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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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 후기에도 '진화'에 대해 적혀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은 분명 『흑백』에서 변했다 ㅡ 그래서 '변조 괴담'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를 더 생각한다. 『흑백』에 이은 이 『안주(暗獸)』에 이르러서 한 번 더 진화(란 표현이 과연 적절할는지는 모르겠다)했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인 주인공 오치카를 보면 확연히 알게 된다. 전작이 어딘지 모르게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인상이었다면 이번에는 무대가 되는 미시마야의 '흑백의 방'에서 더 한 발짝 내딛는다. 바깥이란 현실로. 그러니까 어떤 보이지 않는 필터를 통해 이야기되었던 것이 지금은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언제라도 그것을 열고서 목전에 할 수 있다는 느낌이랄까(꼭 메세나의 성공사례 같다). 다만 작가의 말대로 '괴기소설이면서 이렇게 귀여운 이야기뿐인 거야?' 하는 기분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표제작 「안주」를 치워놓으면 외려 전작만큼 혹은 전작보다 더 사람들의 '다른 마음'이 흉물스레 전해져오니까. 그런고로 흑백의 방의 이야기는, 듣고 버리고, 이야기하고 버리고 ㅡ 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만은 남게 된다. 조금씩 변하면서, 이따금 똘똘 뭉친 정념이 되기도 하면서. 사람을 그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있어 사람은 그것을 없애는 존재이긴 하지만, 사람 자체가 먼저 나서서 그리움과 미움이란 마음을 없앨 수 있을까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지 ㅡ 자꾸만 흘레붙는 게 또 사람의 마음이니까. 얄궂다면 얄궂은 얘기다.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록작 「달아나는 물」과 「안주」에서 그런 애틋한 뭔가를 접할 수 있다. 두 작품에서만큼은 악과 미움에서 선 혹은 사랑으로 그 테마의 이동이 이루어진 듯하다. 물론 여기에도 유령이나 귀신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어쩐지 산뜻함이 느껴진다(심지어 나는 이야기가 '맛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한 편을 본 기분이기도 하고. 「신이든 인간이든 대개 마음이 있는 존재라면 언제가 가장 쓸쓸할까 ㅡ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란다.」(「달아나는 물」) 그런가하면 「안주」에는 구로스케라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사람 옆에서는 살 수 없는 기교한 생명'이 등장해 신자에몬 할아버지를 울리기도 한다(여기서는 냉혈한인 나도 좀 울컥했다). 중요한 건 '생물'이라는 점이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유령이 아니다. 게다가 귀엽다. 그러나 가까이하면 인간의 독한 기운에 쐬어 위태롭게 된다. 내 추측이고 또 책을 읽어야 알 테지만, 좋아하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마음의 정체는 수국 저택에서 도망하지 못하고 죽고 만 하녀의 아이가 아닐는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두운 곳에 외톨이로 살고 있는 생물이라는 의미로 어둡다는 뜻의 '암(暗)'에 짐승을 뜻하는 '수(獸)'를 더해 직접 만든 단어라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이쯤 되면 말할 것도 없이(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와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앞의 두 이야기에 비해 '무서운' 쪽에 속하게 되는데 나는 「덤불...」 쪽이 조금 더 그렇다고 느낀다. 바늘 가게의 장남이 쌍둥이(이름은 오하나와 오우메라고 한다)를 낳는다. 그런데 상인들은 쌍둥이는 집안을 나눈다, 재산을 나눈다고 하여 꺼린다. 결국 대장 노릇을 하는 어머니의 노기에 밀려 쌍둥이 중 하나를 차남의 양녀로 보내 분가하게 하고 분가한 아이는 절대 본가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본가의 아이(오하나)가 죽은 후다. 장남과 차남이 본가와 분가를 합치려는 계획을 세우자 죽은 아이의 귀신이 나타난다. 그 계획을 포기하자 이번엔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오우메를 지키기 위해 인형사를 고용해서(여기서부터 섬뜩해진다) 본가에 두기로 하고 오우메가 하는 것은 밥 먹는 것부터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인형에게도 똑같이 해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둘의 처우가 다르면 인형의 얼굴과 몸뚱이에 바늘이 꽂힌다. 그에 따라 오우메의 몸에도 새빨간 습진이 생긴다. 인형에 꽂힌 바늘이 있던 부분에 똑같이……. 미야베 미유키는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오우메의 습진이 생긴 자리에 희미하게 들었던 멍을 통해 인간이란 생물이 좇는 '다른 목적'과 '다른 마음'을 오롯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오우메 본인의 마음까지도(처음 들었을 때의 멍은 습진에서 나타나는 증상과 비슷하다, 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ㅡ 뭐, 읽어보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만. 비교적 짧게 쓰는 것이 왠지 미안해지지만 「으르렁거리는 부처」는 마을의 관습이란 것을 차용한 거라고 본다. 고립된 산간 마을의 무시무시한 관습 ㅡ 같은 거라면 다른 곳에서도 접한 적이 있는 이야기지만(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에서였던가) 이 소설에서는 다르다. 관습이란 형태를 빌려 몰래 일을 꾸미는 인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습 자체보다 더 무섭다…….


