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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책을 읽다보니 주변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과거에는 나 역시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1년에 10권이 채 되지 않는 정도의 책만 읽었는데, 대부분 밥벌이에 필요한 책이나 베스트셀러, 또는 주변 지인들이 추천하거나 선물하는 책만 읽고 말았다. 책을 본격적으로 가까이하게 된 처음 계기가 무슨 거창한 '진리'를 탐구하려 하거나 '공부'를 통해 나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우주를 이해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약 9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사업을 크게 벌였는데 5년 정도 진행하거나 손실과 부채가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 포기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동안 가까웠던 비지니스 파트너들과 크게 분쟁이 벌어졌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유흥과 오락에도 큰 취미가 없었던 내가 좌절하거나 미치지 않으면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것도 미친듯이... 그랬기 때문에 처음 고른 책도 인문학이나 경제경영 분야가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소설이었다.
1년 정도 자연과학과 소설을 중심으로 책을 읽다보니 스스로 차분해질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책 읽는 습관도 만들어져서 분야를 조금씩 넓혀갔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서평이나 독후감, 널리 인정받는 책, 존경할 만한 분들이 추천하는 책 등 자연과학과 소설 뿐 아니라 인문학, 사회과학, 경제경영 등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독서가 생활로 자리잡으면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사회나 국가 인류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등 드디어 '진리'에 대한 '공부'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고 작년 3월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후 스님의 유고집 중 <아름다운 마무리>를 읽다가 스님의 정신과 세계관이 알고 싶어졌다. 그 이후 여름부터 법정스님 유고집을 차례로 읽기 시작했고 스님의 <내가 사랑하는 책들>에 들어있는 책을 순서대로 읽기 시작하면서 내 나름대로 독서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나름 열심히 책을 읽어온 가운데 내가 깨달은 점은 아직도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과 평생에 걸쳐 '책 읽기'를 죽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달 공부모임 진행 중 한 여성 참석자로부터 소개받았다. 지난 주 공부모임 세미나 교재가 장회익 교수의 <공부의 즐거움>과 장회익, 최창덕 교수의 <이분법을 넘어서>였는데 이 책도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별도로 읽게 된 것이다.
지난 1980년 대에 한국사회에는 '전쟁같은 노동'이라는 시구와 노래가사가 있었다. 성장과 개발만을 전국가와 국민의 구호로 삼아 숫자와 규모와 덩치만 키우던 개발독재 대한민국은 1960~1980년 대에 노동자를 '노예'처럼 다루고 착취해왔던 것이다. 21세기 들어 '전쟁같은 노동일'이 한국에서 100% 사라졌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20세기 말부터 왜 우리 어린 학생들은 '전쟁같은 공부'를 하고 있는가? 성적과 시험공부에 스트레스 받은 중,고등학생들이 꾸준히 자살하는 가운데 이제는 카이스트 대학생 마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력을 일깨워주지도 않고 독서를 장려하지도 않는다. 우리 학생들은 존재의 근원이나 행복의 조건, 개인과 사회와 민족과 국가와 세계의 연관관계, 자연과 우주의 진리, 올바른 삶이나 도덕적인 삶에 대한 고민에 대해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하나? 그리고 왜 '공부'는 '학교' 다닐 때에만 하는 것이고 '졸업'하면 공부에 담을 쌓는가?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면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 대해 모두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필요하지 않은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왜 살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런 질문과 문제의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1부. [학교, 공부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다]에서 현대 국가체제의 옹호자들과 학교가 '공부'에 대해 퍼트린 거짓말을 폭로한다. 학교가 사회에 제도로써 설립된지 200년 남짓할 뿐이다.(한국의 경우 겨우 60년 정도) 그 이후 학교는 '공부'를 독점하였고 학교가 내세우는 세 가지, 즉 '공부는 때가 있다', '독서는 공부와 별개다', '창의성만 있으면 된다'가 거짓말임을 밝혀낸다.
2부. [고전에서 배우는 '미-래' 공부법]에서 파괴되고 짓밟혀진 '공부'를 제대로 일으키기 위하여 저자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자고 제안한다. 그것은 '앎의 꼬뮌'과 '암송과 구술',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이다. 암송과 구술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공부에 어떤 변화와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고전에 대한 독서가 학생들과 사람들의 삶을 풍족하게 할 것임을 알려준다.
3부.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학습하라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에서 공부를 위한 스승과 친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돈과 출세 등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은 공부가 아니며, 일상의 모든 순간을 앎의 자원으로 삼는, 삶을 위한 공부가 참다운 공부라고 말한다.
저자는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공부에 대한 편견을 깨고 공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정립해줌으로써 공부란 단순히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공부하는 것, 암송과 구술을 통해 소리로써 타인들과 공명하고 스승과 친구를 만나 함께 공부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앎의 즐거움', '배움의 열정'에서 시작된 공부의 의미를 찾고, 무엇을 배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면서 배우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 주며 함께 성장하는 공부의 목적을 알게 해줄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의 체험과 현재 운영 중인 사례를 바탕으로 이전과는 다른 공부의 의미, 실험적인 공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고전학교’를 비롯하여 ‘토요서당’, ‘일요서당’ 등의 청소년 프로그램 등 고전을 응용한 공부, 그와 함께 공부하는 사우(師友)들의 일상생활 공부를 풀어내 공부가 우리 삶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현장 또한 보여준다.
