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의 풋라이트
찰리 채플린.데이비드 로빈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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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반듯한 콧수염과 중절모로 해학과 풍자의 신화가 된 찰리 채플린. 『채플린의 풋라이트』는 그의 전기도 아니며 온전한 삶의 궤적을 두루 훑지는 않으나, 그가 제작했던 영화 《라임라이트》의 모태가 된 소설 『풋라이트』를 통해 채플린의 고단한 생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자전)소설에는 왕년에 잘나가는 배우였던 남자 칼베로와 그가 자살의 늪에서 구한 어린 여인 테리가 등장한다. 칼베로의 보살핌에 테리는 발레리나로서의 삶을 피우게 되지만 정작 그를 구해준 남자는 시들어가기만 할뿐 좀처럼 자신의 삶을 깨고 나아가지 못하고, 훗날 생애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죽어가는 칼베로의 눈에는 관객 앞에서 춤을 추는 테리의 모습이 달의 여신 디아나로 현현된다. 그러나 끝내 광대 칼베로의 머리엔 의사의 손에 의해 조용히 흰 천이 덮인다. 이처럼 소설 『풋라이트』는, 그리고 영화 《라임라이트》는 관객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물간 배우의 고달픔을 그린다. 예전엔 위세를 떨쳤으나 지금은 초라한 광대일 뿐인 칼베로, 채플린은 칼베로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도록 했다. 두렵고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ㅡ 오래전 DVD를 구해서 보았는지 어쨌는지ㅡ 칼베로의 대사로 기억한다ㅡ 이 '시간'에 관한 문구가 어렴풋이 기억나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기어이 찾아내고 말았다. 「Time is the best author. It always writes the perfect ending.」 한국어로 옮기자면 「시간은 최고의 작가이지. 늘 완벽한 결말을 쓰거든.」 정도가 될 듯싶다. 이 말을 글로 쓰고 보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채플린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보편성이 얼마나 슬픈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꼭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숨을 거둔 채플린은 생전 '영화는 나무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무를 흔들어대면 모든 느슨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떨어져 나가고 결국 본질적인 형식만 남게 된다는 의미다.(p.271) 비단 영화(제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는지 모른다. 『라임라이트』에서 흐르는 구슬픈 「테리의 테마」와 함께 채플린의 ㅡ 그의 영화와 삶, 그리고 우리의 삶 ㅡ 희비극은, 찬란함과 애달픔을 모두 지닌 오늘날의 우리로 하여금 화려한 조명 뒤 쓸쓸한 뒷모습을 되살려낸다. 과거 코미디언 박명수가 끄집어낸 역발상 또한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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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치론>
꾸준히 개정판이 출간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 특히 이번 판본에는 밀레니엄 이후의 세계질서의 구조적 변화 혹은 새롭게 부상하는 패권과 그에 따른 국제 정시 등 오늘과 가장 가까운 날들의 세계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역시 움베르토 에코처럼 직업이 다양하다. 생전 그가 했던 강의 등의 녹취록이라는데, 출판사의 설명대로 그의 유고인 셈일 것이다. 바르트라니, 당연히 읽어야지.



<공평한가?>
판결을 비평한다, 라는 관점에서 보면 작년에 출간된 <올해의 판결>와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지도. 논리와 비논리, 국민의 법 감정, 법원의 위상,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 하면 <카인드 오브 블루> 정도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가 왜 재즈의 거장으로 추앙되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궁금하고 또 궁금한 것투성이이다. 물론 재즈 이야기도 흥미롭고.



