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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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까 책과 신발, 인형, 더러운 양말, 텔레비전, 우표첩, 색 바랜 매트리스 따위의 사진이 마일스에게 왜 필요한 것일까. 리처드 골드스타인이 부고란에 쓴 기사보다 비교적 덜 삽상하고 덜 정제된 그 사진들이. 허튼소리만 해대는 입정 사나운 꼰대처럼 혹은 임신하자 부풀어 오르는 배를 무시하지 못하고 망가져만 가는 몸에 경악했을지도 모를 메리-리처럼 ㅡ 이런 불행들을 막기 위해 애쉬튼 커처가 했듯 마일스에게도 과거라는 탯줄이 필요했을지도(어떤 의미로든). 잊힐 권리라는, 이 세계에서 휘발되고 싶은, 어찌 보면 추레할는지도 모르는 그 생각이 차라리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명확하고 덜 불건전하다. 그래서 여기에 모리스의 시점이 간섭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할 법하다. 왜냐하면 필라가 말한 대로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가 분(扮)했던 것을 이제는 모리스가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 ㅡ 어쩌면 더 확정적일지도. 전쟁 후 돌아와 팽(烹) 당한 병사들처럼 모리스는 불륜의 귀환병이 되어 팽 당했다. 저들은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 찾으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며 모리스는 자기가 만들고 잃어버린 걸(마일스) 찾고 관찰하지만 섣불리 다다가지 못한다(어느 쪽이건 하루키가 만든 카프카보다는 덜 불손하다). 더군다나 그 빌어먹을 선셋 파크. 잿빛 지붕널에는 금이 가 있고 현관에는 조잡한 난간을 달아 놓은 그 집!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서 사람들이 시계를 찰 필요조차 없는 그 동네! ㅡ 외려 sunrise가 아니라 sunset이었던 것이 다행일까. 메리-리가 낳은 녀석은 상처를 입어 보아야만 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며 연극을 하고 있고 마일스를 낳은 여자 역시 삶에서 연극을 하거나 연극 속에서 삶을 찾는다. 이런 판국에 인간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니까 어떤 식으로든 닥쳐야 한다는 논리는 벤젠같이 역겨울 뿐인 거다. 언젠가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가 (다시) 올 거라는 믿음은 쉽게 부서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최고의 해가 어디선가 갑자기 비죽 튀어나온다는 확신도 없으니까(결말을 늘여 썼다면 이 소설은 엄청난 재앙이 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스가 자신이 쓸 책 제목으로 메모한 <사람들이 책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문학 출판하기>는 <사람들이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증오하는 나라에서 다시 불행을 이야기하기>로 바꾸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그러니까, 모리스의 시점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이건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다). 이 세계가 빼앗아 간 뒤 반환하지 않은, 임의의 선택이라는 말로 잘 포장되어 지금으로도 포화 상태인 그 분기점에서야말로 ㅡ 오히려 자성(磁性)을 띤 대척점을 향해 오래달리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덧) 과거라면 전쟁에 끌려갔을 법한 나이의 필라(그녀가 여자라 하더라도)가 이 소설의 실낱같은 빛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비중은 있되 발언권이 적었다는 것은 마음에 든다. 마일스를 부모의 곁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그녀의 언니라는 설정도 괜찮았고. 