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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방망이 옛이야기 그림책 까치호랑이 2
정차준 글, 한병호 그림 / 보림 / 199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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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솔직히 단.순.히 책을 읽어주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으며 솔직히 스타이그 같은 작가는 너무 많이 읽어달라고 가져와 스타이그의 그림과 스타이그의 자만 봐도 속이 뒤집혀 진절머리가 날 때도 있다. 어제도 읽어주고 오늘 아침에도 읽어주었는데 저녁때까지 들고 오면........ 휴~~~ 고문도 그런 고문이 따로 없다. 그나마 짧은 글은 그런대로 도 닦는 기분으로 읽어줄 만한데, 글밥이 많은 책들을 시도 때도 없이 가져올 때는 거의 공포 수준에 가깝다.

아이들의 한번 삘받은 책에 대한 애정은 거의 스토커수준이어서 어디에 꽂아놔두어도 어김 없이 찾아내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지고 오며 앉은 자리에서 한번은 기본이고 내리 몇 번을 읽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흐흐흐 날 죽여라! 죽여!), 바로 그런 책들 중 하나가 바로 <도깨비방망이>이다. 이 책도 너무 읽어 달라고 해서 넌덜머리나는 책 가운데 한권인데, 옛 이야기를 우리나라 그림책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한병호씨가 그림을, 차조금씨가 글을 썼다.  

우리의 옛 이야기는 판소리와 같은 흥을 돋구는 구성진 가락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에게 읽어주기가 편한 잇점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잇점과 함께 다른 전래 동화와 달리 독특하고 재미나게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앞 표지에는 도깨비 방망이1 착한 농부가 우연히 낡은 옛집에 들어가 도깨비 방망이를 얻어 재물을 얻는 이야기가 책의 중간까지 펼쳐지고, 책을 뒷표지를 뒤집으면 착한 농부와 대비되는 욕심쟁이 농부가 도깨비들한테 당하는 도깨비방망이2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며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은 두 가지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새로운 구성적 시도에 호기심을 갖고,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 한층 더 재미를 느낀다. 여기에 가락진 퍼포먼스까지 더하면, 이 그림책은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는.


이 책의 준비물 : 어느 집이나 다 가지고 있는 플라스틱 도깨비 방망이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신문지를 둘둘 말아 방망이 모양으로 만든다. 
바로 요 대목,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는 밋밋한 대목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며  금 나와라와라~~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하고 운율을 넣어 재미나게 소리쳐 준다. (아이들 자지러지게 좋아한다^^그래서 더 이 책을 갖고 와서 읽어 달라고 하는 것일수도) 
  욕심쟁이 농부가 도깨비들한테 당하는 장면에서는------------------------------------->  


아들이 도깨비, 딸애가 심술쟁이 농부역을 맡아 역활놀이도 하기도 한다(주의 : 담요 필수 요. 이러다 나중에 대판 싸움나기도 합니다만)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글에 리듬을 타면서 흥이 나고 신이 난다. 물론 작가의 글솜씨가 한 몫 하는 것이겠지만, 어릴 때 들었던 옛 이야기의 구성진 가락이 작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리라. 주변에 있는 일상적인 장난감 도구를 이용하면 아이들하고 그림책을 보는 재미가 배가 된다. 그림책을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기도 하고 일상적인 도구를 이용해 역활놀이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름 책하는 노는 놀이 또는 소통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아이가 <도깨비방망이>를 읽어달라고 가지고 오면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라도 방망이라도 하나 만들어 금나와라와라 뚝딱!하고 방바닥을 치며 외쳐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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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 미드팬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꼭 챙겨서 보는 미드가 있다면 coldcase,ncis,criminal mind  그리고 law and order 이다. 아마도  70,80대 팝과 락을 좋아한다면, coldcase를 안 좋아할래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연히 아침방송 채널 돌리다가 드라마의 오프닝에 흐르던 낯익은 곡때문에 보게 되었는데, 콜드 케이스에 음악이 없었다면 사실 팥 없는 붕어빵만큼이나 밋밋하고 덤덤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콜드 케이스에서 나오는 음악은 무수히 많다. 내가 알기로는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Bruce Springsteen의 A man walking in line(?)이란 곡 한곡뿐이고, 그 후로는 반복해서 사용된 곡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기사 미국 메이저리그 보다보면, 광고내보기 직전에 몇 년도에 무슨 곡이 빌보지 1위 했는지에 대한 화면이 뜰 정도로 지네 대중음악을 지키려는 나라고 컨텐츠가 많은 나라이니, 곡이 없어서 반복사용하면 모를까 널린 게 음악인데 반복 사용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다.

