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 완전판 세트 - 전7권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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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독트린에 따르지 않더라도, 역사적인 변화가 그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것은 언제나 분명하게 여겨지곤 한다. 단 이 땅덩어리 자체가 증발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일하고(the only), 가장 오래되었고(the oldest), 버려진 세계(marooned world)로 묘사될 것임에 틀림없는 바로 이 행성. 물론 현미경의 배율을 조금만 높여 들여다보면 인간에게는 의식과 자유 의지가 있어서 각각의 행위가 복잡하게 전개된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획기적인 역사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소위 돌고 도는 패턴을 따라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때에 그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은 어두워지고 상(像) 자체가 거꾸로 보일 공산이 커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에 타자가 간섭하거나 그들이 무리를 이루게 되면 자유 의지는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 것이다. 일반 대중은 실패의 굴욕을 겪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해서 설사 견해가 다를지언정 승리하는 편에 가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별문제 없이 가동될 때조차 그것은 준안정 상태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린다 한들 종국에는 다시 아래로 되돌아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라. 우리가 자유 의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대단한 미스터리이며, 히친스와 더불어 잘(혹은 덜) 알려진 샘 해리스에 의하면 자유 의지란 것은 단연코 환상일 뿐이다. 그는 자유 의지를 두고 그것을 개념적으로 일관성 있게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환상 그 이상 또는 그 이하라고 규정한 바 있다. 대부분의 환상들이 이보다는 근거가 튼튼하다는 말을 덧붙여서(샘 해리스, 『자유 의지는 없다』).


부도덕과 추악함.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맹목적 불쾌감. 종교. 케케묵은 논쟁. 집단 우월주의. 시민 혹은 대중. 또는 목적 없는 군중. 건설. 파괴와 붕괴. 어쭙잖은 피라미드 싸움. 모난 돌. 아귀다툼.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 잘된 정부(政府)와 잘못된 정부. 잘된 지도자와 잘못된 지도자. 군부. 기득권(층). 명예에 들뜬 과학자. 굶주린 예술가. 동맹 혹은 연합. 맹동주의. 무지 속에서의 의미 없는 탐람. 권위. 내부의 위기. 히스테리. 불안. 실속 없는 사유. 신념. 예기치 못한 변수. 배신. 상식 밖의 요소. 어이없는 농담. 고갈. 부패. 낫지 못할 약을 파는 자들. 자본(가). 달콤한 유혹. 탁상공론(빌어먹을 테이블!). 제3세계. 부질없을 게 빤한 섭동의 제스처. 변이. 복종과 불복종. 복종에의 회귀. 올바르지 못한 무역. 시위. 거짓 자유. 탈주. 저항. 반란과 혁명. 복수(復讐). 갑론을박. 정치는 없고 정치적인 것만 있는 현상. 암약. 모종의 거절 못할 제안. ㅡ 이러한 것들은 놀라울 정도의 은근한 상징과 쉬 알아차리기 힘든 은유로 현현된다. 현실에서든 소설에서든 지구에서든 우주에서든. 인간이 지어낸 극적인 허구가 지루한 사실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이 '지루한 사실'이란 앞서 나열했던 모든 것에 플러스알파일 터이고, 진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거짓이 더 나아 보이기 마련이며 또한 진실이 통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최상의 거짓이 될 게 빤할 것이기에 그렇다(설사 그 진실이나 거짓이 교조적일지라도) ㅡ 제수알도의 소설 따위를 보라. 어쩌면 파운데이션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동시에 셀던 또한 악마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이 매트릭스의 원형이라 해도 좋을 이야기는 실은 해리 셀던보다는 에토 데머즐, 체터 휴민, R. 다닐 올리바의 돌고 도는 역로라고 인지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A circle has no end.」). 