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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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계속된 '무한경쟁' 시장근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인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간 격차와 자국 내 계급,계층간의 사회적 양극화를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무한경쟁'의 입시교육이 교육 자체와 학교와 아이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들까지 이 미친 교육에 희생양이 되어 사회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음 속의 '병'을 카워가고 있다. 꿈과 희망을 키우고 즐겁게 뛰어 놀아야할 어린 나이에 아이들은 학원에, 영어에, 특기교육에, 시험에 골병이 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부모가, 학교가, 학원이 제공하는 틀과 방식, 일정과 제도 속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갉아먹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 무슨 대량생산 공장의 부속품처럼 '양육'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님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입시교육이 점점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의 유력한 이유로 정착하고 있고 사회와 세대의 활력과 창의성,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한지 오래라 할 수 있다.

한국은 1945년 타의에 의해 민족해방이 되고 분단이 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봉건제도에서 일제 식민지라는 암울한 억압을 거친 후 이 땅의 대다수 민중들은 1948년 헌법 1조에서 규정된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채 타의에 의해, 일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1조가 사람들애게 소중하게 다가온 것이 2008년 첫불시위 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피땀을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헌법의 가치,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 정치의 역할, 교육의 역할, 국가의 존재이유, 만민평등의 원리, 유권자의 권리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이에 반하는 교육제도가 아직도 이 땅에 군림하는 이유 역시 지난 과정과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각각의 사안에 대해 그 때 그 때마다 깊게 생각해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 이야기해보고 가장 나은 방향과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차선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교육(교육)'이라는 단어가 주는 타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느낌 때문에 단어 사용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교육을 놓고 교육 철학, 목표, 정책, 시스템, 운영방식 등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의견을 교환할 때만이 그나마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나는 작년 6월 지자체 선거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8월에 전임 시장인 오세훈이 저지른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11월에 벌어진 '곽교육감 사건'에서도 교육적인 관점보다 일반적인 상식과 사회복지, 민주주의, 선거제도 등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나 역시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보통의 학부모들이 생각하는 정도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 큰 탈 없이 잘 자라주던 내 아이도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1년만 지나면 입시재도와 현실에 빠져든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더 이상 남일이 아닌 문제가 되었다. 마침 공부모임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가 제시해야할 교육정책에 대해 세미나를 하기로 했기에 이 기회에 교육과 관련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교육이나 학교와 관련해서는 작년에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를 비롯해 '학교화'와 '제도화'에 관한 몇 권의 이반 일리히의 저작을 읽었고 이번에 약 20년 만에 <페다고지> 등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작을 읽어보았다. 국내에서 발간된 교육개혁이나 교육문제에 대한 책 몇 권과 더불어 한꺼번에 읽어보고 내 생각을 정립해보려는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교육에 있어 가장 훌륭한 철학과 시스템과 결과를 낳고 있는 핀란드 역시 이번에 공부해봐야할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인 후쿠타 세이지(츠루문과대학 문학부 비교문학과) 교수의 핀란드 교육 리포트다. 그는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핀란드 교육 성공의 비결을 연구한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다. 후쿠타 교수는 이번 책에서 핀란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인 교실을 20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독자들에게 생중계하고 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하나하나의 사례에서 출발해 핀란드 교육의 성공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게 전달된다. 여기에 학습법 전문가, 교육평론가인 박재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의 해설이 곁들어져 있어서 남의 얘기가 아닌 지금 이곳, 대한민국 교육 현장과 생생하게 대비된다. 박재원 소장은 이 책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 현장의 분위기는 사실적으로 전달하되, 각 꼭지 말미에 해설을 달아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핀란드 교육을 독자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는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로 책 한 권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지막 5장에서는 우리에게 핀란드는 어떤 존재이고, 왜 핀란드 교육 모델이 우리 교육의 희망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학생평가(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감독하에 실시하는 15세 이상 학생의 읽기·수학·과학 평가다. 지난 2000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며 국가별 학업성취도 비교지표를 도출하는 게 목적이다. 2003년도 평가결과 우리나라는 수학 542점, 과학 538점으로 핀란드(수학 544점, 과학 548점)에 이어 2위에 올랐다.,"
"2003년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조사(PISA)를 비교한 결과 핀란드는 청소년들의 일주일간 수학 학습 시간이 4시간22분으로 한국(8시간55분)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점수는 544점(한국 542점)으로 한국보다 높았다. 한국 청소년의 주당 공부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3.92 시간)에 비해 15시간 많으며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
"2008년 우리 국민이 쓴 사교육비 규모는 약 21조원,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3만 3,000원으로 집계됐다(교육과학기술부 통계)."