빙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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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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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의도한 바는 ‘고헤이지 이야기’의 원형 그대로는 아닐 테고 ― 고헤이지에게 있어 존재의 증명이란 발꿈치를 만지는 것일 텐데, 본인은 제 몸을 만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타인은 그를 만질 수 없다. 고헤이지가 스스로를 이 세계에서 열외로 취급 받게끔 의도한 것인지 타의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됐는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고, 헛방을 표류지(주거지)로 삼은 이유도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이자 가정의 구성원에 몸담지 않고 헛방의 문을 살짝 열어 두어 길쭉한 틈으로 밖을 내다보는 건 아베 고보가 만든 ‘상자인간’ 같은 느낌이다. 상자인간 역시 상자에 뚫어 놓은 엿보기용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기만 할뿐 좀처럼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별안간 들이닥치는 난처함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상자를 벗지 않는다. 고헤이지 역시 헛방에서 나올 기미가 없다. 단, 언제나 밖을 볼 수 있을 정도의 틈은 남긴다. 열외로 있으면서도 완벽한 고립만은 피할 수 있도록. 심술은 부리지 않지만(이게 심술일까), 차라리 잠복소의 경우라면 남에게 작은 도움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건 온갖 추위에 시달려 해충 알을 품은 채 끝내는 태워지고 마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숨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더구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완전히 숨는 것도 아닌 바에야 할 말이 없다. 대동단결해 끌어낼 수도 없다. 만지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래서야 고헤이지가 헛방에 갇힌 건지 다른 사람들이 밖으로 갇혀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이런 판국이니 다쿠로가 극단 공연에 고헤이지를 데려가려는 것도 억지 춘향에 다름 아니다. 고헤이지가 유령 연기만 잘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헛방을 나가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고헤이지는 사양은커녕 무르춤한 기색도 없다 ― 정말이지 ‘상자인간’보다 더하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지만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왜 ‘엿보는’ 것일까. 익명이라는 벽돌 뒤에 숨어있다고는 하지만 그 익명은 온전한 익명이 아니며, 또 언제까지고 방패막이를 끼고 살아갈 수는 없으나 본래 누구라도 보이는 쪽보다 보려는 심리가 강한 노릇이므로, 그러므로 타인을 피사체로 만들지언정 스스로는 엿보기를 당하고 싶지 않은 그 인식, 여기에는 엿보기를 비밀스럽지 않은 비밀 병기처럼 사용하는 까발려진 메커니즘이 있다. 더군다나 처음에는 고헤이지가 엿보더니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다른 이들이 고헤이지를 엿보기 시작한다. 사람과 세계의 싸움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쪽은 세계가 아니라고 했는데, 물과 흙의 결합이 반죽을 낳듯 엿보는 고헤이지를 위시한 사람들은 조금씩 ‘관계’에 대한 작용을 경험해 나간다. 관계는 서로가 뭔가를 교환하기 바라는 여러 가치들이 상충되고 더쳐 그들만의 것이 된다. 엿보기의 필수 요소가 눈[目]이라면 조잘거릴 때 필요한 것은 입[口]이다. 입은 저주할 때만 쓰는 게 아니다. 부드러운 입이든 난폭한 입이든 대립자로서의 입이든 ― 하물며 관조할 때조차도 말할 필요성이 있는 한, 보는 것 말고도 말하는 것 또한 관계에서의 하나의 매개가 된다. 몸[體] 역시 매한가지. 고헤이지가 헛방에 있으면서도 한 치 반의 틈을 남겨 두었던 것은 그곳을 통해 세계로 나가려는 마지막 원망(願望)이었을까. 누군가 말을 걸면 발꿈치를 만지는 것 외에 어깨를 들썩일 줄도 아니, 술래에게 나 여기 있소 하고 자백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댁들과 이렇게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엿보기 당함’이려나.