파운데이션은 일견 미래를 위한 노력에 예찬을 보내는 것 같으나,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 실종되고 그 문제의식이 독점과 비독점 혹은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갈등으로 등치되어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문제 설정은 스스로의 한계에 갇히게 되고 사람들은 능동성이나 자기가치화 능력을 갖지 못한 희생자 또는 피동적 동원인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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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심리역사학이 무엇이기에 마뜩잖은 상황에서 도망할 때조차 그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을 암호 따위로 들먹이는가 ㅡ 「우리는 심리요.」 「나는 역사요.」 ㅡ 이것은 흡사 저 옛사람 분트가 수행한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개의 그림을 보여주고는 묻는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런 다음 피실험자가 「개입니다.」라고 대답하기까지의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종이 사라지면 다른 모든 생물과 무생물이 하나로 합쳐져 공동 지성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은 다른 모든 것과 질적으로 다르며, 만약 그것이 사라진다면 다른 모든 의식체를 하나로 합한다 해도 그 역할을 대행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과연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며 따라서 여전히 특별한 존재로서 대접받아야 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인간이 어느 특정한 계층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모멸감을 느껴야 한다면? 여기 있는 이 모멸감을 느끼는 존재는 또 다른 모멸적 존재가 창조한 것이고, 결국은 이자들 서로 간의 증오가 인간성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질 텐데도? 위에서 언급했던 복잡한 일련의 항목들이 그들을 순순히 방목해 주기는 할는지. 인류는 그러는 건 고사하고 아주 자그마한 충격만 가지고도 적대하는 그룹으로 나뉘곤 하는데 말이다. 셀던은 이것을 일거에 정리하고 있질 않나 ㅡ 「인간은 '나는 너보다 낫다'는 흥미진진한 게임에 너무나 쉽게 빠져들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어떤 경우든 한쪽의 갈등을 줄이게 되면 다른 쪽의 갈등이 늘어나므로 동일한 단체 내부에서의 갈등의 총량은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갈등을 줄이거나 늘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끊임없는 규율, 악덕과 미덕, 자유와 안정의 갈등의 개념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들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갈등 자체를 해소시키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문명의 진보란 사적인 비밀의 제한과 같은 말일 것이다. 아니면 그 사적 비밀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는지도. 그러면 그럴수록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가정(假定)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나중에는 전혀 문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논리가 아닐 수 없다. 터무니없이 큰 파이프 그림을 보면서 '이것은(ceci, 글씨 형식의 파이프, 그리고 그려진 텍스트로 구성된 이 총체) 파이프가(une pipe, 담론과 이미지에 동시에 속함으로써 그 모호한 존재가 드러나게 된 이 혼합적 요소) 아니다(n'est pas, …과 등가일 수도 없고 대체될 수도 없다, 적절하게 …을 재현할 수 없다)'라고 찢어발긴들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그러니, 총은 훌륭한 무기이나 그 총구는 어느 쪽이든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적인 것을 말살하는 것보다 그 정치적인 것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말살하는 편이 더 심각할 테니까. 카뮈가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우리는 시시포스를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과연 어떤 의미로 추측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 삶은 결코 성공할 수 없으나 계속해서 바위를 굴려야 한다는 것을 ㅡ 돔(dome) 안에 갇혀 살고 있는 그들을 맞이했던 것은 역시나 돔(dom; enDOMandiovizamarondeyaso……)이었다. 허나 우스꽝스럽게도 소설에서 묘사된 제2파운데이션의 황금률은 다음과 같다. 「절대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어쩔 수 없는 경우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럴지도. 아닐지도.