위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핀란드에 이어 학력이 2번째로 높은 나라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한국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2009년 8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아동·청소년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 비교연구’에 따르면 학습시간 대비 성취도로 순위를 매기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으로 떨어진다. 한마디로 학습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아이들은 억지로, 부모에게 이끌려 '울면서' 공부하고 있다. 매년 성적과 시험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정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지불하고 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억지로 공부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라. 자발적으로는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시간적 낭비, 비용의 낭비, 정신력의 낭비, 행복의 낭비, 마지막으로 국가 경쟁력의 낭비라 할 수 있다.(자세한 사항은 책 속에서 참조)

그렇지만 눈을 돌려보면 지구상에 우리와 전혀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한다. '공부가 재미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스스로 공부한다. 학교는 기꺼이 가고 싶은 놀이터 같은 곳이다. 철저하게 학생 개개인의 발달을 돕는다. 단 한 사람의 낙제생도 만들지 않는다. 서열화가 아니라 피드백을 위해 평가한다….'
바로 핀란드다. 핀란드 교육 관계자의 말을 옮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무척 단순한 경제적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구에 척박한 자연환경, 단 한 명도 버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서 나온 생각들을 실천한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목고, 자사고 등 수월성 교육을 실행한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같은 이유로 학교간, 학생간 격차를 없앴고, 세계 최고의 학력과 학습효율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흔히 핀란드 교육을 얘기하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식으로 냉담한 반응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교육이 이뤄지는 교실 현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소박한 핀란드 교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장 실천이 가능한 소박한 핀란드 교실의 비밀을 들여다본다.
핀란드 교육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교육 역시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15세 이상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단골 1위 국가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높은 신뢰도로 정평이 나 있는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의 대학교육 경쟁력 조사에서도 매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핀란드 교육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너무도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가정, 성, 경제력, 모국어와 관계없이 교육 기회가 평등한 점. 어떤 지역에서도 교육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점. 성별에 따른 분리를 부정하는 점.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는 점. 종합제로 선별을 하지 않는 기초교육. 전체는 중앙에서 조정하지만 실행은 지역에서 실시할 수 있도록 교육행정이 유연하게 지원을 한다는 점. 모든 교육 단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협동하는 점. 동료의식. 학생의 학습과 복지에 대해 개인별로 맞춤 지원을 하는 점. 시험과 서열을 없애고 발달의 관점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점.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전문성이 높은 교사.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 개념(socio-constructivist learning conception)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기회균등이 하향평준화의 주범으로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교육 관료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가르치는 교사들이 중심이 아니라 관리하는 관료들이 중심이다. 협동 학습은 교과 성적과는 무관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수업 모형이다. 학생 개인보다는 학교와 학급의 평균 성적과 명문대 진학 실적이 최우선이다. 모든 교육은 서열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는다. 교사들은 진급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연수교육에 소극적이다. 3번에 해당되는 성적(性的) 차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교실의 모습을 살펴보면 선생님들이 재미있는 수업을 만들고, 학생들은 즐겁게, 스스로 공부를 한다. 역자는 핀란드의 교실 모습을 사례로 우리 교육도 인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화제가 된 전북 임실의 기적이 너무도 허무하게 성적 조작으로 판명나면서 ‘한국의 핀란드’라는 표현이 잠시 나오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시도되고 있는 방과 후 학교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설자는 우리 교육에도 희망의 성공 사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교육의 대혼란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희망의 성공사례 만들기를 핀란드 교실 현장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자는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교실 개혁의 키워드 몇 가지를 제시해본다. 첫째는 학생들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들의 강압적인 통제나 일방적인 주입식 수업이 과연 학생들의 내면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교사들이 알아야 한다. 둘째, 학생 전체가 아니라, 학교나 학급의 평균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일 수 있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정해진,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 한 명의 존재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생들이 과연 무엇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지 교사들이 좀 알아야 한다. 재미를 찾아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교육 강사들과의 경쟁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지겹고 따분한 수업이라는 혹평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넷째, 학생들의 성적이 부진하면, 반 평균 성적이 떨어진다고 학생 개개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는 잘 가르쳤는데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버리자.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선생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의 제목은 '교육 혁명'이 아니라 '교실 혁명'이다. 우리에게 교육이란 너무나 민감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하는 거대 담론이다. 그래서 원작자나 해설자는 먼저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공교육의 현장, 교실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교실에서 이뤄지는 작은 변화를 모델로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교육 개혁을 이뤄내자는 것이다. 이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교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대다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다. 앞서 얘기한 방과후학교가 그 작은 시작일 수도 있고, 핀란드 교실에서 행해지는 사소한 차이들이 우리 교육 개혁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해설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이미 회자되고 있는 핀란드 교육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실천적 대안을 찾기에 적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자칫 핀란드 교육은 너무 좋지만 이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치부하는 냉소주의를 경계하면서 핀란드 교육 모델을 우리 현실로 끌어와 실현 가능한 과제로 녹여내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 교육, 교실이 바로 서려면 교사들의 역할과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이 학부모이고 학교이고 시도 교육당국이라 할 수 있다.
 
