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망아지.불만의 겨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존 스타인벡 지음, 이진.이성은 옮김, 김욱동 해설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벡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노동자와 대공황 그리고 그에 끌어오는 신화나 성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분노의 포도』의 오키(okie)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비참한 사유로 보자면 그와 비스름한 양상을 띠고 있기는 하다. 물론 우리의 진저맨 시배스천 데인저필드에 비하면 여기 등장하는 이선은 조금 더 우울한 낡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을 알아채지 못하는 반거충이일지도 모른다 ㅡ 「싸워야만 합니까?」 「물론이다. 그리고 속삭이지 마라.」 그러니 더더욱 이선 앨런 홀리(Ethan Allen Hawley)로서는 다른 홀리(Holly)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는지도 ㅡ 페렉이 그의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human과 thing의 원형은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되어 왔던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주인공 이선의 고자질이나 다름없는 고발과 거짓으로 빼앗은 땅, 그리고 자살 기도까지의 유일한 약점은 허울이라고 할 수 있을 명예와 체면, 물질에 도로 빼앗긴 그 스스로의 나약함이다. 인맥으로 얻은 '대위 E. A. 홀리'는 쓰라린 과거의 깃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식 체계는 다음과 같다. ①모건과 록펠러 같은 금융의 달인들은 그저 돈 자체만을 원했기에 돈을 번 것이므로 자신들이 불러낸 유령에게 겁을 먹은 나머지 그것을 매수하려고 애를 쓴 것일 터다. ②아내 메리에게 돈이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다. ③나는 왜 비위가 상하면서 썩은 달걀의 뒷맛만 남았나? 골칫거리나 혼란, 노력 따위는 전혀 바라지 않고 그저 게으름에 불과한 소극적인 친절만 징그럽게 가득 차 있구나 ㅡ 이선은 스스로에게, 잡아먹는 자는 잡아먹히는 자보다 부도덕한지를 묻고는 결국에는 모두 잡아먹히고 말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불만의 겨울』은 제목처럼 계속해서 봄이 오지 않는 불만으로 충만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공산이 크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나아갈 수 없는 제로섬에 갇혀 있기 때문이며 결코 만날 수 없을 불협화음만이 그득한 아귀다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윤활유가 끈적거리는 12구경 엽총을 꺼내고 세월의 더께가 낀 5호 산탄 총알을 몇 개 찾았다. 오후 나절 뒷계단에 앉아 있다가 토끼 두 마리가 나란히 보이자 한 방에 명중시켰다. 그러고는 털북숭이 사체를 커다란 라일락 나무 아래에 묻었다. 속이 괴로웠다. 생물을 죽이는 데 서툴러서 그런 것뿐이다. 남자는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학살이나 시체 묻기, 심지어 사형집행을 하는 것에도. 고문도 익숙해지면 그저 직업에 불과하다 (...) 아마도 창조를 통해 균형을 되찾으려고 파괴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년 전 알게 된 용어로 플루토노미(plutonomy)가 있었다. 그것은 암흑물질(dark matter) 이론, 땀의 균형(sweat equity) 이론, 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 이론과 함께 미국 경제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4대 이론 중의 하나였다. 그중 플루토노미는 소득과 부의 편중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쓴 이 『플루토크라트』를 통해 다시 한 번 플루토(plutos)란 단어를 듣게 되었다(물론 맑스도 함께 떠올리게 되고). 그리고 책을 읽자마자 존 스튜어트 밀의 역사적인 말을 듣게 된다. 「부를 창출하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진보는 항상 지주들의 소득을 높이고,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문제나 소비와는 상관없이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공동체 지분을 선사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재산은 끊임없이 증가한다. 아무런 일이나 위험, 또는 절약하려는 노력이 없어도 그들의 부는 말 그대로 자는 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 소득 불균형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이어지는 이때에 어쩌면 밀의 말은 조금은 달라진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1%와 99%의 대립이 과거의 그것이었다면 플루토크라트는 그 1% 안에서도 0.1%와 0.9%를 나누는 잣대로 작용하고 있는 까닭이다. 소위 '일하는 부자'라는 점. 물론 한국의 그것과는 접점이 없을는지 모르겠다. 플루토크라트는 부와 권력의 앞에 자수성가라는 단어가 동반될 수 있으나 이쪽은 자수성가보다는 대물림에 의해 형성되고 있으므로 ㅡ 『플루토크라트』의 북 트레일러에는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이 등장하고 있다. 