2,3월 바빠 콜케 못 보다가 요 며칠 다운 받아서 보는데, 이번 6X18 에피소드에 나왔던 음악은 존 레논의 곡들로 드라마가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한 에피소드에 한 음악가의 곡들로 채워진 경우가 콜케에서 지금까지 네번 있었다.  채워졌다기보다는 헌사(tribute)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콜케의 에피소드 중에서 헌사된 네명의 뮤지션은 다음과 같다. 

 2 season 20 episode(2 x 20) 

 처음 데뷔했을 땐 존 쿠거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가 나중에 본명 맬랜캠프로 바꿨다. 감각적인 빠른 템포의 Hurt so good이  빅히트를 쳤을 때만해도 그저 잘 생긴 락커정도로 생각했었는데, 후에 small town 앨범으로 빌보드 1위 차지했을 때, 좀 의아하게 생각했더랬다. 그가 스몰타운 들고 나왔을 때,  내가 한참 어렸을 때라 잭앤 다이엔과 스몰타운이란 곡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의미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왜 미국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열광했는지 어느 정도 알겠다. 그가 스몰타운에서 주장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곳. 우리네 태어나 자란 고향이란 의미보다 좌절에 가까운 곳. 사실 난 미드 범죄드라마 보면서 미국이야말로 철저한 계급사회구나라고 뼈저리게 느낀다.  

 

 

 

 

 

3 x 11 episode  고등학교 때, 브루스의 born in the USA 처음 듣고 무진장 좋아했던 가수라 아는데, 11에피소드는 브루스의 음악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the river라는 곡 가사를 따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는 것도 알겠더라. 노동자를 대변하는 뮤지션, 포크너와 레이몬드 카버이후 끊긴 노동 문학의 맥을 브루스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다.(이 말은 하루키가 한 말)  남들 듀란듀란이나 꽃남가수들 좋아했던 10대후반에 난 데이잇 보위와 이 브루스를 제일 좋아했다. 한동안 브루스 앨범 모으느냐고 열 냈던 적도 있었는데....그런 그가 환갑을 넘기고 이번에 미키 루크의 주연의 <레슬러>에 음악도 맡았다. 사실 레슬러 미키루키보다 브루스의 음악때문에 보러 가고 싶은 영화였는데... 지금 상영 하는데가 없다.

3 x 14 에피소드는 컨츄리 가수 자니 캐쉬에게 헌사. 자니 캐쉬는 이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교도소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하여  그가 최초로 교도소에서 방송을 한 소재도 다른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콜케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이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소재를 주로 차용하는데, 오손 웰스가 라디오에서 웰즈의 <우주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방송해 일대 난리가 난 그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나온다. 말로 만 듣던 오손 웰즈의 그 에피소드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횐 아마 콜케가 유일할 것이다.  자니 케쉬는 컨츄리 음악이라 사실 잘 모르는 뮤지션이었는데, 미드보면서 그의 영향력을 새삼 느꼈다. 여기저기 그의 음악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는.

4,5시즌에 헌사하는 뮤지션이 없길래 이제 그런 시도 그만 두었나보다 했더니, 이번 6 x 18 에피소드는 존 레논에서 헌사했다. 존 레논은 폴 맥카트니에 대한 음악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두 명의 색깔이 전혀 다른 천재들이 한 구룹속에 속해 있다는 것은 한 천재가 다른 천재에 의해 가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폴이 반듯한 음악 천재하면 존은 반항적인 천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폴이 존보다 음악적 재능은 더 뛰어나다, 고 생각한다. 존, 미안혀!  

