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백이호 옮김, 이인식 / 김영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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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된 책을 구하기란 때에 따라서는 여의치 않다. 우연찮게 헌책방 구석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소비자 개인이 온라인 서점 등에 올려놓은 고가의 중고책을 마주하게 되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출판사에서 복간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어서 제때 책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일쑤. 그러나 (출판사는 다르지만) 이번에 개정판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는 어찌 보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독자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던 헨리 페트로스키였기 때문일 테지. 과거 『서가에 꽂힌 책』이나 『연필』 등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였는지 독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회자되었던 바 있다ㅡ 굳이 덧붙이자면 연필 깎기의 달인(!)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프로파간다, 2013)을 비롯해 기상천외한 내용이 담긴 책들은 언제나 인기몰이를 해 왔다.





세 갈퀴와 네 갈퀴 포크가 도입되면서 후자는 때로 ‘분리형 스푼’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더 이상 나이프로 음식을 떠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알뿌리 모양으로 구부린 칼날은 더 만들기 쉬운 반듯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관습 때문에 기능 면에서 비효율적인 이 나이프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아직 옛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데 사용되었다. 이 세트들은 왼쪽부터 대략 1805년, 1835년, 1880년의 것이다.

ㅡ 본문 p.39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 본성이 수십 가지 혹은 수백 가지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트로스키 역시 머리말에서ㅡ 기술이 만들어낸 하나의 인공물은 어떻게 다른 모양이 아닌 현재의 모양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보편성을 갖춘 제품들이 설계되었는가, 와 같은 의문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본능 중 하나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특정 물건(기계, 제품, 인공물 등 모든 것)을 조금 더 다루기 쉽고 안전하며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답도록 바꾸길 원하는 데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보편성'이란 것 또한 필요하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모든 것을 언급할 수 없으므로, 일단 한국어판 제목에 있는 포크를 보자. 최초로 등장한 식사용 포크는 두 개의 갈퀴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페트로스키는 만일 갈퀴가 하나뿐이라면 나이프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행여 소스를 바른 새우라도 먹을라치면 방울져 뚝뚝 떨어지는 소스를 수직으로 들어 올린 후 수평인 혀에 올려놓기 위해 손을 비틀어야만 한다고 토로한다.(p.33) 시간이 흘러 4개의 갈퀴가 달린 모양으로, 그러니까 이 '포크의 진화'는 식탁용 나이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기존의 뾰족했던 나이프는 포크의 발달로 끝이 뭉툭하게 변하기에 이르렀다. 날카로운 나이프는 식탁 위에서의 필요성을 상실했고 심지어 포크는 다양한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변형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하나는 인도 등지에서 음식을 먹는 방법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맨손을 사용하는데, 생각하기에 따라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조차 햄버거나 빵, 그리고 적절치 않은 비유일는지 모르겠지만ㅡ 얇은 상추 위에 고기를 얹어놓고 손에 물기를 머금은 채로 입에 가져가질 않나. 페트로스키가 지적하듯 이러한 음식들은 문화적 목적과 그것에 따른 기술적 대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불만이야말로 발전을 위한 최초의 조건'이라 할 만한 것이다.