덧) 나는 총 일곱 권의 파운데이션을 한 줄로 늘어놓은 채 제1발광체의 빛남 혹은 파스타(far star)호에라도 탄 기분이 되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샘솟는 과도한 충성과 과잉된 금속의 고집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확대 지향적인 도덕의식으로 말미암아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갈채로 심장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이 연결된 책등으로부터 저 옛날 가면을 바꾸어 심리변화를 나타내던 변검스러운 기묘한 맥놀이가…….」 이제는 책등과 표지가 뇌리에 박혀서, 나는 그것들을 보지 않고도 하얀 종이에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을 체득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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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제3인류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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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이야기(혹은 그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가이아가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냉동 보관된 가장 맛있는 고기들'을 뱉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젤룩스 냉동식품 로고가 박힌 옷을 입은 고생물학자 둘과 카메라맨은 약 17m의 신장을 가지고 천 년 가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과거의 인류를 발견하자마자 냉동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ㅡ 베르베르 자신의 책 『개미』에 나왔던 에드몽 웰즈의 후손이 재등장한다는 점(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제 소설을 여러 번 차용하고 있다)에서 어쩌면 이를 통해 '제3인류'라는 것의 정체를 가늠케 하기도 하나, 내가 읽고 있는 것은 1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시일을 두고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따금씩 간섭하는 가이아의 독백이 있다.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인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중 시작하자마자 들어서게 되는 '아포칼립스' 항목은 가이아를 1인칭으로 따로 떼어놓은 연유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말인즉슨 아포칼립스는 '감추다'라는 동사 '칼립테인'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포'를 붙인 아포칼립테인에서 나온 것이며, '감춰진 것을 드러내기', '장막을 걷어 내기'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훗날 이것은 '계시'나 '진리를 드러냄'으로 번역되어 '세상의 종말'과 뜻이 같은 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아의 독백이야말로 그/그녀가 의식을 지닌 존재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행성)의 역사를 뚜렷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과정에서 가이아가 뱉은 냉동 인간으로 촉발된 먼지 한 자밤이 아포칼립스, 즉 세상의 종말에 가까운 재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크게 여성화와 소형화를 골자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본색, 종교에 바탕을 둔 전체주의, 유전 조작 등과 맞물려 얽히고설키는데, 다비드 웰즈는 묵시록에 등장하는 네 명의 기사를 떠올리고는 털을 자르고 모근을 뽑아 준다는 면도기 광고와 오버랩시켜 그들이 인류의 4중 날 면도기일 거라고 중얼거린다. 그야말로 그가 읽은 묵시록의 네 기사에 관한 글은 장차 인류 문명에 닥칠 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들추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이아 혹은 그들 스스로가 인류를 쳐내는 이유의 섬뜩함이다. 그에 맞설 준비의 일환인 것인지 결국 다비드를 위시한 몇몇은 17cm의 초소형 신인류를 창조해내고야 만다. 최초의 난생 인간 에마슈. 어쩌면 『제3인류』는 『개미』를 모티브 삼아 『파피용』의 과정을 거칠 심산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겨끔내기로 『신』과 충돌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사실 나는 『카산드라의 거울』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그런 클리셰에 지나지 않겠으나 우리는 아직 베르베르의 새로운 소설을 절반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가이아가 자신을 위해 싸워 줄 챔피언으로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 과연 잘한 일일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 채이므로. 그/그녀가 만든 인간들, '실험실에서 탈출한 그 못된 소인들'에게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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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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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벡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노동자와 대공황 그리고 그에 끌어오는 신화나 성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분노의 포도』의 오키(okie)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비참한 사유로 보자면 그와 비스름한 양상을 띠고 있기는 하다. 물론 우리의 진저맨 시배스천 데인저필드에 비하면 여기 등장하는 이선은 조금 더 우울한 낡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알아채지 못하는 반거충이일지도 모른다 ㅡ 「싸워야만 합니까?」 「물론이다. 그리고 속삭이지 마라.」 