  

드라마의 인트로는 짧은데, 유투브에 깔린 것은 인트로부분이 상당히 길다. 콜케의 범죄성격상 과거에 일어난 일을 현재 해결하는 것이라 연쇄살인은 다루어지지 않는데, 지금까지 두번의 에피소드만 연쇄살인을 다루었다. 한번은 지금 화면에 나온 에피소드랑 두번째는 5시즌에서 road라는 에피소드에서만 연쇄살인을 다뤘다. 집에서 할일이 없으니깐 맨날 이러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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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벚꽃과 자목련이 만개하고...봄이구나 싶은 날씨도 서서히 고개를 쳐들고.....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죠. 저의 집의 봄은 야구광인 남편 덕에 꽃보다 야구가 먼저 옵니다. 지난 토요일에 야구 개막일에 우리집에서 생긴 일.

 

 노트북의 화면이 잘 안 보이죠? 무엇인고 하면.....


바로 요미우리와 히로시마(?)전을 노트북으로 보고 있는, 더블플레이를 하고 있죠. 이 와중에 수학공부에 열 올리있는 울 아들.

 
 야구광 남편을 둔 저 이렇게 매년 봄을 맞이합니다.  

이 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찍어봤어요. 연애할 때는 애아빠가 이렇게까지 야구를 좋아하는지 몰랐어요. 사실 전 야구나 축구같은 스포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완전 고문이에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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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가 영화로, 그리고 책으로 한참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그 때만 해도 난 책을 읽어주는 것도 남이 읽는 것을 듣는 것도 싫었다. 책은 속으로 읽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읽는다라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대안도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던,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가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시절이었다.  단순히 <책 읽어주는 여자>란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책을 읽어주는 직업이 있을 수 있구나라고, 웃긴다라고 생각했었다.   

결혼하고 나서 책이나 영화에 대한 관심이 무 자르듯이 뚝 끊어졌다. 아니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 때였는데도 책도 영화도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들이 흘러갔고 애가 태어나자 별일도 다 있지, 내 책들이 아닌 아이들 그림책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서점엘 가도 그림책 코너만 돌다 맘에 드는 그림책만 사들고 오고 인터넷 서점의 잇점을 알고 나선 매일 아침에 일어나 딱 한시간 동안 유아코너에 들어가 어떤 그림책들이 나왔는지 검색하고 주문하고 그리고 주문한 책 받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한 몇년동안 재생버튼 누르듯 해 왔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신간 그림책 때문인지 그 생활에 싫증도 나지 않았다.  

내가 읽어주는 책에 길들어진 아이들은 책은 엄마가 읽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 내가 영화처럼 책 읽어주는 그 여자 아니 엄마가 되다니.... 한 때 비웃었던, 웃지 못할 일이 생긴 것이다. 감정도 넣어가면서 열심히 읽어주었다. 하루에 수십권을 읽어도 힘든지 모를 정도로. 하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들과 나 사이에 틈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요 근래에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읽어주고 싶은 글이 있어 큰 애에게 읽어주겠다고 하면, 딴짓을 하곤해서 기분 상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처음엔 어리둥절해서 아이가 보내오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 벌어진 틈이 익숙하지 않아서, 간극만큼 공허감만 커져간다. 

며칠 전에만 해도 그렇다. 테지마 케이자부로오의 신간<섬수리부엉이의 호수>라는 작품에서 작가 후기가 읽어 줄 만해 읽어주려고 했더니 단번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잠깐 앉아 들어, 엄마가 빨리 읽어줄께. 이 작가가 왜 이 작품을 썼는지에 대한 글이니깐, 응! 한번만 들어달라는 엄마의 애걸을 주저없이 거절하고 다른 곳으로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에서 울렁이는 씁쓸함을 느꼈다. 왜 이런 배신감이... 시도 때도 없이 책 읽어달라고 했던 놈이..... 