지금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 앞에는 노트북과 마우스가 있으며 왼쪽으로 재떨이와 담배 그리고 휴대전화가 보인다. 오른편에는 전선이 잘 정리된 온풍기가, 밑에는 털이 부숭부숭한 슬리퍼가 양쪽 발을 감싸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편의 혹은 편리를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산물이다. 그렇다면 다시 페트로스키를 의문스럽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갈밖에.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왜 현재의 모양'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보편성'을 갖춘 모습으로 변하였는지, 더군다나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기능만은 똑같은 도구들이 쓰이는 이유ㅡ 로 말이다. 그는 최초의 스푼은 아마도 오므린 손이었을 것이라 썼다. 물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손가락이라는 '다섯 개의 갈퀴'를 이용해 본래의 갈퀴들을 더럽히지 않을(혹은 다치지 않게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은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필요성의 논리 ㅡ 과장하자면 '공공의 미(美)와 편의' ㅡ 라는 바다에서 영원히 자맥질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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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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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메커니즘(인생)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다소 나이브하게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일단 전제로 하자(이를테면 프랜차이즈 형태의 편의점 체제에서, 본사와 가맹점 사이의 '갑을 관계'가 신문지상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문제가 되었던 ㅡ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ㅡ 일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저 '소비'에만 눈을 대고 있기 때문에). 점포 1개당 일일 평균 방문객 359명, 하루 평균 880만 명 이상, 인구 2,075명 당 하나 꼴인 편의점. 내가 다니던 대학 내에도 편의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금의 편의점은 고등학교와 구치소 면회장에도 입점했으며 어느 병원에 있는 곳에는 벽면에 링거걸이가 설치되어있는가 하면 트럭을 개조해 만든 트랜스포머형 편의점도 존재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떤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편의(便宜)의 표상일는지ㅡ 아니면 전상인 교수가 써놓았듯 개척 정신과 무한 변신의 화신인 것인지. 그렇다면 이 거대 로봇을 대하는 우리는? 편의점엘 가는 것과 그것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시스템은 작가 정희재의 책에서 '자본의 플러그'라는 말로 언급되었는데, 저자는 한술 더 떠 유명 산악인 조지 말로리를 데려온다. 「그게 거기 있어서.」 그러나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us)이 편의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다만 소비하는 인간의 자본 범주 안에 편의점 또한 속해 있다고 판단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편이 온당하다. 그러니 (아직은) 「편의점 너마저!」 하고 외칠 필요는 없다.






……이것의 의미가 옆에 있는 것의 이미지에 맞는지 또는 옆에 있는 것의 이미지가 옆에 있는 것의 의미에 맞는지를 검토한다. 결과를 미리 아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양자 간에는 어떠한 자연적 매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품과 가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실제로 상품의 의미가 가격이며, 상품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한 그 이외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 언뜻 가격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품의 혼 속에서는 지옥이 미쳐 날뛰고 있다.


ㅡ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권』 p.865~866





현재 한국에서는 휴대전화로도 편의점 결제가 가능하다ㅡ 덧붙여 기업들이 SNS를 통해 제공하는 모바일 기프티콘이란 것도 활용되고 있고. 그런데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m-pass라는 카드가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대중교통 정기권 기능 이외에, 현금을 충전하여 편의점이나 택시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다. 사진은 내가 일본에서 사용했던 정기권 '스이카(suica)'라는 것인데 본래는 가메아리(亀有)와 도쿄(東京) 구간이었으나 이사한 뒤로는 신주쿠(新宿)로 바뀌었다. 역에 설치된 기기에 카드를 넣고 갱신하면 본래 인쇄되었던 구간이 지워지면서 새로운 내용이 인쇄된다(소유주의 이름과 성별은 그대로). 본래는 super urban intelligent card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스이카(スイカ)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어로 수박이라는 뜻이므로 재미도 있고 색감 또한 초록빛이 난다ㅡ 우측 하단에는 수박의 줄무늬로 보이는 선로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m-pass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담배 자판기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음료 자동판매기에서도) 지금 우리가 휴대전화를 갖다 대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말이다ㅡ 우리는 그저 팔꿈치를 적당한 각도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의성, 점원과 손님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계산을 끝낼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 이미 이 세계에는 갖추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충전되어 있는 금액만 충분하다면 나는 내가 구입하려는 것들이 얼마인지를 묻지도 않고 얄팍한 카드 한 장만을 내밀어 삐 소리와 함께 퇴장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기만 하면 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내가 편의점엘 가는 것은 오로지 담배가 떨어졌을 때뿐이므로 나라는 인간은 최적화된 시스템에 걸맞은 최적화된 인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판매하고 있는 담배는 수십 종인데, 상품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번호표를 붙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75번 네 개요」라고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이라면 양상이 달라진다. 「카멜 필터 주세요.」 「이거요?」 「아뇨, 저기 낙타 그려진 거요.」 「이거요?」 「아뇨, 그건 라이트(파란색)잖아요…… 노란색이요, 노란색.」 이처럼 담배를 잘 모르는 종업원이 있는 편의점에 들어갈 경우, 나는 그들과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판국이니 저자가 '훼미리'마트가 씨'유'로 달라진 것에서 가족(family)의 해체와 개인(you)의 부상이라는 흐름을 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가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유리'를 재언급한 것 역시 매한가지다(반대로 어쩐지 백화점과 카지노가 생각나 으스스하기도 하다). 유리라는 투명성을 갖추었지만 철저하게 매출과 마케팅을 향한 집념. 요컨대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나타나는 일들 ㅡ 많은 오른손잡이들 때문에 쇼핑 동선을 입구부터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국민 평균 신장의 증가를 반영하여 판매대의 높이를 3센티미터 올리는 등 ㅡ 은, 기호는 재화를 장식하고 재화는 기호의 모습을 띠었을 때만 재화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을 체감할 수 있게끔 한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편의점(만이 아니다)을 정녕 '꿈의 정거장'이라 해도 되는 것인가? 편의점에서는 택배를 주고받을 수 있고 휴대전화도 개통할 수 있으며 와인은 물론 젖먹이 돌 반지와 자동차까지 구매할 수 있다(식사 대용식품이 가장 많이 판매된다는 사실로 보건대 정말로 'family → you'의 관계도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이 아닌 일상을 구매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광장이 아닌 '자기만의 방'인 것이고? 글쎄, 아니면 자본주의에 맞추어 새로이 마련된 이채로운 광장이라고 봐야 할는지도.