[ 2012년 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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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GPE 총서 2
장석준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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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공부모임 교재였는데 이제야 읽었다. 책을 읽고보니 저자가 소위 진보 진영에서 드물게 알려진 이론가이자 사회학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 사회학,경제학자의 책이나 익히 알려진 장하준,최장집 교수의 저작을 읽을 때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읽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실망이 커지고 있고 서구국가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는 흐름이 많아졌음에도 저자는 왜 책의 제목을 '신자유주의의 탄생'이라 정했을까라는 궁금증도 들었고 국내 진보진영 사회학자는 신자유주의 탄생과 극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최근 캐나다에서 대학생들이 등록금 문제와 대학의 신자유주화에 대한 반발로 수 십만명이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작년 여름,가을 세계 금융의 심장인 미국 뉴욕의 월가에서도 “Occupy : 1%의 탐욕, 99%가 막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당시 탐욕스러운 금용 자본에 대한 항의로 촉발된 월가의 시위는 한 달 넘게 계속되면서 전 세계 여러 도시로 확산되었다. 2008년의 금융 위기와 더불어 월가 점령 시위는 지난 30여 년 동안 군림해온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몰락을 상징하는 징후로 보인다. 막강했던 시장 근본주의 교리는 치명적 금이 갔고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의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한 시대가 저무는 지금, 흔들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할 새로운 질서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

저자의 결론을 먼저 들어보면, 그는 현재 지구 전체에 '구조개혁 좌파'라는 흐름과 세력이 존재하고 있으나 이들이 전략적인 실패로 신자유주의의 탄생을 막아내지 못했으며, 향후 생활경제 정치를 강화하고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이라는 구조개혁의 방향을 고수하면서 대중운동과 지구정치적 질서를 만들어내면 신자유주의도 막아내고 자본주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가 돌아가는 현실이 세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한 나라의 구조개혁이나 경제개혁도 자국 내에서만 해결하기가 이미 어려워진 것이 사실인만큼 정치에 대한 저자의 지구적 관점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현재 수준을 생각하면 정당,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노동조합이나 농민, 서민들의 지구적 네트워크가 구성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차이와 이해관계를 극복한다는 전제로도)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저자의 분석과 해법은 지난 번에 읽은 대니 로드릭의 <자본주의 새판짜기>(2011, 21세기북스)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대니 로드릭은 좌파가 아닌 자본주의 주도세력의 하나라는 입장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원칙과 기준을 바르게 우지하지 않고 국민국가의 고유성과 필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금융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빈부격차와 양극화, 자본주의의 약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주주의, 세계화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세계화보다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발전과 평등에 기여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니 로드릭은 전지구적 정치체제의 성립 가능성을 부정하는 편이고 장석준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좌파정치의 블럭화와 시스템에 방점이 찍혀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70~1980년대 그때, 자본 주도의 지구화 세력이 일방적으로 압승을 거둔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선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밝히고, 그럼에도 왜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추출함으로써 오늘에 필요한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신자유주의가 처음 등장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지구정치경제’적 시각에서 탐색한 이 책은 당시 지구 곳곳에서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초기 흐름에 맞서 투쟁했던 흐름을 분석해 '구조개혁 좌파'라는 세력을 규정하고 이들 ‘구조개혁 좌파’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즉 1970년대 칠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등에서 대의민주주의 형식을 존중하며 자본주의 극복을 고민했던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 노선’의 ‘성공과 패배’의 기록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그 지구화 과정이 단순히 경제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생활 세계 - 국민 국가 - 지구 질서’라는 정치의 세 층위를 가로지르며 전개된 거대한 정치 변동이었음을 밝히려는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전환 과정을 개별 국가가 아닌 지구 질서의 변동이라는 맥락에서 다루고 있는 이 책에 따르면, 결국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따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인 생산 수단의 소유, 경영 문제에 도전하고 대중 운동을 발전시켜 계급 세력 관계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과제를 계승하되, 국민 국가의 정치에 갇혀 생활 세계의 권력 관계를 제대로 바꾸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어 ‘생활 세계-국민 국가 -지구 질서’를 결합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만들어낼 것을 제안한다.
신자유주의가 역사적 전환기에 선 지금,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 전망하는 데 필요한 지구정치경제적 시각과 함께 위기의 시대를 돌파할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전망을 여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지구 곳곳에서는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흐름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이 과정은 전후 질서 붕괴 이후의 새로운 질서 수립을 놓고 구조 개혁 좌파와 신자유주의 우파가 벌인 대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70∼1973년의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분투,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의 모색과 논쟁, 1981∼1983년의 프랑스 좌파연합정부의 시도와 스웨덴 등지의 흐름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이러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신자유주의 태동기의 윤곽을 제시한다.