나의 고향 

나는 소년 시절 대부분을 홋까이도 북쪽 끝에 있는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 곳은 집에서 백미터만 걸어가도, 커다란 가문비나무가 우거진 산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산속은 조용해서 한 그루 한 그루 나무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고독한 기분을 더욱더 강하게 자아냈지요. 밤이 되면 섬수리 부엉이가 소리도 없이 날아와서, 집 가까운데 있는 전봇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곤 했습니다. 노란 눈동자와 이러저리 잘 움직이는 머리와, 그 뒤에 펼쳐지는 넓고 반짝이는 대우주는 어린 나의 마음에 무한한 신비감을 주었습니다. 

<섬수리 부엉이의 호수>는 그 시절에 체험한 것들이 향수와 그리움으로 승화되어 만든 세계입니다. 

깊은 밤, 섬수리 붕엉이가 펼치는 생활 드라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변함없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꾸미없는 모습입니다. 나에게 섬수리 부엉이는 친구이자,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 선생님일지도 모릅니다.  - 테지마 케이자부로오 

끝내 읽어주지 못했다. 내가 테지마 케이자부로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판화로 세겨내고 있는 훗카이도오의 적막한 자연때문이었다. 그가 장면 장면에 새긴 그림이 완벽한 라인을,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진 못하겠다. 세밀하게 새겨진 세련미보다는 그의 그림에서는 약간의 서툰 형태의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의 그림에서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 장면 한장면 판화를 새길 때,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풍경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어린 독자이건 어른이건 간에 상관없이) 강렬하고 열정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의 그림책에서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적막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람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적막감이 더 부각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유년시절에서 체험한 자연의 이미지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고히 간직한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잡아낼려는 열정이 없었더라면 그의 그림 세계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기 위하여 아들애한테 읽어주고 싶었다. 작가가 그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과 원동력이 무엇인지 이 후기만큼 더 잘알 수 있는 정보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할수 없지, 머리가 커가면서 점차 멀어지는 아이의 마음을  내가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이여.     

엄혜숙씨도 본격적으로 일본그림책에 서서히 발을 들여 놓는구나 싶다. 요 몇년 심심찮게 일본그림책의 역자에 엄혜숙씨의 이름이 눈에 띈다. 작년 8월에 나온 책인데, 이번에 오픈 키드에서 행사해 오랜 만에 주문 넣고, 열린어린이책 그림책 받아보고 나서야 케이자부로의 신간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인터넷 검색이 편하고 빠르고 편하긴 한데, 단점은 글자 하나 틀려도 같은 작가로 검색이 안 된다는 것. 케이자부로오는 관심가는 일본작가라 그 때 그때 검색했었건만.....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어 인터넷 검색이 빠른건지...모든 정보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알쏭달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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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는 평생 수학과 물리를 위해 살았지만, 또한 훌륭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그 어떤 세기보다 더 혼란스럽고 말썽 많고 멋진 기술시대의 20세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많은 문학작품들을 거론하는데, 자신의 견해를 문학작품에 비유하며 아주 멋들어지게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의 독서력을 가지고 있으려면 내공이 도대체 얼마나 되야 가능하단 말인가. 평소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공학적인 의미가 강한 분야인 줄 알았는데, 물리학과 관련된 과학자들의 책을 읽을 수록 그들의 깊은, 논리적인, 과학적인, 명료한 사고에 매혹을 느끼고 빨려들어간다. 프리먼 다이슨이 이 책에서 언급한 문학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학작품에 내리는 해석은 왠만한 일류 문학 비평가 못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문학비평가들의 난해한 글보다 실제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과학기술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목이 있는데.... 