각설하고, 맨 처음 이 『안주』가 진화하고(며) 변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미시마야의 수수께끼 간판 아가씨' 오치카의 모습에서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발전에서도 그렇다. 새롭게 나타난 오카쓰란 여인과 덜 익은 호리병박 아오노 선생의 등장으로 왠지 모르게 미시마야 변조 괴담이 한층 더 와글와글해질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가 습자소 선생(아오노)이 지금부터 오치카와 어떤 관계가 될지는 비밀이라고 한데다가 ㅡ 그럼 『흑백』의 나막신 가게 아들은 팽(烹) 당하는 건가 ㅡ 흑백의 방을 만든 미시마야의 주인 이헤에는 이것이 '백 가지 괴담 대회'라며 앞으로의 이야기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흑백의 방을 향한 ㅡ 흑백의 방에서 출발한 여정에 텐징 노르가이처럼 굳건한 조력자가 될지 그저 그런 빠꼼이가 될지는 제쳐두고라도(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옛날이야기' 속에서의 사람과 사람이 공유하는 마음과 연대감이 지금의 소위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보이는 양상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는 이 에도 시대물을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계속하자 ㅡ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여기여기여기를 보자.


덧) 『안주』는 독자 펀드로 탄생한 소중한 책이다. 독자들에 의해 십시일반으로 모인 5천만 원(열흘 만에!)이란 마케팅 비용은 일대 사건이었고, 이것은 출판사에서 만든 같은 금액의 것과는 의미도 다르고 차원도 다르다. 그야말로 '원기옥'이다.


덧) 원기옥 :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이 사용하는 것으로 손을 들고 생물체들의 기를 모아서 쏘는 기술. 그만큼 협력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이에 따른 신조어로는 '베기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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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1
구사카베 요 지음, 박상곤 옮김 / 학고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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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를 시행하는 의사에게는 '까다로운 치료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잠재의식이 있다.」 「환자의 고통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이기심이다. '죽지 마'라는 말이 때로는 '죽어'라는 말보다 더 가혹할 수도 있다.」 존엄사보다 안락사라는 말은 어쩐지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손』은 문체와 단어구사는 평이한 편이고 때로는 진부한 표현도 눈에 띈다. 또 극 흐름이 원활치 않은 부분도 있으며 참으로 조악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화두와 왜 안락사인가 하는 물음에 접근하는 스릴러 요소가 더해져 근사한 의학 미스터리가 되었다(어쩌면 '의학'보다 더 큰 범주에 해당될지도). 이야기는 스물한 살의 청년이 안락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육체는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젊고 강한 심장은 좀처럼 지치지 않았다. 덕분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계속되었다.(p.14) 안락사는 고령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편엔 생명력이 왕성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 수 없는 젊은 환자들이 있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돈이 들므로 죽는다, 가족 안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바에는 죽고 싶다, 차라리 나는 깨끗이 죽겠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으나 과거 군인이 되기 위해 자원입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면에 경제적 요인이 작용한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게 과연 '자원'이라 불릴 수 있을까. 마찬가지, 이제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락사를 선택하겠다는 사람의 속내를 보자면 온전히 환자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차라리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대체 뭘까. 결국 거기에는 의사의 판단이 더해진다. 환자는 끝내고 싶다고 하고, 의사는 좀 더 버티라고 한다. 의사가 보기엔 아직 더 참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반대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보며 이제는 가망이 없으니 환자 본인에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려는 의사도 있을 거고…….