<수학의 파노라마>

수학자들과 그들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았다는 책. 미리보기를 통해 본문을 살짝 엿보았는데 내지 구성도 좋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당연지사. 숫자로 이루어진 무한한 상상력, 그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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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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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이맛살 같은 등고선을 죽 따라 내려가면 별의별 것들이 다 보인다. 카페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고, 아파트를 흉내 낸 고시원과 원룸도 보이고, 학교도 보이고, 교회도 보이고, 사람도 보인다. 꼿꼿이, 영원히 수그러들지 않을 것만 같은, 그래서 우리를 현기증 나게 하고 때때로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기도 하는, 고층빌딩들은 페니스처럼 잔뜩 열이 올라있다. 이 시점에서 문득 제목에 있는 ‘작동’과 ‘소진’이란 타이틀과 부제의 단어들이 하나로 겹쳐 보인다. 왜 그런가. 작동했으므로 끝내 소진되는 것인가, 아니면 한쪽에선 작동을 한쪽에선 소진을 동시다발적으로 가져가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작동하기도 전에 소진되어 버리고 만다는 의미인가. 알 수도 없고, 좀처럼 머릿속에서 내보내기도 힘든 물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정반대로 생각해온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한다. 어떤 이의 소진으로 발생한 믿기 힘든 은유와 한계가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으로써 스스로를 작동케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다룬 서울의 장소들은 반드시 특정 공간일 필요도,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장소일 필요도 없다 (...) 그러므로 이 책은 서울에 관한 책이지만 서울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서울이란 것(곳)이 어떤 대표성, 아니 대표성이란 말을 갖다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의 또 다른 의미의 대표성을 띤다고 가정해보아도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생활과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가는 것’이며, 나는 당신을 쫓고 당신은 제삼자를 쫓으며 제삼자는 다시 나를 쫓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여기서 작동과 소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공간이 슬며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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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사드 전집 1
D. A. F. 드 사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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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 있던 뫼르소가 사제를 울려 내보냈던 것처럼, 혹은 종교인들은 종종 그들이 의탁하고 있는 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비종교인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믿지 않도록 하려고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없다고 하듯이, 초월적인 경험을 주장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에 스스로 복종하라고 말하거나 우리 자신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이들의 말에는 귀를 틀어막으라던 히친스와 같이, 결국엔 사제와 죽어가는 자가 서로 뒤바뀌고 마는(「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무신론적 태도를 견지하던 사드를 우리는 종종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단지 고립된 성채에서의 넉 달간의 통음(通淫이든 痛飮이든)만을 기억하곤 한다. 그러나 자연이 스스로 뿜어내는 에너지 혹은 운동능력에 의한 활성(活性) 물질이라던 그의 주장은, 때로는 인간의 속성을 초라한 개체로 몰아가는가하면 그것을 방지할 공감으로서 종교나 신이 아닌 선량한 마음을 외치고 있다. 「같은 인간을 해치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깨달아야 하는 것이네. 아울러 같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의 기쁨이라는 걸 우리 자신의 마음을 통해 느껴야 하는 것이지.」 그에 의하면 '갈색으로 염색된 리본을 실제로 갈색이라고 단정하는 건 매우 경박한 짓'이며ㅡ 당신이 누군가에게 신을 이야기할 때 당신은 그에게 어떤 개념도 제공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그를 설득하기 위해 최소한의 실질적인 논증조차 들이대지 않는 한, 그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그의 상상 속에 주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맹인에게 리본을 내밀면서 '이것은 갈색이오'라고 입을 놀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구라'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신에 대한 사색」). 하여간 우리는 언제고 이 불운한 6번 선생을(한때 뱅센 요새의 6번 감방에 있었음) ㅡ 그와 생트펠라지 감옥의 같은 층에 있었던 아무개의 표현을 빌리자면 ㅡ 그야말로 '부담스러운 짐짝'으로 여겨왔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거 하나만 인정하시지. 눈가리개를 착용한 자와 그것을 벗어버린 자 둘 중에서 진짜 장님은 엄연히 전자라는 사실 말일세 (...) 자네가 설교하는 그 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굳이 기적, 순교자, 예언 따위가 필요할까? 자네 말마따나 인간의 심장이 신의 작품이라면, 그곳이야말로 신이 자신의 법을 위해 선택했을 성소(聖所)가 아닐까?


