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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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는 접근성이 비교적 용이한 주제를 택해서인지 스릴러로서는 캐트린 댄스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잠자는 인형』 쪽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으나, 사이버월드의 공간적 특질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미스디렉션을 활용함으로써 꽤 멋진 수사극이 되었다. 먼저 컴퓨터가 있는데, 1972년 전 세계의 컴퓨터는 15만 대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 기계를 다루는 데는 깜빡이는 스위치를 누르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 결과 오늘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컴퓨터와 무지막지한 인터넷 속에서 작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모순어법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나 비행기 기내 음식(airplane food)이란 말처럼 서로 명백하게 모순되는 두 단어를 하나로 결합한 합성어를 가리킨다. 중복어법은 모순어법과 정반대이다. 최상의 모순어법에 상을 준다면, 틀림없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용어가 일등을 차지할 것이다.(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디지털이다』) 가상현실은 가공의 것을 마치 현실적인 것처럼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은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것일 수도 있다 ㅡ 이를테면 운전면허 학원의 오락기 같은 물건 앞에 앉아서 주행연습을 한다든지 오락실의 레이싱게임 기계에 동전을 넣고 드리프트를 경험해본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가상현실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공급과 수요가 불분명해짐에 따라 그에 따른 볼트와 너트가 어긋날 수 있다는 것. 『도로변 십자가』는 그래서 이게 어떤 식으로 엇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우선 십자가가 있다.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도로변에 놓아둔 자그마한 십자가. 고약하게도 캘리포니아 1번 고속도로의 가장 안전한 구간에 놓인 십자가와 장미 한 다발은 추모를 위한 것이 아닌 살인 예고장이었다. 이제 십자가는 공포의 상징으로 변모해 고속도로뿐만이 아닌 곳곳에서 발견되기에 이른다. 살인방법? 위에서 말했다시피 인터넷, 블로그와 웹사이트에 남겨진 개인정보를 수집해 생활패턴을 조사한 범인이 차례차례 범행을 저지르는 거다.



실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이라는 허구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공간에는 우리의 개인정보들이 널려있다. 간단히 취미부터 성격, 어떤 타입의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매일 몇 시에 일어나 어느 길로 조깅을 하는지 등등. 소설의 범인은 어렵지 않게 정보들을 수집해나간다. 한 가지 더. 용의자로 지목된 소년은 온라인게임에 빠져있는데 이것도 현실을 모방해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범인이 제임스 칠턴이 만든 사이트 <칠턴 리포트>와 접점이 있다는 ㅡ 역시 가상세계에 펼쳐진 현실이라는 ㅡ 점에서 소설은 시종일관 가상과 현실을 잇고 있다. 두 개의 비누 A와 B가 제조된다고 치고, 둘 중에 A는 훌륭하지만 B는 끔찍하다고 해보자. A는 그것의 훌륭한 화학적 성분을 내세우고 또한 뛰어난 화학자들의 증언을 보태서 광고된다고 하자. 그리고 B는 할리우드의 이름난 미녀들의 얼굴을 곁들여서 그냥 그것이 최고라는 노골적인 문구만으로 광고된다고 하자. 만일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B보다는 A가 더 많이 팔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그렇게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겠는가?(버트런드 러셀 『과학의 미래』) <칠턴 리포트>에 생겨나는 반응과 댓글들은 이러한 논의를 반증한다. 현대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쾌락이 오로지 거대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나 정부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의미심장한 측면이긴 하지만,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그에 버금가는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여가 시간을 기꺼이 포기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만이 잘못된 쾌락의 결함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읽을거리는 신문사가, 우리의 오락거리는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우리의 교육은 국가가, 우리의 정치적 견해는 정당이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모든 활동에서 이제 우리는 고립적인 단위체가 아니라 특정한 사회 조직에 의존해 있는 존재인 셈이다.(앞의 책) 그런데 변칙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누군가도 인터넷 선을 통해 접속해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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