'공부'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접근법은 참신하고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저자를 통해 다시 한 번 제도교육의 문제점과 한계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향과 방법론 또한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얼마나 접근하여 실천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검증되겠지만...
저자는 현재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대학과 교실의 붕괴', 사교육의 기승, 교육당국의 무능, 학보무들의 본능, '공부'에 대한 왜곡된 사회문화의식과 현상 등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삶과 행복을 찾고 이루기 위해 학습과 공부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가능한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직접 실천하는 모습도 아름다워 보인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의무교육 제도에 의해 학교에 다닐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조건에서 저자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올바른 '공부'를 위해 제도권 밖에서 '꼬뮌'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주장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위험한' 면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위험성은 '공부 만능주의'에 가까운 공부에 대한, 독서에 대한 과도한 강조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아는 만큼 행복하다'라고 말하지만 행복에는 '많이 아는 것'만이 지름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동양이나 서양의 고전 속에는 반드시 '지행일치'에 대한 내용이 있을 것이다. 공부의 내공이 높고 '썰을 잘 푸는' 사람이 꼭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쓴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인생역전'이라는 단어는 심했다. 저자가 의도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일반 독자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는 책의 제목 - 공부의 달인 - 도 다분히 상업적으로 보인다.)
예로 부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배움과 학식은 자신을 망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망칠 가능성이 높고 한 나라와 민족도 망칠 수 있다. 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일제시대와 해방 후, 군사독재 시대와 지금까지 고전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과연 올바른 삶, 행복한 삶을 살았던가 싶다. 오히려 공부를 많이하고 실천이 부족한 사람들은 일제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부정한 권력에 몸을 담아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장섰을 뿐이다. 즉,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지만, 그 힘이 선하고 올바르게, 참되고 모두에게 베풀어지려면 인간성과 세계관, 끝없는 자기 성찰과 실천이 따라주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나 앎보다 그런 것들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공부와 독서와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장점만 강조할 뿐 단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 책 속의 문장 :
- 10대와 60~70대가 함께, 지속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단연코 공부 밖에는 길이 없다. ... 노인은 원숙한 시야를 바탕으로, 청년은 젊음의 역동적 기운으로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면 된다. 그리고 일단 공부가 시작되면, 세대 차이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고 보면, 공부야말로 노화를 방지하고 노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이 아닐까? (p.47)
-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꼬뮌'. 꼬뮌이란 기성의 권력과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발적인 집합체 혹은 네트워크를 말한다.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 꼬뮌에 접속한다는 뜻이다. 그럼 왜 그토록 스승을 찾아 헤매었던가? 스승을 만나야만, 그 '꼬뮌'에 접속해야만, 지리멸렬하던 공부가 단번에 도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p.81)
- 암송은 형식 자체가 집합적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식의 사적 소유라는 주술에 걸려들지 않는다. 한두 사람이 튀는 것보다 다 함께 리듬을 타야만 즐거운 공부가 가능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암속의 배치 속에선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서로를 소외시킬 필요가 없다. (p.92)
- 그렇기 때문에 구술 능력은 리더쉽으로 연결된다. 사실 리더쉽의 많은 부분은 상황을 '언어화하는' 능력이다. 어떤 상황에서 그걸 하나의 주제로 엮을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때 그는 그 그룹의 지도자가 된다. 한번 주변을 살펴보라. 어떤 그룹이든 헤게모니를 장학하고 있는 이는 '썰을 푸는' 인간이다. (p.102)
-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주역>처럼 실제로 우주의 비의가 담겨 있는 것도 있고, [불경]이나 <성경>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을 탐구하는 것도 있고, <돈키호테>나 <열하일기>처럼 삶의 지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도 있다. 한 인간이 평생 겸험할 수 있는 시공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이 있기에 그 협소한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역사의 궤적을 조망할 수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비전을 탐구할 수도 있다. (p.117)
- 고전이 말하는 공부법은 "인생의 순간들을 학습하고 지식, 기술,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서로 도와주는 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망 형성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반 일리히 <학교없는 사회>)라는 '탈학교'의 전망과 아주 행복하게 조우한다. (p.146)
- 돌이켜보면, 저 1970~80년대의 노동자들은 온갖 탄압과 고난 속에서도 책을 읽고 사유를 했다. (중략)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객관적 상황은 말할 나위 없이 좋아졌지만, 노동자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세계를 사유하지도, 변혁을 꿈꾸지도 않는다. 실존적 고뇌에 대해서는 잊은지 오래다. 그럼, 우리시대의 노동자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다만 노동조합의 일원이 되었을 뿐이다. 가족의 품에서 임금과 노동조건, 휴가를 얻기 위해 싸우는 평범한 중산층이 되었다. (p.200)
[ 2011년 5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