▲ 호쿠사이가 그렸다는 고헤이지

▼ 『엿보는 고헤이지』를 구입하면 함께 오는 ①교고쿠 나쓰히코 특집 <르지라시> 4호와 ②고헤이지 팝업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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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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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나 화자라고 할 만한 이의 이름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두 소설 모두 그녀들의 입과 생각, 시선만을 차용해 끈덕지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대로 양쪽 모두 다소간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헨리 제임스는 유령인지 뭔지의 존재를 확정짓지 않아서 해석의 여지가 조금 더 많은 반면 『레베카』는 살아있었던 인물을 등장시키고 상대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길을 보다 좁혀 놓았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치 않을 정도로만. 스티븐 킹에 의하면 모든 공포 이야기들은 두 가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공포가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악을 행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과, 공포가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벼락처럼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야기들. 『레베카』는 분명 후자로 여겨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 방에 강펀치를 날리지는 않고, 이를테면 소설이 거의 절반 이상 진행될 때까지 공포의 원흉을 그대로(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화자 밖에 배치해 놓는다 ― 흡사 브램 스토커의 소설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수작을 거는 것과 비슷하게, 댄버스 부인이 ‘나’의 자살을 종용하는 대목은 공포의 전초전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음과 동시에 공포 자체이기도 하다. 『레베카』에는 공포물을 좋아하는 남자들이라면 언제까지고 싫증내지 않을 겁탈 장면 따위는 없지만 독자가 으레 체험하게 되는 반사회적 행위를 집어넣은 뒤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서 차분히 죽은 자를 끄집어낼 준비를 한다. 여기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풀과 꽃과 나무로 묘사된 맨덜리 저택의 미로 같은 구조는, 다소간 비경제적으로 보이는 ‘나’의 심리 묘사를 뒷받침해 주는 버력이 되며 지적 생명체로 하여금 좌뇌와 우뇌를 위아래로 쪼개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혼란스레 만들기도 한다(주인공이나 독자나 고비를 넘기자면 꽤나 고통스럽지만). 집이란 물건은 때로는 여자들에게 있어 왕국과도 같다. 이 말할 줄 모르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녀들이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교활하고 소름끼치는 장소일 수 있으며 주인도 모르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무도회장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자인 ‘나’는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끼는데다가 온전한 집주인 노릇조차 하지 못한다. 전 주인인 레베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일 뿐이며, 외려 그 집 때문에 파멸당할 위기에 봉착하고 마는 거다 ― 드 윈터도 ‘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맨덜리 저택에서 혼자 지내는 게 두려웠던 것이 아닐는지. 어쨌든 ‘나’는 처음 보는 남자와 순식간에 결혼해 버리는데(①대체 왜 영국의 여류작가들은 그토록 결혼에 목을 매는가, ②작가가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결혼 후의 ‘나’는 반 호퍼 부인과 편지 한 통도 주고받지 않는다 ― 아니면 내 쪽에서 잊어버렸든지), 죽은 레베카의 악의는 살아있는 댄버스 부인으로부터 발현되므로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때로는 결혼 상대인 남편과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추 세 개짜리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어도 사람은 모르는 거다. 과거와 현실의 접점을 형성하는 것은 우연찮은 외부의 것일지라도 그 과거를 있게 만든 건 정장의 주인공에 다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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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브레스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3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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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까지 국내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는 『스노우맨』, 『레오파드』, 『레드브레스트』 총 세 권인데, 가장 최근 나온 『레드브레스트』를 맨 위로 올려놓고 싶다. 『스노우맨』과 『레오파드』가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하며 스릴러가 가진 자랑거리를 마음껏 풀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지만, 『레드브레스트』가 지닌 충실한 서사는 단연 발군이다. 요 네스뵈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자원입대해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서 싸웠다는 것, 또 반대로 그의 어머니와 외가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독일군에 대항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를 잇는 장대한 서사가 있었기에 이 『레드브레스트』가 탄생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가 붕괴된 상황에서의 독일과 소련 사이에 낀 노르웨이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독일군과 레지스탕스로 다시 과거와 현재로 양분된다. 여기에 『스노우맨』에서처럼 유전이랄까 정신적 질병이라는 매개가 끼어들어 좌우로 나뉘어 구분된 것들을 넘나든다. 87분서 시리즈로 유명한 에드 맥베인의 『살인의 쐐기』는 무대극으로 만들어질 뻔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 프로듀서와 회의를 하던 중 그가 이건 통속극이 아니냐고 하기에 맥베인은 『햄릿』 같은 작품이라도 되는 줄 알았냐며 반문했다고 한다. 그는 프로듀서가 통속극은 하고 싶지 않으며 보다 진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말에 “알았소. 잘 가시오.” 하고는 이야기를 끝냈단다. 『레드브레스트』는 어떨까. 물론 『햄릿』 같은 작품은 아니다(그렇다고 『햄릿』이 엄청나게 뛰어난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통속극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깎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통속극의 가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레드브레스트』는 통속극의 그것과 약간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네스뵈가 라켈을 반쯤만 지켜 주었다는 점과 엘렌 사건의 범인을 뒤로 미루었다는 점에서는 좀 악랄하다는 느낌도 있긴 하지만. 