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법정스님의 스무 번째 추천도서..

 

한 달 전쯤 주말 저녁에 혼자 <빅 미라클(Big Miracl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알래스카 얼음 구덩이에 고립되어 갖힌 회색고래를 환경단체와 원주민, 정부, 소련까지 함께 노력하여 구출했던 1984년 실화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였다(켄 콰피스 감독, 드류 배리모어 주연). 영화 속에서는 당시 알래스카 상황을 묘사해 놓았으니 21세기인 지금과 많이 다르겠지만, 혹한의 겨울이라는 이미지는 동일하게 남아있다는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개 썰매를 모는 개들이 컹컹 짖고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로 휴대용 발전기가 멈춰버리는 장면을 그 영화 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책 제목인 '내일'은 날짜변경선을 말한다. 날짜변경선에서 동쪽으로 불과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래스카 코체부. 이 책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이누피아트 원주민의 이야기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자연을 경외하며 함께 힘을 모아 살아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이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철된 현대인에게 진정한 삶의 숨결로 다가온다. 지난 1960~70년대 미국 정부의 극심한 통제가 만연한 현실 속에서 원주민들의 토지권을 보장 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저자의 이야기는, 단지 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닌 원주민 고유의 삶과 문화를 지켜내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간직한 이누피아트, 그들 모두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알래스카에는 '일만 번의 여름과 겨울'이 왔다가 갔다고 한다. 즉 알래스카에 사람이 발을 디딘 지 1만년 정도 된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매년 가을까지 또 한 번의 겨울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 연어를 말려 훈제하고, 물범기름을 정제하고, 사냥한 북미순록고기들을 말리고, 풍성한 베리 열매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이누피아트 족(백인들이 흔히 에스키모라고도 부르는 이누이트가 극북지역에 사는 모든 이를 총칭하는 말인 반면, ‘참된 사람들’을 뜻하는 이누피아트는 알래스카 북부의 이누이트 사람들을 뜻한다)이 사는 알래스카 북부의 겨울은 아홉 달이나 계속된다. 그리고 한겨울이면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밤만 계속된다. 기운 없는 싸늘한 태양은 지평선 위로 고개도 제대로 내밀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버리고 만다. 겨울철에는 거센 바람이 자주 불어 밖에 나갈 엄두도 낼 수 없는 날이 많다. 이누피아트 족은 그런 날을 ‘이트랄리크’라 부르는데, 그건 ‘살점이 떨어져나갈 만큼 혹독한 추위’를 뜻한다.
알래스카 땅이 공식적으로 알래스카 주가 된 것은 불과 오십 년 전의 일. 그러나 누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든 상관없이 그 땅은 늘 얼음으로 뒤덮인 광대한 자연 속에 뭇 생명을 품어왔다.