2008년의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가 완전히 붕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전성기가 이미 끝났음을 공표했다.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의 또 다른 전환기를 마주한 지금, 우리 시대의 정치 운동은 어떤 전망을 마련해야 할까? 이 책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복원 대신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비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새로운 지구 질서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복지 국가를 복원·확대하거나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를 철저히 해체해야만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해체 작업은 기존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구조 개혁이다.
구조 개혁 좌파는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시장 위계 체계에 가장 능동적으로 맞서 현상 유지가 아니라 현상 타파를 주창함으로써 좌파 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들은 국민 국가의 정치에 권력 거점들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 정책 수단들을 창출하려 했다. 공공 부문을 확대하고 경제 계획을 발전시키려 했으며,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노동조합 운동의 역량을 성장시키려 했다. 이렇게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으며, 새로운 질서의 출발점은 곧 계급 세력 관계의 역전이었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1970~1980년대에 구조 개혁 좌파는 자신들이 만든 기회를 성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길을 내주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오류를 직시하고 당시에 보여주었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좌파 정치의 역사가 놓쳤던 정치의 또 다른 층위들을 환기해야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는 곧 “국민 국가의 정치를 생활 세계의 정치 및 지구 질서의 정치와 (재)접속하는” 것이다.

좌파 정치 운동은 생활 세계의 정치에서 출발하지만, 국민 국가의 정치에 본격 참여하면 생활 세계의 실천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2차 세계대전 후의 국민-대중 경제에서 거대 노동조합들이 등장해 제도화된 단체 교섭에 참여한 후 노동자들의 관심이 임금 교섭에 집중되면서, 과거의 노동 계급 공동체들은 사라지고 ‘미국식’ 대중 사회가 들어섰다. 영국 노동조합 운동이 AES 좌파와 연대해 산업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데 게을렀던 것도, 국유화 이후 칠레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인민연합 정부와 대립한 것도 생활 세계 속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구조 개혁 좌파의 한계를 보여준다. 대중 운동을 개혁하고 활성화하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는 당시의 한계는 곧 오늘의 과제이다. 지금 노동 대중의 생활 세계는 더 파편화되고 대중 운동은 침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구조개혁론자들이 이야기하듯, 탈자본주의 구조 개혁의 궁극 목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민중 ‘자치’를 실현하는 데 있으며, 생활 세계 수준에서 이러한 능력들이 성숙해야만 국민 국가 수준에서 더 확대된 민중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 저자는 대중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며, 그 방향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 서클 등이 서로 결합된 노동 계급 공동체들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장’과 ‘국가’보다 우위에 서는 ‘사회’를 새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사회’는 자본-임노동 관계나 국가 관료 기구의 거대 체계로부터 자율성부터 되찾아야 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구조 개혁 좌파가 일국 차원을 넘어서는 지구 질서 차원의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가 혼돈의 출발점이며 초국적 자본과 대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국민 국가 내부의 변혁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 질서의 변화를 주창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진보적 사회 변화를 추진하는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자본 진영의 전 지구적 정치만이 작동했다. 유럽 좌파 정부들은 신자유주의 지구 질서에 누가 더 잘 적응하는지 경쟁할 뿐이었다.
저자는 국민 국가의 틀을 넘어선 좌파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와 브라질 노동자당의 룰라 정부는 200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붐’, 즉 우루과이·볼리비아·에콰도르·파라과이·엘살바도르 등에서 좌파 정권이 등장하는 유례없는 상황을 맞아 공동 이니셔티브로 지역(대륙) 차원의 좌파 정치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경제 사회 통합에 박차를 가해 2008년 남아메리카 국가연합(UNASUR)을 창설했다.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현실 정치로 구현된 국제 연대를 갖추었으며, 이러한 좌파 주도의 지역 연합은 지구 질서 수준에서 북반구-남반구의 세력 관계를 바꿀 진지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노력은 아직 현재 진행형의 실험 단계일 뿐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국민 국가의 정치를 폐기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국민 국가의 정치와 지구 질서의 정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지구 질서 수준의 새로운 정치 무대를 구축하는 것은 오직 국민 국가들의 공동 이니셔티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역으로 좌파들이 이 새로운 초국적 무대에 진지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것은 국민 국가 내의 세력 관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즉, 전 지구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었는지 여부가 국민 국가 내에서의 구조 개혁의 승리를 상당 부분 결정할 것이다. 국민 국가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도 다시 한번 ‘지구 질서의 정치’가 실체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과 기득권 세력이 세계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운용 체제를 장악하여 자신들의 이윤창출에 이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대항세력이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여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가 무엇이냐의 관점에 따라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가 사회구조 내에서 파생하는 이익집단간의 갈등을 수렴하여 조정하고 해결하는 구조라면 세계정치체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자본가들과 기득권 세력들은 이미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새스템을 구축한 만큼 이와 갈등관계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노동자, 농민, 시민사회단체, 빈민과 서민, 각종 이해집단들 역시 세계적인 네트워크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한 일국 내지 세계적인 차원의 정치적인 노력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수준으로 보면 이 과정이 오랜 노력과 시간이 투여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의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 비판적인 부분은 두 세가지다. 하나는 저자가 자본주의 구조개혁의 전략으로 제시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경영'의 개혁이 의미하는 바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 1970~80년대 유럽을 돌아보면 영국은 그렇다 하더라도 프랑스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생산수단의 사회화가 어느정도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문제나 정부부채, 실업과 양극화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들이 국유화나 사회화를 늘린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두번째는 생활경제 정치를 통한 대중운동 활성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대중운동이나 민중자치를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경제규모의 규모나 사회의 복잡성, 대량생산과 무역체제, 다양한 이익간의 갈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민중자치의 객관적인 조건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문제도 있다. 민중자치만을 생각하면 구모를 줄이고 정치경제을 분산시키는 것이 최적의 방법이 아닐까? 마지막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국민국가 내의 갈등을 너무 '진영 논리'로 쉽게 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정치의 박해(?)를 받아 사라질 수도 있고 박해를 극복하고 다른 방식으로 부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의 특성상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다른 가면을 쓰고 반드시 부활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는 일국 내에서든 지구적 차원이든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에서부터 화폐경제나 통화체제, 공정거래와 무역체제, 제3세계의 양극화 문제, 기술관료의 문제, 일국 내 민주주의의 문제 등이 함께 검토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012년 3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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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김효순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약탈, 그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노동, 징용, 학살 등을 다룬 <역사가에게 묻다>의 저자인 김효순씨의 또 다른 기록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1940년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이고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공개기록이다.