안락사는 고통 받는 환자를 위한 복음인가, 아니면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선별인가. 모든 생명은 존엄하므로 그 생명만 구하면 된다는 건 의사의 오만이고 무신경한 태도인가, 아니면 더 이상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고통을 보고도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의사의 이기심인가. 그것이 신의 손일지 사신의 손일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하고 어렵다. 결국 늘 같은 딜레마에 빠져 출구가 없는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일본의사회와 새롭게 발족한 JAMA(일본전의료협회, Japan All Medical Association)라는 단체를 등장시켜 그들 간의 알력을 보여주고(JAMA라는 이름을 가진 전혀 다른 단체가 일본에 존재하긴 하지만, 내 짧은 지식으로는 이것 ㅡ 의학 관련 ㅡ 은 실재하지 않는 단체이다) 후반부에 가서 두 단체 모두 붕괴시킨다. 소설을 보면 장진의 영화가 생각날 때도 있고, 거짓 죽음을 가장한 과격한 실험, 사이비 종교 같은 우스꽝스러움, 의료계와 정치를 흔드는 요소도 찾을 수 있지만(끝에는 허망하면서 놀라운 반전도 있다) ㅡ 의료 신질서, 의사의 노블레스화, 의료 정화와 같은 부수적 재료는 그럴싸하게 들린다 ㅡ 일단은 안락사를 다룬 이야기다보니 독자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괴롭고 복잡한 감정이 앞서게 된다. 아래(▼)는 소설에 등장하는 안락사법 제정을 위한 각 안의 골자인데 그 엄격함만 다를 뿐 우리가 쉬 판단할 수 없는 문맥이 상당하다. 편안한 죽음을 맞겠다는 바람의 정당성, 내 생명을 방치하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논리. 내 삶과 죽음의 선택의 자유일까, 아니면 방법만 다른 살인일까.



본인의 의사 확인
A안 : 구두를 포함한 모든 방법이 가능하다. 각서, 컴퓨터나 메일 등도 가능.
B안 : 본인 또는 대리인을 통한 서면 필요. 단, 서식은 상관없다.
C안 : 소정의 서식에 따라 본인이 자필로 기재. 변호사 또는 공증인의 승인이 필요하다.

의사 표명 뒤의 확인 기간
A안 : 1주일.
B안 : 2주일.
C안 : 1개월.

연령 제한
A안 : 20세 이상.
B안 : 40세 이상.
C안 : 75세 이상.

안락사 요건
A안 : 도카이 대학 안락사 사건에서 1999년 요코하마 지방법원이 내린 네 가지 요건.
B안 : A안과 동일.
C안 : A, B안의 네 가지 요건에 더하여 가족의 동의 필요. 주위의 정신적 압력이 없다는 증명, 사회적 · 정신적 빈곤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대상 환자
A안 : 참을 수 없는 고통(육체적 · 정신적인 것 불문)이 있는 경우.
B안 : 참을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경우.
C안 :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동반하는 말기 암에 한정.

의사의 동의
A안 : 의사 두 명의 동의 필요.
B안 : 의사 세 명의 동의 필요.
C안 : 전문의 네 명 및 근무처가 다른 의사의 동의 필요.

보고 의무
A안 : 24시간 이내에 의무적으로 경찰에 신고.
B안 : A안과 동일.
C안 : 6시간 이내게 의무적으로 검찰에 신고. 아울러 의사는 검찰관의 질문에 답하는 형태로 70개 항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 제출.




