. :) 처음 뵙겠습니다. 자주 들를거 같아요.

기억의집 2008-04-17 15:04   좋아요 0 | URL
앗, 반갑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알라딘이 불통이다 보니 지금에서야 들어와 보니 반가운 글이 맞아주네요. 시원한 리뷰라고 하시니.... 속 좀 푸셨나요! 저도 자주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2008-04-18 0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8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코토의 푸른 하늘 - 생활 팬터지 동화 익사이팅북스 (Exciting Books) 40
후쿠다 이와오.시즈타니 모토코 지음, 김정화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나의 벽은 책으로 둘러쌓여 있고 나의 하늘은 책벽으로 둘러쌓인 딱 그만큼만 푸르르다.  나란 사람의 인간관계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부딪혀 이해하기 보다는, 책속에서 만나는, 영화속에서 만나는 가상의  사람들과 일방적인 만남과 교류에 그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는 제법 깊고 넓지만, 실제상황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읽을 책을 쌓아놓고, 다운받아 봐야할 미드와 영화가 쌓여져 있으니, 당연히 실제 사람들 만나 교류를 갖는 것이 내 사적인 시간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을 고립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고립되어 있다고는 해도 외롭지가 않다. 오히려 넘쳐나는 책이나 영화,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이 모자랄 정도이니, 고립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 않나싶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고  24시간이 후딱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동네 아줌마들에겐 싹싹하고 인사 잘하는 사람으로 통하긴 하지만 그네들의 일상과는 어울릴려고 하지는 않는다. 커피를 마시러 온다는 내 또래의 엄마에게 오지 말라고 하지는 않지만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나면 그 뿐이다.  내가 스스로 놀러간다거나 점심을 같이 먹거나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지 않으니 더 이상의 깊은 관계나 교류는 힘들다. 학교 엄마들하고는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가지 않으니 아들애 학교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단지 몇몇의 엄마들하고만 알고 지낸다. 폭 넓은 인간관계라는 말은 나에게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구나 싶다. 뭐에 대한 욕망때문이냐!  무슨 강박으로 신간이 나올 때마다 궁금증을 못 참아 질러야 하고  아침마다 미드 한편을 꼭 봐야 하는지....

일상에서 자기 만족이라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과의 무난한 교류일까. 책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 틈에 있지 않는데 무엇을 느낀들, 그냥 그건 느낀 자기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허탈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감정을 그 누군가에에 전하고 싶고 교류하고 싶어도, 좁은 인간관계속에서는 그게 잘 안되니........ 답답하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말은 터 놓아야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터놓고 말할 만한 상대가 몇이나 되는지... 혼자만의 생활 아니 가족이 같이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는 시간이 많아서, 나의 경우는 타인을 쉽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마코토의 푸른 하늘>은 나의 좁은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더듬어 생각해 준 작품이었다.

철거직전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뽀루통한  12살의 마코토는 그 아파트에 몇 남지 않는 아파트 사람들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타인에 대한 나눔, 배려 그리고 이해를 통해 그 또래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어른지향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고장안 엘리베이터에 아라키다 할아버지와 함께 갇히면서 마코토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그리고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언제나 집에서 외롭게 생활한 에리카누나까지 알게 되면서, 각자 다른 인생살이지만 서로 어울리면서 일상을 당당히 꾸려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나보다 더 마코토는 사람과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어울리는 법을 알고 있고 냉정하고 무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작가는 마코토를 통해 가치 있는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거창하게 말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간의 챙겨주는 따스함 마음, 보듬어 안아 주는 넉넉한 관계가 한아이가 올곧게 자랄 수 있는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맑고 푸른 하늘처럼 우리 마음이 펼쳐지 있다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을텐데. 영어공부 안한다고 도끼눈 할 필요도 없고.....딱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미스터리한 요소도 극적인 요소보다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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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1996년도 나오키수상작인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는 12년이 지난 2008년에 읽어도 수사물이라는 쟝르면에나 작중인물의 심리묘사에 있어서 그렇게 구닥다리 냄새가 풍기는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당시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20세기 끝무렵인 96년에 범죄소설에 오토미치 다카코라는 여형사의 활약이라는 점에서, 시대를 앞선 작품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범죄수사물에 여자가 차례차례 등장하면서(CSI가 한 몫 단단히 했지!), 범죄물에 여자수사관이라는 것이 별 거 아닌 일로 치부되고 있지만 20세기만 하더라고 여성형사라는 직함은 아무래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았나 싶다. 심지어 아가사 크리스티나 도로시 세이어즈의 여성 추리작가들조차 자신의 추리소설에 포와르니 윔지경이니 해서 남자주인공들을 형사나 탐정으로 등장시켰지 본격적으로 여자형사라는 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여자탐정은 있었지만. 애교로 미스 마플정도.