「있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리라.」 세계 경제 속의 플루토크라트들은 (규모는 차치하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국가의 정책 방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엄청난 재산으로 독재자에 맞서거나 그 재력으로 선거 운동에 직접적인 후원을 하는가하면 공공 기관 혹은 이데올로기에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정치적 입장이나 부와 권력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의 행보는 썩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사악하게만은 보이지 않는, 이를테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스스로가 플루토크라트이기도 한 워런 버핏은 정치인들을 향해 세율을 높일 것을 촉구한 바도 있다 ㅡ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을 도발한 쪽은 나의 계급, 즉 부자 계급이며, 우리는 승리를 거두고 있다.」 「이제 우리 부자들을 그만 위하고, 나 같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으라.」 세금이라면, 플루토크라트라 보기엔 어려울지 모르나 아일랜드로 세금 망명을 떠났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간 바 있는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우스꽝스러운 사례가 있다(아,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어떻게 되었는가).


플루토크라트들은 그대로 쭉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쥐고 성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눈앞의 탐람에 빠져 자신들을 탄생시킨 사회 체제와 번영의 토대를 뭉개버릴지도 모르며, 그들의 모습(이랄까)은 0.9% 혹은 99%의 사람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특권의 천박한 측면은 이럴 때에 드러난다.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들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신문지 회장, 라면 상무, 빵 회장 역시 '그들'일까?). 심리학을 다루는 연구원들의 실험과 코멘트는 다음과 같다.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보다 더욱 비도덕적으로 행동한다.」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욕망을 더욱 긍정적이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시 비도덕적인 행동을 자극하는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전체의 일부이길 바라는 실험 결과는, 값싼 구형 자동차를 모는 운전자들보다 고가의 신형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이 두 배나 더 많이 다른 차량과 보행자들의 진행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현실에서 소득이 더 높은 사람들일수록 가상의 입사 지원자들이 낮은 연봉을 수락하도록 만들기 위해 속임수를 더 많이 써 경영자들에게 많은 보너스를 안겨 주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자신이 부자라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동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소득 불균형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위 20%와 상위 20%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에 박수를 보낸다」로 시작하는 글을 발표한 어느 외환 및 채권 중개인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니 '나머지'란 접두어가 필요한 99%(99.9%)의 사람들은 어쩌면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거금 100만 달러』의 주인공 레뮤얼 피트킨과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했잖아요. 저는 죄가 없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걸 입증할 돈이 없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치와 전쟁이란 명제라면 우리는 이미 소설 『나치와 이발사』나 영화 《버디》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로 인해 충분히 악마 같은 소설과 영화들을 접했으면서도 늘 (어떤 의미에서건) 전쟁과 상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ㅡ 인간이 꿈의 실현을 욕망한다지만 실은 그 욕망 자체를 욕망하고 있는 거라면 어떨는지. 그런 측면에서라면 소설 속 찰리의 대사가 의미심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빤한 일일 것이다. 그는 친구의 집을 찾다가 작고 까만 개를 치어 죽인다. 우도는 전에 봤던 개인지 유기견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찰리의 대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차에서 내려서 자세히 살펴봤거든. 같은 놈이었어.」 우도의 내면은 시종일관 간섭받는다. 