커트 보네커트는 드레스덴 공습에 대해 <제5도살장 또는 소년 십자군>이라는 책을 썼다. 나는 여러 해동안 공습에 관한 책을 쓰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보네커트가 휠씬 더 잘썼기 때문이다. 그는 공습 당시에 드레스덴에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 눈으로 보았다, 그의 책은 좋은 소설일 뿐만 아니라 진실이기도 하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유일하게 부정확 점은 그날의 살육을 일으킨 것이 영국공군이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다음 날에 와서 부서진 돌더미를 치웠을 뿐이다. 미국 사람인 보네커트는 그런 식으로 써서 이 모든 것을 영국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옳다. 이 책에서 가장 진실인 것은 부제인 "소년 십자군"이다. 보네커트는 서문에서 친구의 부인이 화를 내서 이것을 부제로 쓰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그 부인이 옳았다. 이 유혈 낭자한 아수라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소년 십자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폭격 사령부는 어떤 미친 사회학자가 과학과 기술의 사악한 측면을 최대한 명료하게 보여 주려고 만든 견본일지도 모르겠다. 랭커스터 폭격기는 그 자체로는 훌륭한 비행기계였지만,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소년들에게는 죽음의 덫일뿐이었다. 거대한 조직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헌신했고, 이 조직은 그 일 자체를 엉망으로 실행했다. 관료주의 체계는 목적과 수단을 전혀 구별하지 못했고, 비행 횟수만 가지고 비행대의 성공을 측정했을 뿐 왜 비행했는지 따지지 않았고, 투하한 폭탄의 톤수만 따졌을 뿐 어디에 투하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악함은 전쟁이 기계화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리의 사령관은 과학 시대 이전의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사악함의 뿌리는 전략 포격이라는 정책이었고, 이 정책은 폭격 사령부가  출범하던 1936년부터 견지되어 왔다. 전략 폭격 정책은, 전쟁에 이기거나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적국의 하늘에 죽음과 파괴를 쏟아 붓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정책이 1930년대에 정치가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제 1차 세계 대전의 지긋지긋한 참호전에서 살아돌아왔기 때문에 참호전의 재현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 폭격이 참호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그들은 전력 폭격이 '억지력'으로 작용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전쟁이 나면 폭격으로 인해 자국이 무조건 폐허가 되다는 것이 명백하면 어떤 정부도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만을 본다면, 역사는 이 이론이 양쪽 모두에서 틀렸음을 증명했다. 전략 폭격은 전쟁을 억지하지도 못했고 승리를 가져다 주지도 못했다. 이제까지 전략 폭격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데도 전략 폭격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 사령부에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더 큰 나라들에서 더 큰 폭탄으로 살아남아 번식하고 있다. 

폭격 사령부는 전쟁의 역사에서 오래된 악에다가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악을 더한 것의 초창기의 예였다. 기술은 악을 익명화한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악은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되어, 그 누구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책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 랭커스터 폭격기를 타고 레이더 화면에 나타난 불분명한 반점을 향해 폭탄을 뿌리는 소년병이나,군사령부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는 작전 장교나 작전 연구부의 좁은 사무실에 앉아 확률을 계산하는 나도 개인의 책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중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50~52p) 

달턴 트럼보는 1차 세계대전은 여름 축제처럼 시작되었다. 우리들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전쟁이미지중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가 나와 퍼레이드중인 군인들을 환호하는 축제같은 장면의 한 컷이 연상될 것이다. 그렇게 축제와같이 시작된 전쟁이 수 많은 대규모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면서, 이제 전쟁은 축제가 아닌 절망과 상실의 죽음의 백파이프로 대체되었다고 <Johnny got his gun>에서 쓰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몇 번의 커다란 전쟁을 겪었고 이제 우리는 전쟁은 사내들의 분출구같은 게임이 아닌 대량살육의 장이라고 알고 있다. 수 많은 작가들이 전쟁의 살육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다아슨처럼 왜 그런 대량살육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략폭격이 한 나라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아슨의 말대로 전쟁기술이 익명화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비행기안에서, 연구실안에서, 군 사령부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드레스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참함과 울부짖음, 상실과 절망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추상적으로 머릿 속에서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그려지고 움직여졌을 뿐이고 가축처럼 도살되어 마땅한 대상일 뿐이다.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만 누르고도 간단히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구역질나고 피비린내나는 현실은 사라지고 흥분과 승리의 아드레날린만 쏟게 하는 요즘 아이들의 게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전쟁의 현실은 사라지고 가짜 이미지만 득실한, 살인에 대한 죄책감조차 마비시킨 것은 기술의 익명이야말로 20세기가 우리에게 선사한 최악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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