그러니 더더욱 이선 앨런 홀리(Ethan Allen Hawley)로서는 다른 홀리(Holly)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는지도 ㅡ 페렉이 그의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human과 thing의 원형은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되어 왔던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주인공 이선의 고자질이나 다름없는 고발과 거짓으로 빼앗은 땅, 그리고 자살 기도까지의 유일한 약점은 허울이라고 할 수 있을 명예와 체면, 물질에 도로 빼앗긴 그 스스로의 나약함이다. 인맥으로 얻은 '대위 E. A. 홀리'는 쓰라린 과거의 깃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식 체계는 다음과 같다. ①모건과 록펠러 같은 금융의 달인들은 그저 돈 자체만을 원했기에 돈을 번 것이므로 자신들이 불러낸 유령에게 겁을 먹은 나머지 그것을 매수하려고 애를 쓴 것일 터다. ②아내 메리에게 돈이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다. ③나는 왜 비위가 상하면서 썩은 달걀의 뒷맛만 남았나? 골칫거리나 혼란, 노력 따위는 전혀 바라지 않고 그저 게으름에 불과한 소극적인 친절만 징그럽게 가득 차 있구나 ㅡ 이선은 스스로에게, 잡아먹는 자는 잡아먹히는 자보다 부도덕한지를 묻고는 결국에는 모두 잡아먹히고 말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불만의 겨울』은 제목처럼 계속해서 봄이 오지 않는 불만으로 충만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공산이 크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제로섬에 갇혀 있기 때문이며 결코 만날 수 없을 불협화음만이 그득한 아귀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윤활유가 끈적거리는 12구경 엽총을 꺼내고 세월의 더께가 낀 5호 산탄 총알을 몇 개 찾았다. 오후 나절 뒷계단에 앉아 있다가 토끼 두 마리가 나란히 보이자 한 방에 명중시켰다. 그러고는 털북숭이 사체를 커다란 라일락 나무 아래에 묻었다. 속이 괴로웠다. 생물을 죽이는 데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다. 남자는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학살이나 시체 묻기, 심지어 사형집행을 하는 것에도. 고문도 익숙해지면 그저 직업에 불과하다 (...) 아마도 창조를 통해 균형을 되찾으려고 파괴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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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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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전 알게 된 용어로 플루토노미(plutonomy)가 있었다. 그것은 암흑물질(dark matter) 이론, 땀의 균형(sweat equity) 이론, 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 이론과 함께 미국 경제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4대 이론 중의 하나였다. 그중 플루토노미는 소득과 부의 편중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쓴 이 『플루토크라트』를 통해 다시 한 번 플루토(plutos)란 단어를 듣게 되었다(물론 맑스도 함께 떠올리게 되고).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존 스튜어트 밀의 역사적인 말을 듣게 된다. 「부를 창출하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진보는 항상 지주들의 소득을 높이고,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문제나 소비와는 상관없이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공동체 지분을 선사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재산은 끊임없이 증가한다. 아무런 일이나 위험, 또는 절약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그들의 부는 말 그대로 자는 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 소득 불균형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이어지는 이때에 어쩌면 밀의 말은 조금은 달라진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1%와 99%의 대립이 과거의 그것이었다면 플루토크라트는 그 1% 안에서도 0.1%와 0.9%를 나누는 잣대로 작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소위 '일하는 부자'라는 점. 물론 한국의 그것과는 접점이 없을는지 모르겠다. 플루토크라트는 부와 권력의 앞에 자수성가라는 단어가 동반될 수 있으나 이쪽은 자수성가보다는 대물림에 의해 형성되고 있으므로 ㅡ 『플루토크라트』의 북 트레일러에는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이 등장하고 있다. 「있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세계 경제 속의 플루토크라트들은 (규모는 차치하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국가의 정책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재산으로 독재자에 맞서거나 그 재력으로 선거 운동에 직접적인 후원을 하는가하면 공공 기관 혹은 이데올로기에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부와 권력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의 행보는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사악하게만은 보이지 않는, 이를테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스스로가 플루토크라트이기도 한 워런 버핏은 정치인들을 향해 세율을 높일 것을 촉구한 바도 있다 ㅡ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을 도발한 쪽은 나의 계급, 즉 부자 계급이며, 우리는 승리를 거두고 있다.」 「이제 우리 부자들을 그만 위하고, 나 같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으라.」 세금이라면, 플루토크라트라 보기엔 어려울지 모르나 아일랜드로 세금 망명을 떠났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바 있는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우스꽝스러운 사례가 있다(아,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어떻게 되었는가).