그는 출구를 찾았다고 결론지으려는 찰나 복마전에 빠진 것만 같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인텔리겐치아란 총을 든 겁쟁이마냥 입놀림으로 혁명을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인데, 체호프가 망쳐 버린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총임에 다름 아니다. 꼭 모든 총이 발사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발사되지 않는 총도 있을 것이고, 발사되지 못하는 총도 있을 터다. 그러나 이 우도라는 인간은 스스로가 인텔리겐치아도 아니고 혁명을 하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행동하는 투쟁가도 아닌 바에야 이런저런 불평을 할 만한 계제도 아닐 것이며 실제로 그는 앞으로 발사되지 못하는 인물임에 틀림없으므로. 주인공 우도 베르거와 페달보트 임대업자 케마도의 아귀다툼은 정말이지 난센스라고 봐도 좋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나 크리스탈나흐트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하다못해 모든 세계가 다른 세계를 인용하듯 인간이란 족속도 ㅡ 인간의 기억이란 녀석도 ㅡ 하느작하느작 자신을 집단에 인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강자가 된 집단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 어떻게든 그 집단에 속하려고만 하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반쪽짜리 세계를 보는 관념 운동 같은 것이다. 우리의 우도 베르거는, 그 스스로가 사물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것들이 자신을 날카로이 겨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먹물로 쪼아대는 타자기 같은 해변이 있고 거기 끝에는 절대 맞힐 수 없도록 고안된 십자말풀이가 있는 것만 같다. 즐거이 풀 수 없는, 정교하게 짜인 시간표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이 즐기고 가.」 우도는 (영원히 그래야 할 것처럼 보이는) 케마도의 해변에서 이상야릇한 말을 듣는다. 오늘도 무사히? 과연 무엇을? 더군다나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 본 우리라면 다음의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탐욕, 파벌 싸움, 위선, 배반, 잔혹성, 분노, 광기, 증오, 시기, 정욕, 적의, 야심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인 무수한 음모, 반란, 살인, 대량 학살, 혁명, 추방으로 가득하오……. 나는 당신네 원주민들 대부분은 땅 위를 기어 다니도록 자연이 허용한 작고 추악한 해충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소.」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 꼭 잃어버린 탄피마냥 이상한 곳에서 어슬렁거리기나 할 줄 아는 자들. 그들. 그것. 우도와 케마도가 보여주는 것은 그야말로 항해용 정밀 나침반처럼 가차 없다고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멱살이 잡힌 채 오늘의 자신에게 경고 사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기나 했던 것일까? 잔뜩 무뎌진 외제 플라스틱 포크, 자양강장제 병에 담긴 꽁초들, 이런 자질구레한 생활의 각론 같은 것들이 결코 자신의 의자를 빼앗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글쎄,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서 있으면서 자꾸만 타자에 의해 자신이 논해지고 평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ㅡ 에셔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탈주와 매한가지다. 누군가 인간 하나가 죽어 나가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김득구와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죽은 이유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자가 말한다. 그렇게 나한테 적대적인 개자식은 처음 봤어. 혹은, 여보, 미안하지만 이 잘생긴 남자하고 나가서 섹스 좀 하게 자리 좀 피해줄래? 남자가 말한다. 이런 엉덩이는 처음이야. 혹은, 당신의 집게손가락이 필요해요, 집게손가락하고 마주 붙일 수 있는 엄지손가락도. 이사도라의 패턴은 부코스키의 『Women』도 아니고 알 켈리식 「Sex Me」도 아니다. 그렇다고 눈이 왕방울만 한 밀라 쿠니스가 옷을 벗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되려는 남자와는 절대 얽히지 말라는 주드의 말은 틀렸다. 물론 예술가가 되려고 애쓰는 자들은 미친놈일 게 빤하지만 정신분석의보다는 낫다는 것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탈로 가득 찬 곳이니 더 빨리 먹으라는 잠언만이 『비행공포』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잘 알려준다. 문제는 이사도라가 원하는 신비의 제2파운데이션이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방정식은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포르노에는 다음과 같은 널리 알려진 패턴이 존재한다. ①과외 여선생이 있다. 학생은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칭얼댄다. 여선생이 알려 주겠다며 왕가슴을 들이밀고 학생의 옷을 벗긴다. ②근육질의 트레이너가 있다. 여자에게 운동법을 알려 주며 여기저기를 더듬는다. ③수도관이 고장 난 집 여주인이 정비공을 부른다. 