과연 구두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사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안락사가 필요한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본인이 서면을 작성할 것인가. 환자가 의사를 표명하고 곧바로 안락사를 실행하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겠지만 환자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을 때의 환자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연령 제한에 있어 C안의 경우는 젊은 사람은 더 살아야 하고 노인들은 죽어도 좋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환자에게 있어 주위의 정신적 압력이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란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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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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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왜 자꾸 채플린이 생각나는 거지…… 그래, 그랬다. 그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먼저 있었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히틀러를 풍자한 힌켈이란 인물과 유대인 이발사로 번갈아 등장했었다(여기에는 슐츠라는 인물도 나온다! 심지어 한나까지!). 힌켈과 닮은 이발사가, 여기 『나치와 이발사』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등장한다. 우선 독일인 막스 슐츠가 있고 유대인 이치히 핀켈슈타인이 있다. 이 '슐츠-핀켈슈타인' 공식은 시종일관 샴쌍둥이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둘은 어릴 적 친구였지만 슐츠는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친구 핀켈슈타인과 그의 부모를 사살한다. 히틀러유겐트에서 크리스탈나흐트,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지는 고리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이 대량 학살범인 슐츠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분신(으로서) 핀켈슈타인으로 변모한다. 그러니까 막스 슐츠는 신분을 위장하여 이치히 핀켈슈타인이 되어버린 거다. 그것도 머리와 가슴속까지 진심으로 변한 채! 수용소에서 페놀 주사로 처형을 하던 슐츠는 어느새 아이들에게 비타민 주사를 놓게 되고, 핀켈슈타인을 사살할 때 눈을 보지 않으려 뒤에서 총을 쐈던 그는 이제 택시 앞좌석에 앉아 납치범을 등 뒤로 상대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왠지 미국식 사르카즘이 곳곳에서 엿보이는 이 작품은 스물여덟을 못 채우고 요절한 로커들 같아서 일견 하드코어의 냄새를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막스 슐츠는 빈번하게 변신을 해대며 계속해서 절정을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아이에서 지식이 풍부한 소년으로, 이발사로, SS 대원으로, 대량 학살자로, 유대인 중소 암거래상으로, 그리고 또 당황스럽게도 해방 투사가 되었다. 제 손으로 죽였고 친구였던 이치히 핀켈슈타인의 신분으로 위장해서 말이다. 대체 변곡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달려가서 그대로 부딪치고 싶은 욕구,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욕구, 완전히 집어삼켜서 내 살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폭발적 욕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귀중한 정액이 분출된다……. 그리고 정액을 소진하고 나면, 삼킨 것을 다시 뱉어 내고 싶고, 다시 끼워 맞추고 싶고, 쓰다듬고, 화해하고 싶어진다…….
ㅡ 본문 p.460



『나치와 이발사』는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거짓 할례로 유대인이 된 슐츠,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하려는 배 안에서 한나란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나중에 그녀는 정신이 나간 채 날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에 구금당한다. 그런데 1984년에 만들어진 《버디》란 영화를 볼작시면 거기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병원에서 탈출하려고 옥상으로 올라간 버디가 아름다운 몸짓으로 뛰어내리는 장면. 그래, 그 장면이다. 새처럼, 두 팔을 쫙 펴고서 말이다(버디의 실어증은 이 소설에서 슐츠의 아내로 등장하는 미라로부터 발현된다. 굳이 연결하려면 뭐 그렇다는 거지). 어찌됐든 간에 이런 소설은 가해자가 어떤 대가를 받음으로써 피해자를 위로하는 형태가 되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복수는 나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힐젠라트가 꼭 그렇게 써야만 할까? 아니지, 그건 동어반복이다. 의미가 없는 거다. 소설 속에서 슐츠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외려 병원에서 날고 싶어 하는 한나의 모습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ㅡ 사실 좀 억지스러운 감은 있지만. 게다가 지방 법원 판사 볼프강 리히터와 카드 게임을 하다 격정에 사로잡혀 「이제 아시겠죠, 판사님, 내가 바로 막스 슐츠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슐츠의 모습은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과 묘하게 오버랩되지 않던가. 미친 것 같은 슐츠와 그렇지 않은 독자의 틈새(포의 작품도 마찬가지), 그 공백이야말로 치가 떨리는 폴란드의 숲을 어느 쪽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평화만 있었다면! 그래, 오직 단 하나 평화만 있었다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 하나 그것이 없었다!(p.512) 그래, 그렇게 된 거야. 말하자면 그런 거지.



