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작별 트래비스 맥기 Travis McGee 시리즈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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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alvage Specialist. 트래비스 맥기의 직업이란다. 그러면서 보수는 의뢰인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것에서 절반. 도둑에다가 사기꾼이다. 더군다나 여자까지 후리고 다니는 꼴이라니(자의건 타의건). 섹스와 폭력이 점철된(?) '전설'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흐름 역시 말랑말랑한 필립 말로와 까끌까끌한 샘 스페이드와도 약간 다르다. 으레 그렇듯 주인공을 도와주는 협잡꾼 장물아비도 하나 등장해 주시고 말이지 ㅡ 이 점에서는 매그레와도 다르군(그럴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구분 짓는 '본격'도 아니니까 그저 능수능란한 문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배빗』에서 속물 덩어리를 맛보았다면 여기서는 천박(이라면 천박)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서. 주인공 맥기를 포함해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마초도 등장하지 않는 본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와서인지 지금은 좀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그의 인상은 미국인의 전형이긴 한데 썩 신뢰 가는 얼굴은 아니라서……. 어쨌거나 맥기가 셜록 홈스를 흉내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까지 쥐어터질 줄은 몰랐다. 상대방을 끝장내는 것도 참 우악스럽기 짝이 없고. 게다가 맙소사, '찰리네 숯불구이'라니(아마도 Charlie Char-Broil?). 명륜동 막걸리집이나 원할머니 보쌈도 아닌 마당에 찰리네 숯불구이라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급작스런 이스트 터닝이라니! (말년에 유격이라니!) 뭐 우리말로 옮겨놓으니까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좀 구수한 감은 있다. 하여간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커트 보네거트가 「앞으로 천 년 뒤의 발굴자에게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은 투탕카멘의 무덤 같은 보물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던졌으니 나로서는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만 하면 되지 않으려나. 마지막으로, 페미니스트가 맥도널드를 읽으려 하면 절대적으로 말릴 것을 당부하면서.



덧) 아래는 UMC의 「자영이」란 곡인데, 『푸른 작별』에 나오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모 사건과는 관련이 없음. 그 사건이 있기 전 만들어진 노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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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꽃, 눈물밥 - 그림으로 아프고 그림으로 피어난 화가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
김동유 지음, 김선희 엮음 / 비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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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간해서는 에세이를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꽃, 눈물밥』은 그림 이야기를 품고 있어 읽기가 가능했다. 좋아하는 것에의 천착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문득 그것만의 형형한 빛을 내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제 흥에 겨워 혼자서 일구어내는 외로운 투쟁이라는 것 또한 안다. ……밖에 눈이 날리든 비가 내리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반드시 내가 이 세계의 톱니바퀴 중 하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굳이 외면하면서까지 침잠한다는 것은, 양껏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물리는 것과 매한가지다. 그래서 어렵다. 화가 김동유는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중 이미지'는 음악으로 따지면 모노가 아니라 스테레오다. 보통 팝아트 작업은 빨리빨리 대량으로 생산하지만 나는 거꾸로 더 아날로그적으로 작업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이중그림(the face homage)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나는 모른다. 단지 재미있고 멋지고 흥미로울 뿐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재미'와 '흥미'가 최고의 찬사이니, 그는 그림에 문외한인 그저 그런 소시민의 마음까지 동하게 만든 셈이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별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을 텐데, 산업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남기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죽고 없는 리오타르의 말을 들으면 더 알쏭달쏭해진다. 「어떤 작품도 우선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하게 될 수 있다.」 김동유의 이중그림도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는 처음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감정을 더 이상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하얀 도화지에 채울 그림은 성공한 화가의 자기 복제가 아닌 새로운 시도'여야만 한다. 나는 『그림꽃, 눈물밥』에서 일말의 교훈보다는 그저 그림을 보았다. 밖으로 움직였다가 분쇄해 다시금 집적되는 '그림꽃'을.