덧) 엊그제 신문에서 뜨악할만한 기사를 보았다. 드라마 제작사가 책을 홍보해주는 대가로 출판사에 5억 원(VAT 별도라네, 친구!)의 제작지원금을 요구하는 제안서가 공개된 것. 모 프로덕션 관계자는, 이미 정해진 큰 틀의 주제는 있으나 출판 예정인 책의 스토리대로 변경은 가능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주인공의 직업을 작가 겸 출판사 사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단다. 그렇다면 거대 프랜차이즈 편의점은? 이미 2011년 편의점의 시장 규모는 10조 가까이 되었고 2015년에는 18조원을 기대하고 있다. 편의점의 생존 기간이 평균 4년이라고는 하지만 성장률을 보면 현재 편의점의 판매액 증가율은 2011년에 17.9%였고 이후 계속해서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주요 편의점들이 외국 본사에 지불한 로열티는 200억 안팎에 이르며(이것이 2년 전의 일이다) 편의점 사업에 새로 진출하는 곳도 있다(홈플러스, 모나미를 비롯해 얼마 전 신세계 그룹이 '위드미'를 인수했다). 우스꽝스러운 말이지만, 드라마 주인공을 편의점에서 일하는 88만원 세대나 점장으로 설정하는 것을 넘어, 저들에게 자신들을 알릴 의지만 충족된다면 아예 드라마 자체를 만들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편의점,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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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3-1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잇 님, 이 책은 분명히 어제 왔을 텐데요...(먼산)
글 늘 잘보고 있습니다. 자주 이름 뵈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D

자주 뵐게요!

그레코로만 2014-03-13 10:16   좋아요 0 | URL
민음사 관계자 분이신지요?
맞습니다. 어제..가 아니라 시간상 그제가 되었네요.
일단 읽고 싶던 책이기도 했고 분량도 많지 않아서
그제 오후, 어제 오전에 걸쳐서 다 읽게 되었어요.
제 허접스런 생각이날아갈까 봐 후딱 감상을 쓰려고 하다 보니..

봄밤 2014-03-1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저도 편의점 사회학 리뷰 써야하는 이에요. ^^;;
아잇 님 리뷰 읽고 저도 어제 읽어봤습니다.
생각보다 잘 읽히더라고요 게다가 리뷰로 책이 더 풍부해진 느낌!

카멜 사기가 눈에 그려지네요. ㅎㅎ다음 글도 기대합니다아!