ㅡ 본문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중




하여 이 사드 전집으로 기획된 제1권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가 사드 입문용이라거나 앞으로 나올 전집의 신호탄이라는 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드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책에 수록된 아홉 편의 글이 사드를 온전하게는 설명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인데, 외려 아폴리네르에 의해 작성되었던 장문의 해설로 하여금 다소나마 그 역할을 수행케 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만 같다. 그가 사드에게서 발견한 미덕이라면 리베르티나주(libertinage) 충만한 리베르탱(libertin)의 모습이었을 터다. 정신병원 의사에게마저 혀를 찰 만큼, 혹은 내두를 만큼의 '불길한 영향'과 '고질적인 패악'으로 말미암은 '끔찍한 인간'으로 비친 사드를 아폴리네르는 '19세기 내내 별것 아닌 것처럼 치부되었던 이 남자는 20세기를 확실히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칭찬하는데(그 역시 익명을 사용해 사드에 비견할 만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 ㅡ 물론 당장에 불살라버리고픈 심정도 들었을 것이지만 ㅡ 그에게 사드의 글을 읽는 것은 제철 과일을 어석거리며 한 움큼 베어 먹는 것처럼 부들부들한 감촉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독자 된 입장에 선 나로서는 사드라는 인간을 하나의 거대 담론 속에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으나, 언어의 조탁과 탁월한 발상 그리고 도전, 자유, 그가 가진 사상(그저 '사고'라고만 해도 된다)에 있어서만큼은 아폴리네르가 지녔던 애정에 못지않다.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라면 역자가 첫머리에 쓰길 '거북함'과 '희귀한 쾌감'이라 표현한 것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소돔의 120일』에서 블랑지스 공작이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악덕이야말로 쾌락의 원천이라 확신하며 종교는 그저 망상일 뿐이다, 나는 창조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 기질을 억제하지 않는다, 내가 저지르는 죄악은 자연에 도움이 될 것인데, 자연이 내게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죄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런 판국이니 그간 사드가 '부담스러운 짐짝' 취급(현실에서도 그랬다)을 받아왔던 것은 당연한 처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럴 만도 하다. 그는 색을 밝히는 면모와 함께 때때로 이죽대며 궤변도 늘어놓는다. 그러니 거북살스러우면서도 희귀한 쾌감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온전한 이성의 존재인 당신도 이참에 한번 느껴보지 않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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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맛 -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들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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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매운맛을 즐겼다던 마오쩌둥이 「매운 것을 먹지 않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라고까지 했다던데, 일단 혁명은 차치하고라도 지금의 중국요리는 세계적인 성격까지 갖출 정도로 성장했다. 누가 그랬던가, 중국인들은 식탁 다리 빼놓고 네발 달린 것은 다 먹는다고. 그러나 본디 저 옛날부터 미주(美酒)는 있었어도 미식(美食)이란 것을 즐기는 문화는 송대에 이르러서야 발달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환관의 이야기가 흥미로운데, 권세를 부리기 쉬운 환관들이 비정기적인 수입, 즉 뇌물을 비롯해 산해진미와 진귀한 식자재에까지 눈을 돌렸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잃어버린 남성성을 대신한 보상심리였을까? 바깥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고급 식자재는 환관이 관리하는 민간 중개업자를 거쳐 끝에는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다. 이를테면 서태후가 먹는 달걀 하나는 단계적으로 여러 환관의 손을 거치게 되는데 그 금액은 오늘날의 물가로 보면 대략 십만 원에서 이십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환관들이 당대 요리 발전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는 것에서 어느 정도는 그들의 기여를 인정해주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들 덕에 질 좋은 식재료의 경로가 확립되고, 고급 식자재가 요리법과 더불어 시중 음식점으로 퍼졌으며, 궁중에서 만들던 요리가 진화해 더욱 세련된 음식의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ㅡ 글쎄, 아무리 중국요리의 역사가 환관 요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고는 해도 너무한 처사일지도. 어쨌든 다소 지난했던 시기를 건너뛰어 공산당 정부의 베이징 그리고 국민당 시대로 가 보면 중국요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각국의 요리 또한 인기를 모으게 된다. 미군이 있었으니 관련 물자가 여기저기서 흘러들었던 탓이었을 거다. 뜻밖에도 여기서 내가 한 가지의 '꼰대스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첫머리에 언급한 마오쩌둥에게서였다. 그는 생선 머리 탕인 다터우위탕(大頭魚湯)을 즐겨 먹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좀 우습다. 생선 머리를 먹으면 대뇌가 발달하여 똑똑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난다거나 하는 식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생선 머리 탕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문화혁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대통령이 똑똑해지고 싶다며 총명탕(聰明湯)을 들이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혁명의 맛』은 이후에도 대기근과 홍위병, 덩샤오핑, 홍콩요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음식과 맛의 여로에 오른다. 자, 다소 신기하게도 보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동침이 가능해진 중국(특히 베이징)이라고 하면 언뜻 개혁이나 개방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는데, 때로는 옛 맛을 잃어버려 탄식을 자아내게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세련되어지고 또 새로운 맛의 탄생이라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대목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사회경제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변하는 것이겠으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초라한 음식을 먹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 타도를 위한 혁명적 행동으로 인식되던 때는 지났다. 저자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경제와 미각의 발달이 동시에 진행된다고 보았는데 이 책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그렇다고 느낄 수가 있다. 문화의 흐름이란 거대한 강물과도 같아서 인위적인 간섭으로는 막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그의 물음대로 과연 음식 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여기서 중국의 여러 풍경들을 통해 그 답을 어렴풋하게나마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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