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에 딸애랑 삼청동 갔다가 풍문여고 앞에서 찍은 플래카드이다. 한국 문학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고 한강 작가에 대해서도 몇번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내 성향의 작가가 아니여서 부커맨상인지 맨부커상인지 받을 때도, 검색할 맘조차 들지 않았다(게다가 평소 나는 맨부커상 받은 이언 맥큐언이나 줄리아 반즈같은 작가의 소설들 읽고 그닥 매력을 못 느껴서 맨부커상 수상작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때 한국소설이라면 평론가의 글까지 찾아 읽고, 조정래작가의 태백산맥을 읽으며 눈물을 주루룩 흘리던 때가 있었는데, 이십년이 지난 현재 나는 왜 한국문학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늦은 감은 있지만, 한국문학에 대한 외면 이유를 깨달은 것은, 스텔라님이 쓴 정지돈 소설의 리뷰글의 첫 문장 덕이었다. 스텔라님의 첫 문장, "지금부터 이십년전 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나왔을 때, 앞으로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이렇게 소설을 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즉 소설을 쓰기 위해 발로 뛰어 다니지 않고 그렇게 책상에 앉아 텍스트를 보고 상상력을 더해 글을 쓸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돈의 소설집을 보니 그 예견에서 한 벌 더 진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묘하게도 난 이인화의 작품을 둘러싸고 문학의 미래를 정의한 저 이유 때문에 한국소설은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머리속에서 오로지 텍스트를 짜깁기하는, 이야기나 사건의 전개가 없는, 관념적이고 머리속에서만 지지고 볶고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는 허구에 짜증이 나서 독서의 의미는 커녕 즐거움조차 찾을 수 없기에, 일본이나 서구문학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작가들이 사회 현실은 제쳐두고 자기 내면의 일어난 일이나 주변만 묘사하거나 나열하다 보니, 이게 무슨 소설인지 일기인지, 본인들은 실험적 소설 운운하는데, 현실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야기에 독자가 뭔 매력을 느낄 수 있냐 말이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독자인 우리는 이게 뭐지???하는 불만을 표출하는 사이, 작가들은 본인들의 이야기를 후장사실주의라로 정의내리고 있다. 사실주의라면 뭔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거 아닌가!
젊은 작가들이 모여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왜 나는 우리 작가들의 작품속에서 사회현실을 보기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사회현상을 가진 일본 사회파 소설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부동산 투기의 몰락을 말할 때,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소비 형태를 논할 때 미유베 미유키의 이유나 화차를 언급해야되고, 신자유주의 시대의 하류 인생의 철저한 파멸을 이야기할 때,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을 읽으며 공감해야하는가. 다른 나라의 소설나부랭이 읽으면서, 그들이 묘사하는 삶을고통스러워하며 공감하며 사회의 비리와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작품들은 미스터리 형식을 빌려오고 있고 발간된지 이 십년이 넘었어도, 소설 속 현실주의는 지금 한국에선 아직도 리얼하게 유효하다. 그 어떤 한국 작가도 자신의 작품에 저만큼이라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게 한국문학의 현실이다.
일본 작가들이 현실에 대한 순발력과 통찰력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서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시선과 참여 의지가 이야기로 구체화된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선 사회면 하단 기사로나 접할 수 있는 소재의 이슈를 그들은 집요하게 미스터리 형식으로 치환하며, 우리와 비슷한 사회의 민낯과 자화상을 과감하게 추적해 나간다.
적어도 사실주의든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했다면, 뭔가 사회적인 문제를 이야기속으로 끄집어내야하는 게 맞다. 당신네들의 잠자리 사실주의 말고. 우리 작가들이 얼마나 사회적인 문제에 둔감하고 이야기를 못 만들어내는지는, 몇 달 전에 장정일이 시사인에서한 글을 연상시킨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위안부의 강제연행에 의문을 제기한다.