그레코로만 2014-03-13 14:56   좋아요 0 | URL
앗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짜 휙휙 읽게 돼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ㅎ
여러 리뷰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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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라는 건 모름지기 옆에 쌓아둔 채 ㅡ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앉은자리에서 ㅡ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한 권씩 출간될 때마다 읽는 맛이 더 좋다는 사람들의 말은 이따금씩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내가 조바심 그득한 놈팡이임에는 틀림없지만) 통독의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인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에 영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할보르센이 누구였지? 묄레르는? 엘렌은? 볼레르는? 이런 식으로 자문하면서 다시 한 번 전작들의 내용을 꿰어 맞추어야 한다(물론 해리는 제외시켜도 상관없지만 나로서는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행히 전작에서 시작된 하나의 사건이 이 『네메시스』를 거쳐 후속편에서 마무리될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고, 더 다행스러운 것은 그 사건이 언급되는 비중이 적어 최소한 바로 앞의 『레드브레스트』를 들추어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여기서는 두 가지, 아니면 세 가지의 사건이 일어난다. 우선 은행 강도. 복면을 쓰고, 불필요한 복장도 최소화시켰으며, 성문 분석을 피하기 위해 은행원을 대변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한 이자의 이야기를 반추하는 해리의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한다ㅡ 그리고 제프리 디버의 캐트린 댄스처럼 특출한 재능을 지닌 베아테 뢴.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해리의 옛 애인인 안나의 죽음인데, 비로소 소설의 제목이 갖는 의미가 이 시점부터 발화되고 있다. 더군다나 주된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①해리의 누명, ②과거 엘렌의 사건. (얼마 전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박쥐』를 읽고 나서인지 주인공의 우울함이 급작스럽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이것이 본래 그의 모습이라는 생각 때문에 안정감마저 든다) 상당히 복잡다단한 구성이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베아테의 능력은 은행에 뛰어든 자를 분석하고, 그녀의 추리는ㅡ 사투리나 억양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르웨이어가 아닌 영어를 썼고, 섬유가 떨어져 단서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표면이 매끈한 옷을 입었으며, 경찰 인력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끔 폭탄 테러를 경고하는 익명의 전화를 걸었다는 등의 대답을 이끌어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은행 강도의 정체는 소설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드러난다. 뒤이어 발생한 안나의 죽음은, 최초에는 의외의 전개라 생각했다, 상당히 돌고 돌아 결론으로 향하는데 여기서 자칫 길을 잃거나 이야기의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네메시스(복수의 여신)'라는 단어를 가지고 노는 그들의 모습 또한 흥미롭고. 오슬로 경찰대학 심리학 교수인 에우네는 이것을 종교와 연관 짓기도 하는데 ㅡ 「기독교의 윤리는 복수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들이 숭배하는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대변해서 복수해주는 위대한 존재야.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 불에 타게 되리라. 그거야말로 일반 범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완전한 복수 행위지.」 ㅡ 당돌한 베아테의 입에서 나온 간단명료한 두 단어 '사랑'과 '미움'이 그의 관점을 뭉개버린다(그리고 집시, 집시의 피). 맹목적 정의. 차가운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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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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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스가 이야기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시작하련다. 이해 당사자들이 자신과 상대방의 신분, 소득, 직업, 재능 등 어떠한 사회적 조건도 알지 못하는 가상의 상황ㅡ 즉 자신이 최대 수혜자가 될지 어떨지를 알 수 없으므로 이익의 극대화보다는 피해의 최소화를 지향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결정을 이끌어 공정한 사회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주장이다. 기업과 윤리라는, 일견 상충되게만 보이는 이 두 가지 개념에 CSR ㅡ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ㅡ 이라는 윤리적 문제가 간섭하여 현대사회에서의 중요한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글쎄, 윤리와 시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화로이 어깨를 같이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앞에서는 언제나 대답하기 힘든 것이 틀림없다. 책은 2부에서 50개 기업의 윤리 프로필이랄까 일종의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책 전체의 80% 분량이다), 놀라운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평점에 별 다섯 개를 주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크로소프트는 넷스케이프(Netscape)나 선 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 또한 유럽연합과의 갈등으로 꽤 높은 유명세를 얻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ㅡ 결국 그들은 윈도우즈와 자동으로 결합되던 인터넷 브라우저 익스플로러를 포기하고 고객들의 편의대로 제품을 고르게 해주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빌 게이츠가 설립한 재단을 제외하면 MS는 별점 두 개 정도의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덧붙임에는 다소 씁쓸해지기도 한다(동시에 인정하는 바이다). 심지어 비베는 글의 끝에서 한 번 더 '확인사살'을 시도한다.