저자 '이레이그루크'는 북부 알래스카,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코체부에' 해안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신흥 도시인 '놈'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외가 쪽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 전통적인 이누피아트 족의 방식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원주민 조상들이 수천 년간 영위해온 반유목민적인 생활로, 추위와 끊임없는 노동이 수반된 삶이었지만 이레이그루크와 가족들은 자연이 제공해주는 풍성한 산물을 누리며 살아간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겨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레이그루크는 자연이 지닌 힘들을 경외해야 함을, 낭비가 큰 적임을 배운다. 더불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한 일임을, 오로지 더불어 일함으로써만이 우리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그 곳에서 나날의 삶은 모험이었고 우리 모두는 아니그니크, 곧 삶의 숨결을 즐겼다. 많은 이들이 간간이 죽을 고비를 겪기는 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큰 기대감을 갖고서 하루를 맞았다. 오늘 날씨는 어떨까? 몇 마리의 뇌조를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있을까? 운 좋게 몇 마리를 쉽고도 빠르게 잡을 수 있을까? 여우가 덫에 걸렸을까? 농어 그물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누가 개들을 데리고 가서 가문비나무 단을 실어 오는 일을 맡을까? 양식과 생필품을 들여놓기 위해 마을에 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 저자는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에 모처럼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지금까지 알래스카와 그곳 원주민들에 대한 책이 나온 적은 있었지만 그조차도 하나같이 외지인들, 곧 개척자들이 썼다. 또는 여행의 관점에서 쓴 책뿐이어서 이누피아트의 어린 소년 이레이그루크가 툰드라에서 생활한 일들의 직접적 기록은 우리에게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시각과 감동을 전해준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곳에는 삼백 명 가량의 주민이 살았으며, 대부분은 이누피아트였다. 소수의 ‘날로우르미트’도 섞여 살았는데, 그들은 백인들을 그렇게 불렀다. 물범을 뜻하는 날로우크의 상앗빛 피부를 연상시키는 피부색을 지닌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선교사, 교사, 정부 관리, 장사꾼들이었다.
알래스카는 빙하로 뒤덮인 광막한 자연환경으로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곳에 펼쳐진 원초의 청정한 강들과 호수, 삼림, 빙하,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대지에 매료된다. 그 땅덩어리의 넓이는 3억 6천5백만 에이커(약 150만 제곱킬로미터)로 텍사스 주 넓이의 두 배가 넘는다. 어떤 이들은 그곳의 엄청난 자원, 곧 믿을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아연, 금, 목재, 야생동물, 어류, 석유 같은 것들에 끌린다. 하지만 이레이그루크에게 알래스카는 본질이자 본향이요, 삶의 이유이자 목적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나는 사향뒤쥐와 늑대 가죽들로 만든 모피 파카 대신에 고어텍스가, 물범가죽 장화 대신에 스노부츠가, 우리가 물고기를 낚기 위해 1.5미터 두께의 얼음장을 뚫을 때 사용했던 재래식 투우크 대신에 휘발유 동력 드릴이 등장하기 전 시대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스노머신이 등장하기 전, 에스키모개들이 썰매를 끌고 싶어 안달이 나서 허공을 향해 길게 울부짖곤 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보트 외부에 장착하는 외장 엔진이 등장하기 전에 카약과 우미아크(가죽배)가 수면 위를 고요히 미끄러져 가곤 하던 시대에, 양초와 콜맨랜턴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빛을 제공해주던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사람들이 겨울철이면 매서운 추위와 강풍을 막아주는 60센티미터 두께의 뗏장과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뗏집에서, 여름철이면 우리를 나른한 잠의 유혹으로 끌어들이는 단조로운 파도 소리와 아비(물새의 일종)나 갈매기 울음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자유로이 넘나드는 텐트 속에서 지내곤 했을 때 그곳에서 살았다. 나는 전화기가 등장하기 전이라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서야 비로소 자기네의 삶과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절에, 텔레비전이란 게 생겨나 사람들이 가족들의 연대기와 전설들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걸 방해하기 전 시절에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태어날 즈음 알래스카 문화는 이미, 그들이 ‘바깥세상’이라 불렀던 곳에서 알래스카의 매력과 흡인력에 이끌린 사람들이 몰고 온 파괴적인 영향력을 목격하고 있었다.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 전염병도 따라 들어왔고 그 때문에 원주민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외지인들이 대규모로 펼친 고래 사냥은 고래들 덕에 먹고살았던 원주민들을 어려운 처지로 내몰았다.
알래스카에 이주해 온 외지인들은 땅과 자원을 장악하면서 또 다른 부담도 함께 들여왔다. 그것은 바로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정부의 과중한 통제였다. 외지 사람들의 지배와 더불어 그들의 강제적 요구도 따라 들어온 것이다 저자와 식구들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사유재산에 대한 아주 색다른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를 자본주의와 개인적 이익 추구, 개인의 선택에 기반을 둔 사회에 맞춰 나가야만 했다.
알래스카가 주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기독교 선교사들과 미국 정부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을 올바른 ‘미국인’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합심해서 노력했다. 열다섯 살 때 저자는 타의에 의해 에스키모의 때를 깨끗이 씻어내고 미국 본토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야 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속한 민족과 역사를 뺀 나머지 것들을 공부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저자가 열다섯 살이 되어 더 많은 교육을 받도록 테네시로 보내졌을 때 그는 거기서 과거 수천 년 동안 알래스카 원주민들이 차지해왔고 사실상 소유해왔던 땅이 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이런 움직임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연어처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와 원주민 종족들의 대표가 합심하여 몇 년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71년, 미국 정부는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과 17만 8천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알래스카 원주민들에게 제공해주기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 본토의 원주민들과는 달리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그런 놀라운 결정이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어느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삶과 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현실화한 이는 바로 이 책을 쓴 이레이그루크였다. 이 책은 그 생생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하지만 미국 본토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비하면 알래스카 원주민은 괜찮은 경우라 할 수 있다. 본토의 인디언들은 17~18세기에 걸쳐 90% 이상이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침략자들로부터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도 겹쳐졌다. 알래스카는 19세기 중 미국 본토의 백인들이 잔출하여 상업등을 영위하다가 1867년 미국에 합병되었다. 1890년부터는 원주민 언어를 학교와 공용어에서 금지시켰다. 기간이 오래 경과되었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100년도 넘는 백인들의 침략과 식민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생활을 면면히 이어오다가 결국 1971년에 미국정부로부터 자율권과 토지,배상금을 획득하였다. 물론 원주민 언어와 역사도 지역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은 비록 민족국가로서 독립(분단)은 달성했지만 단일 언어를 제외한 전통과 문화, 생활양식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아예 송두리채 뼛속까지 미국식, 서구식으로 사고와 행동과 생활을 바꾸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협동보다 경쟁이, 정신보다 물질이, 소통보다 단절이, 나눔보다 독점이, 놀이보다 향락이 우선시되고 있다. 반대로 지금 돌이켜보면 100년 전 선조들의 의식과 문화, 생활양식 중에서 소중하고 긍정적인 것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그 결과 현재 한국에서 연대의식과 공동체는 거의 파괴되었고 인간과 문화의 가치보다 돈과 자존심만 남아 황폐해져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의 가치와 문화만으로 우리사회의 행복과 인간됨과 공동체를 복구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꿈과 희망을? 아니면 좌절과 절망을?

[2012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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