<역사가에게 묻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 책을 읽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행정부, 국회가 얼마나 자국의 동포들과 시민들에게 무정하고 무책임한지 분노가 치밀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언론사들과 학자들, 대학과 연구소, 지식인들의 미천한 역사의식과 이중성이 역겨워진다. 국가의 존재 이유, 민족을 떠드는 그들의 허울, 민중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개인적으로 미국이 모든 외교정책을 자국과 자본가들 위주로 운영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착취함을 비난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어도 미국 정치인들과 행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자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는 정성과 노력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얼마나 정부관료의 입장이 어려운지, 돈이 많이 드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국민 한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죽은 시체를 자국의 땅으로 데려가 묻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 언론들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한국사회의 공동체가 계속 온존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1945년.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이승만 정부에게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한국이 소련과 수교한 이후인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가 1965년 졸속으로 체결해준 한일회담으로 모든 식민지배상이끝났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정희가 저지른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국내에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이병주, 이규철, 동안 등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저자가 개록해 놓은 기록이 보여주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마추어 학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정부, 정치권, 언론, 학계가 모르는 사실을 저자가 공개했으니 이제 그들이 저자의 기록을 토대로 나머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 억류'가 벌어진지 70여년이 지났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당시의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현실에 없기에 시작하기에 좋은 여건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지와 노력 뿐이라고 생각한다. 국립대학이나 연구소라도 나서서, 개인적인 학자, 교수라도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게된 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모임에서 <역사가에게 묻다>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교재로 선택한 이유가 김효순씨의 활동을 알고자 함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인세를 보태어 그분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마음도 있었다.
 
[ 2012년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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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법정스님의 스무 번째 추천도서..

 