게이츠가 천재적인 사업적 재능뿐 아니라 경쟁 업체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 때문에 그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기업 자체의 문제에 이르렀다. 사실 재단을 제외하면 이 기업은 별점 두 개 정도의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별점 다섯 개는 기업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재단에 대한 평가이다.
ㅡ 본문 p.138~140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을 기업들에 대한 윤리적 고찰을 읽다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데, 여기에는 한국 기업 삼성도 포함되어 있다. 삼성은 별점 다섯 개 만점에서 세 개를 받았다. 분명 삼성은 세계에서 성공적인 기업의 모범처럼 보인다. 비베는 이런 삼성을 가리켜 종종 '요새'로 표현되기도 하는 삼성의 경우 이런 성공의 그늘을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특히 일가가 그룹을 운영하는 재벌 기업의 전형, 불법 정치 자금 제공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곧 특별 사면된 이건희 회장, 최근 영화화되기도 한 산재에 대한 언급 등은 다시 한 번 혀를 차게 만들지 않던가. 비베는 삼성이 대체적으로 국제적 기준을 지키려는 인상을 주고 있고 공개적으로 알려진 비난 또한 제한적이라는 점을 들어 별점 세 개를 주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보기에 삼성은 외려 국제적으로 비치는 인상보다는 국내 쪽에서 더욱 '악명'이 높은 것만 같다. 그저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일까. 최근 어렵사리 개봉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자. 삼성의 캐치프레이즈인 '또 하나의 가족'을 비꼬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멍게'가 될 것이다. 멍게는 자라나 일정한 거처를 정하면 스스로의 뇌를 자양분 삼아(소화시켜버리고는) 식물이 된다고 한다. 조엘 바칸이 『기업의 경제학』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기업의 상술이란 것에 도취되어, 언젠가부터 우리 역시 생각하지 않는 소비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기업에게 도덕을 떠맡겨버린 소비자의 책임(=권리)은 전혀 없는 것일까?



하청 업체에 대한 철저한 관리 감독, 그들과 본사와의 긴밀한 협력, 고객과 투자자들에 대한 윤리적 문제, 어린 청소년들의 노동, 기업의 영업 활동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 언제나 그렇듯 기업과 이윤은 머릿속에서 잘 연결되는 반면, 이윤 대신 윤리라는 관점이 들어서게 되면 다소 갸우뚱거리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독성 화학 물질을 그대로 방출하는가하면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하는 근로자에 대한 배려 없는 자세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다. 비베가 지적하듯, 기업의 도덕성은 단순히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도덕적 자질의 총합이 아니라 해당 기업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과 분위기를 연관 지어야 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님과 동시에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과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을 무시해서는 기업 윤리의 문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서의 기업이란 독립적 인격체로 취급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영리보다 사회적 목적을 우선시하는 기업들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위험하게도 보인다.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기업의 기본적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에 있질 않나.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일단 많은 문제들에 성실히 대답부터 해야 한다. 그것도 문제들이 제기되기 전에 미리 답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자기 책임 하에 행동해야 하는 소비자와 투자자의 출발점도 바로 이런 대답이다. 그들은 기업이 명확하고 충실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할 때에만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이 내세운 약속을 실제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ㅡ 본문 p.26