「John F. Kennedy & Marilyn Monroe」

2010, Oil on Canvas, 194x1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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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문
이윤기 지음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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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종교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마는, 온갖 문장이 종교(적인 것들)로 점철되어 있어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어쭙잖게 구절을 읊어가며 막무가내로 전도하려는 예수쟁이들이지 선량한 세속은 아니므로. 더군다나 이것은 허구이긴 하나 그의 이야기이고 그의 삶이긴 하나 거짓의 산물인 소설이며 또 소설 속의 소설도 있고 소설을 위한 소설도 있으니 매한가지다 ㅡ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도 볼라뇨의 음경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그러나 또 해버리고 만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인간은 '5마일 길'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뭐든 피부에 와 닿아야 (거의)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제야 뭔가를 바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용납할 수가 있겠나. 『삼국지』에서 조조가 읊은 시를 뜻만으로 따져 불길한 소리로 해석해 버리고 죽음을 당한 선비와 『하늘의 문』의 '나'라는 인물이 같게 발음되는 이름을 가졌다면 이것은 우연일까. 그러니 작가는 쓰느라 애달팠겠으나 그것은 읽는 쪽도 피차마차 포장마차인 셈이다.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아무리 써봐야 제대로 당도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밀림의 부상자를 태우러 와야 할 헬리콥터가 자기는 죽은 자들만 모집한다며 애꿎은 사람을 주워 훌떡 날아가 버린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은 위대하지 않소. 있긴 할까마는.」 이렇게 뜻풀이를 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한번 삐끗한 자는 영원히 삐끗하는데도? 회귀는 회귀일 때가 아름다운(적어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잡으려는 것과 쫓기는 것이 영원한 술래잡기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단지 사악함, 불안함, 제도,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일인이역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고통을 호소할 데가 없는 까닭이다. 그가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면서. 작가의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삽입된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그것이 에리히 레마르크의 소설처럼 멀끔하게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렇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되 결국은 '(전과)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회귀하는), 헬리콥터의 날개와도 같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은, 좋게 말해서 미친놈이다. 한번 미친개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미친개이듯, 한번 미친놈은 영원히 미친놈이다. 살 이유가 없어서 죽는다면 다소간의 이해는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제 살 깎아먹는 것을 넘어서 남의 뼈까지 거덜을 낸다면 봐줄 수 없다. 주인공 '나'는 그런 작자다. 마스터베이션을 하면 장님이 되고 불순한 생각을 하면 영원히 고통 받으며 가족 중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지옥불에 타게 된다…… 그는 이런 것들이 싫었을까? 천국 아니면 지옥을 달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싫었을까? 자꾸만 남을 부대끼게 하는 뭉텅이 같은 무리들이 싫었을까? 그렇다면 그럴 법도 하다. 그는 신을 모시려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모시려 하는 자였으니. 라즈니쉬 같은 사기(詐欺) 비즈니스맨은 아니었을지언정 「신발과 마음은 문 앞에 벗어놓으시오.」 하고 자신에게 생채기를 내는 능수능란한 사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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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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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 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은,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 영역을 적극적으로 대면해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치사와 같은 정치제도 개혁이나 정서적 이슈에 골몰하면서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과제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왜? 시민 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게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 정부의 책임임에도, 우리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 담론은 '(빌어먹을) 통합'만을 강조했다. 「신들이 없애려고 하는 자, 그자를 신들은 우선 미치게 만든다.」 보라. 저들은 우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에피타이저 격으로 우리를 먼저 미치게 하고 있지 않은가. 1+1=2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희한한 일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어떤 면에서) 멋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의 모든 사회가 자신들을 '민주적'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디즈니랜드를 광고한다. 문제는 디즈니랜드를 만든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기꺼이 이용하는 자들이다.



과거 문재인은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보개혁 진영 역량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정권을 담당한 어떤 그룹만의 힘으로 개혁을 할 수는 없다. 정권과 시민사회 사이에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서로 당기고 밀어주고 요구하고 받아들이고.」 역시 같은 일간지에서 안철수는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백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추상적으로 말하면 정의다.」라고 했고, 두 번째 백신에 대한 물음에는 「계속 그, 그, 그거. 두 번째, 세 번째도 정의!」라고 했다(어쩌다보니 최근 뉴스만 틀었다하면 나오는 사람들만 언급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박근혜의 코멘트는 찾을 생각을 못했다). 여기서 더욱 의미심장한 진중권의 말을 가져와보겠다. 「국민의 주권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시민인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이 비상사태라고 판단하는 권리를 가진 자가 곧 '주권자'다 (...) 주권재민? 세상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니, 웃기는 얘기다.」 이 섬뜩하리만치 서늘한 역설은 어떤 장엄함까지도 느끼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간단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1인 1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 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 간의 상호 경쟁과 협력 등이다.(p.139)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논리인가. 하지만 이론이 좋다고 현실에서도 똑같이 아름다운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한국 노동 운동의 위상 또한 마찬가지다. 권위주의와 싸우는 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갈망하기 때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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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 -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걸작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최종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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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 영화에서 들었던 '러시아인들은 죄다 우울하다'는 말을 기억한다. 나는 여기에 찬성할 이유는 없지만 그다지 반대할 만한 이유도 찾질 못하겠다. 러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스토옙스키를 보자면 흔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세 아들 모두에게 매료되듯이 울리츠카야의 인물들 역시 모두 매력적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우울하게. 단 독창성은 그다지 보이지 않지만 보편성과 시대성이란 측면은 나름대로 인상적이다. 재기발랄한 라이프니츠의 '창(없는 모나드)'도 은근히 엿볼 수 있다. 왜 '은근히'란 표현을 썼느냐하면 인물간의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담대함으로, 때로는 침묵으로 엮여나가는 인물들의 소통은 라이프니츠의 창에 난 틈을 통해 슬며시 들락날락한다 ㅡ 관계의 내재성(internality)과 함께. 어떻게 하면 사람과 사람이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을 이해하고 삶을 이해하는 입장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지는데 여기서도 라이프니츠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도 그럴 것이 『소네치카』의 여러 인물을 보면,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롭게 혹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탄생할 때부터 모두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 질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수록된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에서의 무르의 패악, ㅡ '이 XX같은 닭은 어디 있는 거야? 누구를 속이려는 거야?' ㅡ 그것이야말로 그녀는 처음부터 속아 넘어갈 운명이었고 타자들은 그녀를 속일 운명이었다(그런데 정말 결말은 그렇게 되었을지 어떨지 묘한 기분이다). 내가 표제작인 「소네치카」보다 「스페이드의 여왕」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구태(舊態)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통쾌하게, 거스를 수 없는 숙명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들은 모두 인간관계 속에서도 특히 '가족'을 파고드는데(그것도 가족만을) 피가 섞인 진짜 가족이라기보다 어쩐지 겉도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상당히 위험천만한 알고리즘이다……. 하나 덧붙이자면, 페미니즘과 친숙한 사람에겐 이 작품들이 더욱더 흥미롭게 읽힐 거라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사족) 러시아 문학에서, 음, 그러니까, 그 '이름'에 대한 강박관념은 언제쯤 깡그리 없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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