한 달 전쯤 주말 저녁에 혼자 <빅 미라클(Big Miracl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알래스카 얼음 구덩이에 고립되어 갖힌 회색고래를 환경단체와 원주민, 정부, 소련까지 함께 노력하여 구출했던 1984년 실화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였다(켄 콰피스 감독, 드류 배리모어 주연). 영화 속에서는 당시 알래스카 상황을 묘사해 놓았으니 21세기인 지금과 많이 다르겠지만, 혹한의 겨울이라는 이미지는 동일하게 남아있다는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개 썰매를 모는 개들이 컹컹 짖고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로 휴대용 발전기가 멈춰버리는 장면을 그 영화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책 제목인 '내일'은 날짜변경선을 말한다. 날짜변경선에서 동쪽으로 불과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래스카 코체부. 이 책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이누피아트 원주민의 이야기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자연을 경외하며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이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철된 현대인에게 진정한 삶의 숨결로 다가온다. 지난 1960~70년대 미국 정부의 극심한 통제가 만연한 현실 속에서 원주민들의 토지권을 보장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저자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닌 원주민 고유의 삶과 문화를 지켜내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간직한 이누피아트, 그들 모두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알래스카에는 '일만 번의 여름과 겨울'이 왔다가 갔다고 한다. 즉 알래스카에 사람이 발을 디딘 지 1만년 정도 된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매년 가을까지 또 한 번의 겨울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연어를 말려 훈제하고, 물범기름을 정제하고, 사냥한 북미순록고기들을 말리고, 풍성한 베리 열매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이누피아트 족(백인들이 흔히 에스키모라고도 부르는 이누이트가 극북지역에 사는 모든 이를 총칭하는 말인 반면, ‘참된 사람들’을 뜻하는 이누피아트는 알래스카 북부의 이누이트 사람들을 뜻한다)이 사는 알래스카 북부의 겨울은 아홉 달이나 계속된다. 그리고 한겨울이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밤만 계속된다. 기운 없는 싸늘한 태양은 지평선 위로 고개도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고 만다. 겨울철에는 거센 바람이 자주 불어 밖에 나갈 엄두도 낼 수 없는 날이 많다. 이누피아트 족은 그런 날을 ‘이트랄리크’라 부르는데, 그건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혹독한 추위’를 뜻한다.
알래스카 땅이 공식적으로 알래스카 주가 된 것은 불과 오십 년 전의 일. 그러나 누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든 상관없이 그 땅은 늘 얼음으로 뒤덮인 광대한 자연 속에 뭇 생명을 품어왔다.