덧) 원래의 소설은 결말에 주인공 막스 슐츠가 죽고 나서 신과 대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독일어판에서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깊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음을 고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일어판 수정 부분은 후에 출판사(열린책들) 카페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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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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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는 접근성이 비교적 용이한 주제를 택해서인지 스릴러로서는 캐트린 댄스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잠자는 인형』 쪽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으나, 사이버월드의 공간적 특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미스디렉션을 활용함으로써 꽤 멋진 수사극이 되었다. 먼저 컴퓨터가 있는데, 1972년 전 세계의 컴퓨터는 15만 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기계를 다루는 데는 깜빡이는 스위치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 결과 오늘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컴퓨터와 무지막지한 인터넷 속에서 작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모순어법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나 비행기 기내 음식(airplane food)이란 말처럼 서로 명백하게 모순되는 두 단어를 하나로 결합한 합성어를 가리킨다. 중복어법은 모순어법과 정반대이다. 최상의 모순어법에 상을 준다면, 틀림없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용어가 일등을 차지할 것이다.(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디지털이다』) 가상현실은 가공의 것을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것일 수도 있다 ㅡ 이를테면 운전면허 학원의 오락기 같은 물건 앞에 앉아서 주행연습을 한다든지 오락실의 레이싱게임 기계에 동전을 넣고 드리프트를 경험해본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가상현실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공급과 수요가 불분명해짐에 따라 그에 따른 볼트와 너트가 어긋날 수 있다는 것. 『도로변 십자가』는 그래서 이게 어떤 식으로 엇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우선 십자가가 있다.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도로변에 놓아둔 자그마한 십자가. 고약하게도 캘리포니아 1번 고속도로의 가장 안전한 구간에 놓인 십자가와 장미 한 다발은 추모를 위한 것이 아닌 살인 예고장이었다. 이제 십자가는 공포의 상징으로 변모해 고속도로뿐만이 아닌 곳곳에서 발견되기에 이른다. 살인방법? 위에서 말했다시피 인터넷, 블로그와 웹사이트에 남겨진 개인정보를 수집해 생활패턴을 조사한 범인이 차례차례 범행을 저지르는 거다.



실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이라는 허구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공간에는 우리의 개인정보들이 널려있다. 간단히 취미부터 성격, 어떤 타입의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매일 몇 시에 일어나 어느 길로 조깅을 하는지 등등. 소설의 범인은 어렵지 않게 정보들을 수집해나간다. 한 가지 더. 용의자로 지목된 소년은 온라인게임에 빠져있는데 이것도 현실을 모방해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제임스 칠턴이 만든 사이트 <칠턴 리포트>와 접점이 있다는 ㅡ 역시 가상세계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ㅡ 점에서 소설은 시종일관 가상과 현실을 잇고 있다. 두 개의 비누 A와 B가 제조된다고 치고, 둘 중에 A는 훌륭하지만 B는 끔찍하다고 해보자. A는 그것의 훌륭한 화학적 성분을 내세우고 또한 뛰어난 화학자들의 증언을 보태서 광고된다고 하자. 그리고 B는 할리우드의 이름난 미녀들의 얼굴을 곁들여서 그냥 그것이 최고라는 노골적인 문구만으로 광고된다고 하자. 만일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B보다는 A가 더 많이 팔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그렇게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겠는가?(버트런드 러셀 『과학의 미래』) <칠턴 리포트>에 생겨나는 반응과 댓글들은 이러한 논의를 반증한다. 현대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쾌락이 오로지 거대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나 정부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의미심장한 측면이긴 하지만,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그에 버금가는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여가 시간을 기꺼이 포기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만이 잘못된 쾌락의 결함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읽을거리는 신문사가, 우리의 오락거리는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우리의 교육은 국가가, 우리의 정치적 견해는 정당이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모든 활동에서 이제 우리는 고립적인 단위체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 조직에 의존해 있는 존재인 셈이다.(앞의 책) 그런데 변칙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누군가도 인터넷 선을 통해 접속해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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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돌격!! 크로마티 고교』, 『GTO』, 『오늘부터 우리는』을 보며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릴 때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친놈처럼 뭘 그렇게 꺽꺽대고 있냐.」 그 말씀을 들을까 두려워 혼자 있을 때만 읽어야 했다. 그렇게 웃다가 눈물을 흘리며 책을 덮었는데 벌써 3권 째를 다 보고 있었고, 이 양반 이거 안데르센이나 이솝처럼 이 세계의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을 기센데, 하는 생각이 들어 기가 막혔다……. 『북극 허풍담』 시리즈는 북극의 그린란드 북동부에 사는 사냥꾼들의 이야기다. 표지 뒷면 카피에 있는 ‘북극 시트콤’이란 문구를 나는 책을 다 읽고서야 이해했고 3권 이후(4~10권)가 나올 때까지 대체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기다려야할까를 고민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우스우냐하면,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짐짓 진지한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할 때의 그런 종류다. 분명 처음에는 조팝나무 씨만 한 크기에 불과했다. 근데 이게 제정신이 아닌 사냥꾼들에서라면 달라지는 거다. 일단 1권에서 고추 달린 놈들밖에는 없는 얼음덩이 위에 난데없이 사과 도넛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여자 엠마가 등장한다. 엠마, 이 발칙한 계집…… 이라고 하기엔, 그녀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린란드 북동부 남자들을 들었다 놨다 난리굿을 피운다. 그런데 2권에 가서는 가관이다(불쌍한 피오르두르……). 이건 글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 예컨대 이런 거다.