나와는 달리 꽤 규모가 큰 회사를 다녔던 언니가 언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2000년이 지나면서 확실히 대기업에서 여자건축설계사들을 자신의 회사에 보내 교섭하기 시작했다고. 여자들도 전문직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말이다. 그 말을 더듬어 생각해보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여자들의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의미도 되지만 남자들 전유물로만 알고 있던 직업도 서서히 여성들이 침입으로 단단했던 그 벽이 서서히 붕괴되는 시작한 터닝포인트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여성들의 침입이니, 붕괴니하는 말이야 쉽지, 역시 형사라는 직업의 세계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형사들조차 이미지가 떡대같이 험악하고, 깡패 같으니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가 몇 이나 될 수 있고 그 벽을 허물겠다고 덤비는 여자가 어디 그렇게 많을소냐!  

여하튼, 이 작품은 다카코라는 여성이 강력계에서 활동하는 사건파일이다. 여성이 강력계에 등장하는 초기작이라서 맹활약을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강력계에서 남자형사들이 여성형사들 대하는 기존관념이라든지 성역활의 고정관념을 어어느정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CSI의 여성수사원이나 Cold Case에서의 강력계 여형사들이 남자 수사원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사건을 진행하는 시키는 반면에, 다카코는 남성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건을 핵심으로 끌고 간다. 기존의 범죄수사물이 탐정 한 사람이 범인을 쫓는 하드 보일드형이라면, 이 작품은 한 사건에 수 많은 형사들이 공존하면서 자신의 역활을 충분히 소화해  살인 동기와 범인을 쫓는 형식이다. 다카코가 중심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가 두드러지게 핵심적인 역활을 하지 않는다고나할까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고 작가도 어느정도 그 세계를 남자의 세계로 단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재미면에서 빠지지 않고 여형사를 등장시켜 사건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내리는 것일지도. 수십권의 작품을 썼다는 노마니 아사의 미국내 첫 작품이 이 <얼어붙은 송곳니>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노마이 아사는 이 작품 말고도<Now You're One of Us>가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일본작가들의 미국진출이 두드러진다. 미유베 미야키뿐만 아니다. 히라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오가와 요코등등 심지어 가쿠다 미츠오의 <대안의 그녀>까지. 판매량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들의 출간이 미국인 번역자들에 의한 출간이라는 점에서 좀 놀라울 정도다. 많은 일본만화가 미국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심지어 쟝르소설까지 번역되어 출간된 것은 부럽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다. 

역자의 후기처럼 이 작품의 백미는 오토바이 추격씬이다. 그 씬은 상당히 남성적인데(운전하는 사람은 여자인데,남성적이라고 떠들어대니... 이거 원!), 빈 틈이 없다. 묘사나 심리전이라는 측면에서. 누구와 추격을 벌이는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어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다카코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범죄물이 여성화되는 것도 부드러워 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둘러 쌓여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한다. 우습지만, 그들세계에 홍일점으로 아니라 동화되어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참, 뭐랄까! 여자성만 가지고는 접근하기가 힘든, 여자라도 남성성이 다분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 범죄물은 역시나 남성들의 몫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나 할까. 

여성형사라는 등장 인물은 내세운 픽션적 접근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범죄물은 남성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강력계의 여성형사라는 소재는 신선선했다. 이왕 픽션적 접근이었다면, 좀 더 강하고 터프한 릴리 러쉬나 캣 밀러스타일의 여성형사 이미지였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이 작품 읽고, 그 이후 다카코가 어떤 이미지로 사건을 추적하는지 그리고 어떤 범인과 대처하는, 노나미 아사의 다카코 시리즈가 궁금해진다. 이제 시대도 변했으니 좀 더 강해졌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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