저자 '이레이그루크'는 북부 알래스카,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코체부에' 해안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신흥 도시인 '놈'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외가 쪽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 전통적인 이누피아트 족의 방식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원주민 조상들이 수천 년간 영위해온 반유목민적인 생활로, 추위와 끊임없는 노동이 수반된 삶이었지만 이레이그루크와 가족들은 자연이 제공해주는 풍성한 산물을 누리며 살아간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겨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레이그루크는 자연이 지닌 힘들을 경외해야 함을, 낭비가 큰 적임을 배운다. 더불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임을, 오로지 더불어 일함으로써만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곳에서 나날의 삶은 모험이었고 우리 모두는 아니그니크, 곧 삶의 숨결을 즐겼다. 많은 이들이 간간이 죽을 고비를 겪기는 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큰 기대감을 갖고서 하루를 맞았다. 오늘 날씨는 어떨까? 몇 마리의 뇌조를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있을까? 운 좋게 몇 마리를 쉽고도 빠르게 잡을 수 있을까? 여우가 덫에 걸렸을까? 농어 그물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누가 개들을 데리고 가서 가문비나무 단을 실어 오는 일을 맡을까? 양식과 생필품을 들여놓기 위해 마을에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에 모처럼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지금까지 알래스카와 그곳 원주민들에 대한 책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그조차도 하나같이 외지인들, 곧 개척자들이 썼다. 또는 여행의 관점에서 쓴 책뿐이어서 이누피아트의 어린 소년 이레이그루크가 툰드라에서 생활한 일들의 직접적 기록은 우리에게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각과 감동을 전해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곳에는 삼백 명 가량의 주민이 살았으며, 대부분은 이누피아트였다. 소수의 ‘날로우르미트’도 섞여 살았는데, 그들은 백인들을 그렇게 불렀다. 물범을 뜻하는 날로우크의 상앗빛 피부를 연상시키는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선교사, 교사, 정부 관리, 장사꾼들이었다.
알래스카는 빙하로 뒤덮인 광막한 자연환경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곳에 펼쳐진 원초의 청정한 강들과 호수, 삼림, 빙하,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대지에 매료된다. 그 땅덩어리의 넓이는 3억 6천5백만 에이커(약 150만 제곱킬로미터)로 텍사스 주 넓이의 두 배가 넘는다. 어떤 이들은 그곳의 엄청난 자원, 곧 믿을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아연, 금, 목재, 야생동물, 어류, 석유 같은 것들에 끌린다. 하지만 이레이그루크에게 알래스카는 본질이자 본향이요, 삶의 이유이자 목적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나는 사향뒤쥐와 늑대 가죽들로 만든 모피 파카 대신에 고어텍스가, 물범가죽 장화 대신에 스노부츠가, 우리가 물고기를 낚기 위해 1.5미터 두께의 얼음장을 뚫을 때 사용했던 재래식 투우크 대신에 휘발유 동력 드릴이 등장하기 전 시대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스노머신이 등장하기 전, 에스키모개들이 썰매를 끌고 싶어 안달이 나서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곤 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보트 외부에 장착하는 외장 엔진이 등장하기 전에 카약과 우미아크(가죽배)가 수면 위를 고요히 미끄러져 가곤 하던 시대에, 양초와 콜맨랜턴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빛을 제공해주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사람들이 겨울철이면 매서운 추위와 강풍을 막아주는 60센티미터 두께의 뗏장과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뗏집에서, 여름철이면 우리를 나른한 잠의 유혹으로 끌어들이는 단조로운 파도 소리와 아비(물새의 일종)나 갈매기 울음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텐트 속에서 지내곤 했을 때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전화기가 등장하기 전이라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서야 비로소 자기네의 삶과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절에, 텔레비전이란 게 생겨나 사람들이 가족들의 연대기와 전설들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걸 방해하기 전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태어날 즈음 알래스카 문화는 이미, 그들이 ‘바깥세상’이라 불렀던 곳에서 알래스카의 매력과 흡인력에 이끌린 사람들이 몰고 온 파괴적인 영향력을 목격하고 있었다.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전염병도 따라 들어왔고 그 때문에 원주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외지인들이 대규모로 펼친 고래 사냥은 고래들 덕에 먹고살았던 원주민들을 어려운 처지로 내몰았다.
알래스카에 이주해 온 외지인들은 땅과 자원을 장악하면서 또 다른 부담도 함께 들여왔다. 그것은 바로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정부의 과중한 통제였다. 외지 사람들의 지배와 더불어 그들의 강제적 요구도 따라 들어온 것이다 저자와 식구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사유재산에 대한 아주 색다른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를 자본주의와 개인적 이익 추구, 개인의 선택에 기반을 둔 사회에 맞춰 나가야만 했다.
알래스카가 주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기독교 선교사들과 미국 정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을 올바른 ‘미국인’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합심해서 노력했다. 열다섯 살 때 저자는 타의에 의해 에스키모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미국 본토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야 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속한 민족과 역사를 뺀 나머지 것들을 공부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저자가 열다섯 살이 되어 더 많은 교육을 받도록 테네시로 보내졌을 때 그는 거기서 과거 수천 년 동안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차지해왔고 사실상 소유해왔던 땅이 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움직임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연어처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와 원주민 종족들의 대표가 합심하여 몇 년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71년, 미국 정부는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과 17만 8천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알래스카 원주민들에게 제공해주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 본토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런 놀라운 결정이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어느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과 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현실화한 이는 바로 이 책을 쓴 이레이그루크였다. 이 책은 그 생생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하지만 미국 본토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비하면 알래스카 원주민은 괜찮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본토의 인디언들은 17~18세기에 걸쳐 90% 이상이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침략자들로부터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겹쳐졌다. 알래스카는 19세기 중 미국 본토의 백인들이 잔출하여 상업등을 영위하다가 1867년 미국에 합병되었다. 1890년부터는 원주민 언어를 학교와 공용어에서 금지시켰다. 기간이 오래 경과되었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100년도 넘는 백인들의 침략과 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생활을 면면히 이어오다가 결국 1971년에 미국정부로부터 자율권과 토지,배상금을 획득하였다. 물론 원주민 언어와 역사도 지역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은 비록 민족국가로서 독립(분단)은 달성했지만 단일 언어를 제외한 전통과 문화, 생활양식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아예 송두리채 뼛속까지 미국식, 서구식으로 사고와 행동과 생활을 바꾸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협동보다 경쟁이, 정신보다 물질이, 소통보다 단절이, 나눔보다 독점이, 놀이보다 향락이 우선시되고 있다. 반대로 지금 돌이켜보면 100년 전 선조들의 의식과 문화, 생활양식 중에서 소중하고 긍정적인 것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그 결과 현재 한국에서 연대의식과 공동체는 거의 파괴되었고 인간과 문화의 가치보다 돈과 자존심만 남아 황폐해져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가치와 문화만으로 우리사회의 행복과 인간됨과 공동체를 복구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꿈과 희망을? 아니면 좌절과 절망을?

[2012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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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의식화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채광석 옮김 / 중원문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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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에 파울로 프래레이리의 <페다고지 : 피억악업자의 교육학(1970)>을 다시 읽고나서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이 궁금해 찾은 저작이다. 이 책 <교육과 의식화>가 처음 발간된 해가 1978년이니 <페다고지>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21세기 한국 상황과 전혀 다른 맥락과 조건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나는 다만 <페다고지>만 읽고서는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책과 다른 책(<체 개바라, 파울로 프레이리의 혁명의 교육학>,2012)을 한 권 더 읽어보려고 했다.