플루토크라트들은 그대로 쭉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쥐고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눈앞의 탐람에 빠져 자신들을 탄생시킨 사회 체제와 번영의 토대를 뭉개버릴지도 모르며, 그들의 모습(이랄까)은 0.9% 혹은 99%의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특권의 천박한 측면은 이럴 때에 드러난다.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들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신문지 회장, 라면 상무, 빵 회장 역시 '그들'일까?). 심리학을 다루는 연구원들의 실험과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보다 더욱 비도덕적으로 행동한다.」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더욱 긍정적이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시 비도덕적인 행동을 자극하는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의 일부이길 바라는 실험 결과는, 값싼 구형 자동차를 모는 운전자들보다 고가의 신형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이 두 배나 더 많이 다른 차량과 보행자들의 진행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현실에서 소득이 더 높은 사람들일수록 가상의 입사 지원자들이 낮은 연봉을 수락하도록 만들기 위해 속임수를 더 많이 써 경영자들에게 많은 보너스를 안겨 주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자신이 부자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동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소득 불균형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위 20%와 상위 20%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 박수를 보낸다」로 시작하는 글을 발표한 어느 외환 및 채권 중개인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란 접두어가 필요한 99%(99.9%)의 사람들은 어쩌면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거금 100만 달러』의 주인공 레뮤얼 피트킨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했잖아요. 저는 죄가 없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걸 입증할 돈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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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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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와 전쟁이란 명제라면 우리는 이미 소설 『나치와 이발사』나 영화 《버디》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로 인해 충분히 악마 같은 소설과 영화들을 접했으면서도 늘 (어떤 의미에서건) 전쟁과 상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ㅡ 인간이 꿈의 실현을 욕망한다지만 실은 그 욕망 자체를 욕망하고 있는 거라면 어떨는지. 그런 측면에서라면 소설 속 찰리의 대사가 의미심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빤한 일일 것이다. 그는 친구의 집을 찾다가 작고 까만 개를 치어 죽인다. 우도는 전에 봤던 개인지 유기견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찰리의 대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차에서 내려서 자세히 살펴봤거든. 같은 놈이었어.」 우도의 내면은 시종일관 간섭받는다. 그는 출구를 찾았다고 결론지으려는 찰나 복마전에 빠진 것만 같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인텔리겐치아란 총을 든 겁쟁이마냥 입놀림으로 혁명을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인데, 체호프가 망쳐 버린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총임에 다름 아니다. 꼭 모든 총이 발사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발사되지 않는 총도 있을 것이고, 발사되지 못하는 총도 있을 터다. 그러나 이 우도라는 인간은 스스로가 인텔리겐치아도 아니고 혁명을 하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행동하는 투쟁가도 아닌 바에야 이런저런 불평을 할 만한 계제도 아닐 것이며 실제로 그는 앞으로 발사되지 못하는 인물임에 틀림없으므로. 주인공 우도 베르거와 페달보트 임대업자 케마도의 아귀다툼은 정말이지 난센스라고 봐도 좋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나 크리스탈나흐트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하다못해 모든 세계가 다른 세계를 인용하듯 인간이란 족속도 ㅡ 인간의 기억이란 녀석도 ㅡ 하느작하느작 자신을 집단에 인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강자가 된 집단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 어떻게든 그 집단에 속하려고만 하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반쪽짜리 세계를 보는 관념 운동 같은 것이다. 우리의 우도 베르거는, 그 스스로가 사물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것들이 자신을 날카로이 겨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먹물로 쪼아대는 타자기 같은 해변이 있고 거기 끝에는 절대 맞힐 수 없도록 고안된 십자말풀이가 있는 것만 같다. 즐거이 풀 수 없는, 정교하게 짜인 시간표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이 즐기고 가.」 우도는 (영원히 그래야 할 것처럼 보이는) 케마도의 해변에서 이상야릇한 말을 듣는다. 오늘도 무사히? 과연 무엇을? 더군다나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 본 우리라면 다음의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탐욕, 파벌 싸움, 위선, 배반, 잔혹성, 분노, 광기, 증오, 시기, 정욕, 적의, 야심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인 무수한 음모, 반란, 살인, 대량 학살, 혁명, 추방으로 가득하오……. 나는 당신네 원주민들 대부분은 땅 위를 기어 다니도록 자연이 허용한 작고 추악한 해충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소.」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 꼭 잃어버린 탄피마냥 이상한 곳에서 어슬렁거리기나 할 줄 아는 자들. 그들. 그것. 우도와 케마도가 보여주는 것은 그야말로 항해용 정밀 나침반처럼 가차 없다고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멱살이 잡힌 채 오늘의 자신에게 경고 사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기나 했던 것일까? 잔뜩 무뎌진 외제 플라스틱 포크, 자양강장제 병에 담긴 꽁초들, 이런 자질구레한 생활의 각론 같은 것들이 결코 자신의 의자를 빼앗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글쎄,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서 있으면서 자꾸만 타자에 의해 자신이 논해지고 평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ㅡ 에셔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탈주와 매한가지다. 누군가 인간 하나가 죽어 나가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김득구와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죽은 이유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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