비베는 말한다. 합리적인 행동은 우리가 결정한다고. 그러면서도 윤리 문제에 관한 공공의 논쟁은 합리와 거리가 멀다고도 했다. 그는 윤리를 말하기란 쉽지만 그러한 윤리를 실천하는 일은 비록 뜻이 있어도 매우 어렵다고 덧붙이고 있다. 더군다나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기업의 사업 모델과 다른 기업들과의 관계가 복잡할수록 문제는 더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그는 윤리 문제를 감독 통제하는 부서를 따로 둘 것을 역설하고 있는데, 일견 위반 사례가 단 하나도 적발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과연 좋은 결과에 해당할까? 비베에 따르면 그것은 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반 사례를 알리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기업들이 외려 훨씬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는 반드시 소비자가 '간섭'할 필요가 있다. 집요할 정도로 말이다. 소비자 한 사람의 구매 태도가 어떠한 현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이 뭉치게 되면 거대한 경제 권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합당하다(「그것은 민주주의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적은 세계적 기업에 대한 정보와 평가에 그치지 않고 또한 기업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관심을 일깨우는 데 있는 것이다.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에 제시된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보고서를 읽고 있노라면 페이스북을 평가한 단 한마디만이 머릿속에 남는다. 그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예리한 날붙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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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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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시리즈물의 첫 작품을 건드린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어딘지 모르게 제어하기가 힘들어 보이는 인물들, 다소 다듬어지지 못한 호흡, 복잡함을 택하기보다는 과감히 밀고 나가는 거친 박력. 확실히 『박쥐』에서의 해리는 지금까지 출간된 『스노우맨』이나 『레오파드』에서와는 달리 작가 스스로가 말하듯 통제 불가능한 느낌에 가깝다. 그가 처음 본 여자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꾀는 모습은 후속작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고(그녀들을 낙담하게 만드는 짓거리 역시) 더군다나 낯선 자들과 금세 말을 터 친구처럼 지내는 모양새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어리고, 상처를 덜 받고, 무언가를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은 다 이런 모양이지ㅡ 물론 상관의 명령에 토를 달고 반박하는 것만은 언제나 불변이다. 여기 『박쥐』에는 제목처럼(!) 애버리진(aborigine; australian origin의 줄임말)이 등장한다. 과거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은 이래, 20세기 중반 원주민 동화정책을 펴던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그네의 아이들을 강탈해 고아원에 방치하거나 농장의 일꾼으로 보내는가하면 백인 가정에 입양시킨 바 있다. 성장한 이들이 바로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다. 이에 (뒤늦게) 정부로 인해 1998년부터 5월 26일을 기점으로 <National Sorry Day>라는 연례행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그들이 정부로부터 집과 돈을 받았다고는 해도, 애버리진의 실업률이 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라고 하니 교육 쪽으로는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한 것만 같다(게다가 평균수명도 20년 가까이 짧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란다). 원주민도 그렇다고 백인도 아닌 박쥐와 같은 사회적 대우는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던 차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성화를 밝힌 점화자가 과거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2연패를 이룬 캐시 프리먼이었던 것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육상 선수일 뿐만 아니라 애버리진을 대표하는 인권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과거 멕시코 올림픽에서 보여주었던 블랙 파워 살루트가 '대우받지 못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것이었다면 프리먼의 경우는 비로소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경우라 하겠다(물론 시기적으로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요 네스뵈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두 발을 딛자마자 다소 이채로울 수밖에 없는 애버리진 문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해리라는 주인공이 불완전한 미완의 캐릭터 냄새를 풍기긴 하지만 외려 애버리지 출신인 동료 경찰 앤드류를 거의 전면에 내세우다시피 하고 있으므로. 역자가 후기에 남겼듯 오스트레일리아판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은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박쥐』를 잘 설명해준다고 하겠다. 이 소설은 추리라는 장르를 표방하고 있긴 하나 그럼에도 애버리진 사회의 문화를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그럼 대체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어떻게 해결되는가. 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이미 접했다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 『박쥐』를 시작점으로 삼는 것이 제격이다. 탕아에 가까운 주인공의 위대한 탄생이 그려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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