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먼 다이슨는 평생 수학과 물리를 위해 살았지만, 또한 훌륭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그 어떤 세기보다 더 혼란스럽고 말썽 많고 멋진 기술시대의 20세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많은 문학작품들을 거론하는데, 자신의 견해를 문학작품에 비유하며 아주 멋들어지게 설명하고 있다. 이 정도의 독서력을 가지고 있으려면 내공이 도대체 얼마나 되야 가능하단 말인가. 평소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공학적인 의미가 강한 분야인 줄 알았는데, 물리학과 관련된 과학자들의 책을 읽을 수록 그들의 깊은, 논리적인, 과학적인, 명료한 사고에 매혹을 느끼고 빨려들어간다. 프리먼 다이슨이 이 책에서 언급한 문학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학작품에 내리는 해석은 왠만한 일류 문학 비평가 못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문학비평가들의 난해한 글보다 실제적으로 접근한다. 그가 과학기술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목이 있는데....
커트 보네커트는 드레스덴 공습에 대해 <제5도살장 또는 소년 십자군>이라는 책을 썼다. 나는 여러 해동안 공습에 관한 책을 쓰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보네커트가 휠씬 더 잘썼기 때문이다. 그는 공습 당시에 드레스덴에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 눈으로 보았다, 그의 책은 좋은 소설일 뿐만 아니라 진실이기도 하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유일하게 부정확 점은 그날의 살육을 일으킨 것이 영국공군이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다음 날에 와서 부서진 돌더미를 치웠을 뿐이다. 미국 사람인 보네커트는 그런 식으로 써서 이 모든 것을 영국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옳다. 이 책에서 가장 진실인 것은 부제인 "소년 십자군"이다. 보네커트는 서문에서 친구의 부인이 화를 내서 이것을 부제로 쓰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그 부인이 옳았다. 이 유혈 낭자한 아수라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소년 십자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폭격 사령부는 어떤 미친 사회학자가 과학과 기술의 사악한 측면을 최대한 명료하게 보여 주려고 만든 견본일지도 모르겠다. 랭커스터 폭격기는 그 자체로는 훌륭한 비행기계였지만,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소년들에게는 죽음의 덫일뿐이었다. 거대한 조직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헌신했고, 이 조직은 그 일 자체를 엉망으로 실행했다. 관료주의 체계는 목적과 수단을 전혀 구별하지 못했고, 비행 횟수만 가지고 비행대의 성공을 측정했을 뿐 왜 비행했는지 따지지 않았고, 투하한 폭탄의 톤수만 따졌을 뿐 어디에 투하했는지는 따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악함은 전쟁이 기계화되기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리의 사령관은 과학 시대 이전의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사악함의 뿌리는 전략 포격이라는 정책이었고, 이 정책은 폭격 사령부가 출범하던 1936년부터 견지되어 왔다. 전략 폭격 정책은, 전쟁에 이기거나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적국의 하늘에 죽음과 파괴를 쏟아 붓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정책이 1930년대에 정치가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제 1차 세계 대전의 지긋지긋한 참호전에서 살아돌아왔기 때문에 참호전의 재현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 폭격이 참호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그들은 전력 폭격이 '억지력'으로 작용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전쟁이 나면 폭격으로 인해 자국이 무조건 폐허가 되다는 것이 명백하면 어떤 정부도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과의 전쟁만을 본다면, 역사는 이 이론이 양쪽 모두에서 틀렸음을 증명했다. 전략 폭격은 전쟁을 억지하지도 못했고 승리를 가져다 주지도 못했다. 이제까지 전략 폭격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해 주고 있는데도 전략 폭격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 사령부에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더 큰 나라들에서 더 큰 폭탄으로 살아남아 번식하고 있다.
폭격 사령부는 전쟁의 역사에서 오래된 악에다가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악을 더한 것의 초창기의 예였다. 기술은 악을 익명화한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악은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되어, 그 누구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책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 랭커스터 폭격기를 타고 레이더 화면에 나타난 불분명한 반점을 향해 폭탄을 뿌리는 소년병이나,군사령부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는 작전 장교나 작전 연구부의 좁은 사무실에 앉아 확률을 계산하는 나도 개인의 책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중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50~52p)
달턴 트럼보는 1차 세계대전은 여름 축제처럼 시작되었다. 우리들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전쟁이미지중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가 나와 퍼레이드중인 군인들을 환호하는 축제같은 장면의 한 컷이 연상될 것이다. 그렇게 축제와같이 시작된 전쟁이 수 많은 대규모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면서, 이제 전쟁은 축제가 아닌 절망과 상실의 죽음의 백파이프로 대체되었다고 <Johnny got his gun>에서 쓰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몇 번의 커다란 전쟁을 겪었고 이제 우리는 전쟁은 사내들의 분출구같은 게임이 아닌 대량살육의 장이라고 알고 있다. 수 많은 작가들이 전쟁의 살육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다아슨처럼 왜 그런 대량살육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략폭격이 한 나라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아슨의 말대로 전쟁기술이 익명화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비행기안에서, 연구실안에서, 군 사령부안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드레스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참함과 울부짖음, 상실과 절망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추상적으로 머릿 속에서잘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그려지고 움직여졌을 뿐이고 가축처럼 도살되어 마땅한 대상일 뿐이다.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만 누르고도 간단히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구역질나고 피비린내나는 현실은 사라지고 흥분과 승리의 아드레날린만 쏟게 하는 요즘 아이들의 게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전쟁의 현실은 사라지고 가짜 이미지만 득실한, 살인에 대한 죄책감조차 마비시킨 것은 기술의 익명이야말로 20세기가 우리에게 선사한 최악의 선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