 

 

클릭!

 

 

레우즈는 이곳 북극에 ‘문명’을 가져왔다. 그는 기지에 딸린 오두막 하나를 허물어 그 널빤지를 가지고 화장실을 만든다. 쓸데없이 완곡한 레우즈는 함께 사는 동료 시워츠에게도 화장실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레우즈의 것이기 때문에(이런 심리는 대체 뭐야?). 시워츠는 화장실을 쓰기 위해 ㅡ 맙소사, 북극에선 엉덩이 사이로 강한 바람을 맞으며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대체 왜! ㅡ 그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양동이를 비우게 된다. ‘똥’이 담긴 양동이를. 그런데 이 양동이란 것이 꽁꽁 얼어 있으니 거실에서 화덕의 열기를 쬐어 덩어리 가장자리가 녹아야만 해변까지 가서 버릴 수가 있는데, 일은 거기서 터져버린다. 시워츠가 양동이를 막 불 위에 얹었는데 묶어둔 개들이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그것은 곰을 보고 짖는 소리였음이 확실했기에 시워츠와 레우즈는 그대로 총을 들고 뛰쳐나간다. 그들은 보란 듯이 곰을 잡아 집에 돌아왔다. 그때 이미 양동이 속에서 탁탁 튀는 소리가 나고, 내용물은 거품을 내며 양동이 밖으로 천천히…….

 

 

이것만 있으면 다행이지. 왠지 시워츠만 이런 일을 겪는 것 같아 미안한데, 이것도 시워츠의 이야기다. 어느 날 그가 썰매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얼음덩이 사이의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정말이지)영악한 곰 한 마리가 그가 지나가는 순간 썰매 위로 몸뚱이를 날린 사건이다. 썰매는 박살났지, 개들은 썰매 끈에 엉켜버렸지, 아연실색한 시워츠는 냅다 도망치고 만다. 분노에 찬(!) 곰은 시워츠를 따라 전력질주 하는데, 그는 죽을힘을 다해 뛰면서 방한복을 벗어 옆으로 던져버렸다. 곰은 잠시 멈추고 방한복에 찝쩍대다가 다시 시워츠를 쫓았다. 시워츠는 이미 셔츠를 벗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곰이 가까이 오자 셔츠를 옆으로 던졌다. 곰은 이번에도 셔츠에 눈이 팔렸다가 다시 그를 향해 질주한다. 그렇게 시워츠는 사냥 오두막에 도착할 때까지의 100m 되는 거리를 스트립쇼를 하며 달아난다. 이렇게까지 곰이란 녀석이 비상한 머리를 지녔었나. 놈은 시워츠가 들어간 오두막에서 10m쯤 떨어진 바위 위에 엎드리기도 하고 마침내 그가 잠들자 지붕 위로 올라가기까지 한다! 비장한 장면인데도 왜 이렇게 웃음이 나지……. 『북극 허풍담』은 전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걸 대체 몇 번이나 울면서 봐야 한단 말이냐……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까지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젠장! 이 빌어먹을 더럽게 웃긴 .txt를 .avi로도 만들어줘!」

 

 

덧) 아래의 셔츠는 『북극 허풍담』 출간 기념으로 제작된 거라는데, 운 좋게도 얻어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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