과거 2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노르웨이 청년들과 현재 암살을 위한 라이플을 넘나드는 이 소설은 나치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버무린 작품이다. 이는 얼마 전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빈 필하모닉이 나치 정권에 부역했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과는 다르다. 소설 속의 청년들은 나치 정권에 부역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故 이윤기의 장편 소설 『하늘의 문』에 삽입된 단편 「하얀 헬리콥터」처럼 『레드브레스트』 곳곳에 등장하는 1940년대는 소설을 그대로 관통하며 현재를 대변한다. 죽은 시체 한 구가 이야기 전체를 뒤흔드는 것만 제외하고는. 또 『레드브레스트』의 과거는 레마르크의 작품에서와 같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현재로 이어지는 미스터리를 심어 놓았다. 왜 노르웨이의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조국을 지키려고 독일군에 동조했는지, 그리고 현대인의 일부 왜곡된 시각이 그들의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이제 이 소설을 읽는 것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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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2
자크 스트라우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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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나. 그래도 일단 내 쪽에서 접어줘야 할 것은 잭이 그 나이에 샴푸 병으로 자위를 했다는 건데, 이것만 봐도 나보다는 행동 발달이 좋긴 하다 ― 나이도 나이지만 대체 샴푸 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알고 싶긴 한데). 행동 발달이 좋다는 건, 지(智)와 덕(德)까지 겸비할 수 있다는 건데, 나로 말하자면 지덕체에서 체(體)가 맨 앞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잭을 지지할 수 있는 요건은 갖춘 셈이다. 이것은 자신의 신체를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예컨대 조콘다의 눈썹 같은 거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없다면 왜 없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 것. 이 세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동작하고 있는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이런 세계에 발을 디밀고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샴푸 병으로 자위를 안 할 수 있을지. 나는 전반적인 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그것을 계기로 이전에 몰랐던 것을 배우게 되고, 나중에는 고통과 상실을 거쳐 서글프고도 멋진 과거를 추억하고야 마는, 그러니까 썩어 빠진 싸구려 성장 소설이라면 질색이다. 잭이 처한 세상이 『구원』의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이 소설도 그렇게 됐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물론 나에게). 『구원』에 티핑 포인트는 없으며, 그것의 유의미한 가능성조차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덜떨어진 이스터 에그나 꾀바르지만 개개풀린 자질구레한 각론이 (그의 말에 의하면) 부비 트랩처럼 산재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일단 싫어하게 되면, 이것은 거의 변할 수 없게 굳어 버리곤 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망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 ―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 하더라도 ― 를 비교하고 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치다. 마치 지구 멸망은 영화나 소설에서만 등장하므로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인간이란 족속은 본질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었다. 불행을 입은 타인이 죽을 정도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 한은 그렇다. 반대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 친구 페트뤼스가 했던 것처럼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내 물건을 주물럭거리는 정도의 위험천만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라는 건 (반쯤은) 농담이고, 자기보다 멋지게 보이는 남자에 대해 묘한 질투심이 들어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 더군다나 그에게 나의 치부가 드러났다면 말할 것도 없다. ‘생긴 대로 살자’ 식의 사고방식을 탑재해 살고 있는 나로서는 온전히 용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의 이런 복수 행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굉장히 멋진 여자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굉장히 멋진 남자는 도리어 멀리하게 되는 심리 말이다(여자도 매한가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식의 같잖은 사유의 남발이라면 『구원』은 망한 것임에 다름 아니겠으나, 이런저런 사람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남아공의 상황이 더해짐으로써 마뜩잖은 것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수지, 수지를 갖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자신이 수지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모르는, 발육이 덜된 파락호의 느낌이랄까. 내가 보기에 잭과 수지는 평행선 두 개다. 퍼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왜? 열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냔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러길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라던데, 아마도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 세계는 당신의 불알을 잡고 늘어질 것이므로 미련퉁이처럼 핼금거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나를 잡아채려는 인간들을 떼어 내려고 할수록 그 손들은 더 옥죄어 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부비 트랩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 흑묘(흑인)건 백묘(백인)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허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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