프래이리는 제1장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브라질의 근대사를 통해 브라질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으며 외세(포루투칼)에 의해 어떻게 브라질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체계가 왜곡되어 구축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브라질 민중들의 뿌리 깊은 굴종과 체념의 인식이 각인되었는지 말한다. 외세의 의해 심어지고 유지된 사유대토지하의 브라질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특징은 사회적 거리감이며 이는 '대화'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반대화' 사회체제는 브라질 민중의 침묵증의 근원이 되었고 이는 사회적으로 정치사회적 연대감과 대화, 참여, 정치, 사회적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사회, 정치제도가 자라날 여지가 전무하였다. 여기에서 브라질 사회와 민중에게 대화식 교육과 의식화의 과제가 도출된 것이다.
프레이리는 자신이 브라질 동북부 농촌에서 직접 실험한 문맹퇴치교육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대화식 교육을 통한 민중의 의식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착 속애 농촌에서의 문화 써클에서 농민들과 토론했던 구체적인 과정을 소개하면서 참여를 통해 민주적 과정을 겪으면 어떻게 농민들의 주체성을 일으킬 수 있고 의식화가 가능한지 설명한다.

프레이리가 규정하는 억업자는 호령, 명령, 지시, 착취, 거짓 관용, 거짓 사랑을 행하는 지배엘리트와 이른바 혁명을 운운하면서도 반대화적 행위를 일삼는 좌익 분파주의자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의 행동 이론은 민중을 피보호자로 보는 가부장주의, 지배문화의 이데롤로기를 신화화시키는 조작주의, 존재가 아니라 소유를 추구하는 물화주의 등의 "죽음을 긍정하는" 정신으로 보고 이의 구체적 양상이 분할 지배, 조종, 문화적 침략, 정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석한다. 이로 인해 피억압자들에게는 심리적 왜곡 현상의 하나로 '자유에 대한 공포(fear of freedom)'라고 말한다. 반대로 그는 인간화의 주체인 피억압자의 행동 이론이 해방을 위한 일치, 조직, 문화적 종합, 협동이어야 하며 이의 밑바탕에는 민중에 대한 믿음, 신뢰, 사람, 희망이 자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페다고지>와 이어진 주장으로서 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분석, 해결방향은 21세기인 지금 한국 상황에서도 발견되고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제2장 '지도나 교호나(Extenttion or Communication)'에서는 브라질 농촌사회에서 실시된 농업 기술자들(technicians)과 농민들이 새로운 농촌사회를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에 관해 분석했다. 그는 '지도'라는 용어를 낱말의 언어학적 의미, 철학적 지식론에 입각한 비평, 지도와 문화적 침략의 여러 개념 간의 관계 등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지도'에 대해 종합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지도의 개념이 어떻게 해서 농민을 믈건으로 만드는 여러 행위로 전개되는가를 밝혀준다. 따라서 일반적인 교사와 마찬가지로 영농기술자인 교육자는 그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는 한 반드시 지도와 교호 중 교호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프레이리는 다시 한번 인간화를 위한 '문제제기식 교육'의 개념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교육 행위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며, 방법, 기술 과정 전체가 인간 해방의 구현 방법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 해방으로서의 교육은 실제나 상황에 대한 반성 이상의 것 즉 프랙시스(praxis)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교육으로서의 프랙시스는 실재에 대한 반성과 그 실재를 변형시키는 행동 사이의 통일점을 뜻한다.
 
이 책은 <페다고지>와 마찬가지로 주로 성인문맹퇴치교육을 중심으로 한 민중교육론인 까닭에 상당히 주의 깊게 읽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프레이리의 브라질과 남미에서의 교육대상이 가난과 억압에 찌든 농민과 도시지역 빈민들이면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문맹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그의 교육론의 틀과 방법론이 명확히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의 전편을 꿰뚫고 흐르는 프레이리의 브라질 근대사 인식을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여 읽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어쨌든 리챠드 쇼올이 지적했듯이 프레이리의 이론과 방법론은 브라질의 경우뿐만 아니라 소외된 민중 일반의 교육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1세기 한국에서 같은 인간존재로서 동등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평등한 사회적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며 인간적 노동도 성취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을 여전히 '민중'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상당수가 역사의 주인으로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미디어와 시스템을 통해 음으로 양으로 세뇌되어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은 그런 사람들 뿐 아니라 어떻게 보면 현대인 모두가 참된 인식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도구적 존재이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되찾고 역사적 존재로 되살아나려면 한 번쯤 숙고해 볼만한 교육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책 속의 프레이리의 사상, 교육철학은 깊이가 있고 어떤 때는 따라잡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정곡을 찌르고 있으며 진리의 세계와 이들 진리 간의 연관관계 및 논리 정연한 개념설정을 보여준다. 인간들의 여러 행위,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고 자기들의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투쟁 등이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전체적 기능 속에서도 중요한 뜻을 지니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반 일리히와 비교해 아쉬운 점은 프레이리가 억압자와 피억업자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민중의 교육학에 집중하는 대산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위계적인 관계로 구성하면서 근대사회의 반환경, 반생태, 산업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가 생활하고 분석했던 사회경제적 제도와 구조가 프레이리의 그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학교의 교육 독점'과 '학교화'애 대한 문제의식은 프레이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2012년 3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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