<귀향>보다 일주일 앞서 <동주>가 개봉되었다. 윤동주는 왜 헌병에게 끌려간 소녀들 시를 쓰지 않았나? 시인 한용운과 이상화는 ? 소설가 채민식과 염상섭은? 작품 발표는 못 하더라도 일기나 비망록정도는 남겨 놓을 수 있지 않는가? 이광수와 서정주는 적게는 2만에서 3만명, 많게는 20만명이나 되는 조선인 처녀들이 총칼에 끌려가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친일파가 되었더란 말인가? 해방직후 아무도 이 좋은 주제와 소재를 취하지 않았던 진짜 원인은 대체 무엇일까? 나처럼 편향적이라면 더욱 외면받으리라는 것도 잘안다....한국인들은 일본을 압박하면서 책임을 묻을 수단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강제연행을 포기하지 못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박유하의 위안부 강제연행 부인에 동조하는 글이기때문에, 몇 번을 다시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이게 정말 한때 기득권에 조소를 보냈던 시를 썼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장정일이 글이 맞는가, 하고 말이다. 이 해괴망측한 글이 진실로 그가 쓴 것인가하고 되내이고 되내였다.
장정일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위안부, 식민지 시대의 독립 저항 운동, 독립군 이야기등이 넘쳐나야 하는데, 그 어떤 소설가도 위의 주제나 소재를 쓰지 않았다. 심지어 남태평양 전쟁에 끌려간 수십만명의 젊은 청년 이야기로 꾸민 소설은 아예 존재하지 않아 우리 나라에서는 위안부도, 독립운동가도, 심지어 태평양 전쟁에 끌려간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가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일기나 비망록으로 남기지 않아서. 이광수, 염상섭, 채만식, 이상, 윤동주 같은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아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아서 우리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f렸다.
나는 우리 엄마에게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가 일본놈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숨었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란 세대이다. 게다가 일본인이 아니고 일본놈이 얼마나 잔인하지,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된 증언은 어린시절 옛날 이야기마냥 들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아마 장정일이 시골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팔구십 넘는 노인분들에게 녹음 마이크 들이대고 식민지 시절 이야기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아마 한보따리 풀고도 남을 증언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소설가들이 위안부문제에 어떤 글도 남기지 않았다고 위안부 강제연행에 의문을 표한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 있지 않나. 기생치마폭에서 살던 이상이나 김동리 문학이 우리의 근대문학이라고 버젓히 교과서에 실리는 나라 아니던가. 현재 우리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작가들이나 젊은 작가들의 작품 소재는 사회 문제는 커녕 연애나 잠자리 리얼리즘이 주류가 되었다. 그들이 지금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적어도 리얼리즘을 표방할만큼의 배짱을 가진 소설가들이라면, 현실 문제에 어느 정도 직면해서 무엇이 우리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지 정도는 순수형태든 미스터리 형식이든 판타지 형식이든지 간에 자신이 생각했던 뭔가를 보여줬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 문제에 관심을이 없다보니, 그들은 자신의 작품속에 시대의 현실 전부를 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택한 시대상의 소재는 그들의 안위와 직무유기일 뿐이었다.
태평양 전쟁에 참여해서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죽은 이야기가 오십년이 넘어서 한수산 작가에 의해 나왔다. 이광수도 채만식도 염상섭도 그 어떤 소설가도 쓰지 못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칠십년 만에 이야기 형태로 나온 것이다.
진작에 나왔어야 할 이야기가 칠십년이 넘어서 이제서야 나온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늦게 그 시절를 이야기 하고 있다.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작가들이 흡수하지 못한 체, 역사를 되짚어 바로 잡으려 할 때마다 부정당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이야기와 기록이 없는 나라여서 그런가. 아니면 여전히 친일파들이 득세해서 그런가.
소설은 개인의 이야기를, 사회의 부조리를, 악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게 사실주의든 후장 사실주의든 카테고리와 상관없이. 이제 자신들의 이야기는 내려놓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너무나 지겹도록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이야기를 우리 소설가들에게 듣고 싶다.
덧: 우리문학의 덧은 고급/저급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오는 것일 것이다. 김진명같은 작가에 대한 작가론이 아직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 문학의 주제와 소재의 폭이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고 평론가들의 잣대에 젊은 작가들이 놀아난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을 무시하고 본인들이 바라보는 사회를 그렸으면 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건 평론가가 아니고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