정비공은 맨몸에 멜빵바지만 입고 여자가 혼자 있을 때 집을 방문한다. ④여자 환자가 병원에 간다. 의사는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며 환자에게 상의를 벗기를 요구한다. ⑤친구네 집에 놀러 간다. 친구는 없고 그 누나가 샤워를 막 끝낸 채 머리를 말리고 있는 것을 마주한다. ⑥여직원이 사장실에 들어간다. 사장이 결재서류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준다며 몸을 부딪쳐 온다ㅡ.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그녀의 교집합을 보여주는 밴 다이어그램은 없다. 다만 저들처럼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같은 것을 하며 살아나가라는 명제만 있을 따름이다. 요는 어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엔 섹스할 뿐이니까 말이다. 오르가즘을 찾아 헤매는 비행에의 공포, 열정적으로 땀 흘리는 자들은 언제나 옳다는 관념, 매캐한 공기 속에서 맹동주의에 빠져보는 것. 이사도라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이지만 보편적인 현상의 범주에서는 한쪽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위험한 발상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모양새는, 어름어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쥐나 새는 물론이고 침묵조차 다 알고 있는 메커니즘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예의'라는 것에는 이쪽도 할 말이 없다). 이사도라는 적어도 ㅡ 저 옛사람의 말을 빌려 떠들어대자면, 노예적이지 않고 자주적이고, 보수적이지 않고 진보적이며, 은둔적이지 않고 진취적인데다가 쇄국적이지 않고 세계적인 동시에 허식적이지 않고 실리적이다. 그러나 단 하나, 과학적이지 않고 공상적이기 때문에 뼈와 살들의 환각 잔치에서 헤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공상은 이사도라의 세계 안에 갇혀 움직이는 생명처럼 소유자와 같이 커다란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으나,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 짓(!)을 그만둘 날이 오기는 할까? 그녀의 눈에 보이는 저 석유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도로가 여전히 활주할 수 있는 번들번들함을 과시하고 있는데도? 살랑살랑 걷는 튼튼한 다리와 엉덩이가 감가상각 따위 할 수 없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글쎄, 그래도, 입놀림으로만 혁명을 하는 인텔리보다는 낫지 않나.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읽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신주쿠는 등장인물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진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 년간 살아 보니 처음 발을 들이밀 때와는 달리 점점 집 밖의 아스팔트가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산에 오르면 모텔 불빛과 교회 십자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은 아감벤이 언급했던 도시(city)가 아닌 수용소(camp)라는, 시쳇말로 개 같은 기분이 그때는 절실히 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라 료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그에게 원한 감정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억하심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 사실 그것은 전작을 쓰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순한 조바심에 지나지 않으므로(하라 씨, 사이토 다카오를 본받으시기를) ㅡ 덧붙여 사와자키가 의뢰인, 정확히 말하자면 의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까지 100쪽이나 할애하는 자는 하라 료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보지 그랬나, 왜?


사와자키가 천이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일찍 잠에서 깨고 어느 날에는 또 그 천이백만 가운데 한 명이 된 기분으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불특정 다수 ㅡ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라는 틀 안에서 호혜 또는 일정한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할된 개인에 머무는 조건 속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사실)을 준다. 그러나 그가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자칫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을 이런 감상은 모두 깨어지고 만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라면 적이란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라는 슈미트의 말은 일치점이 없을지 모른다. 당연히 사와자키의 세계에서의 적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인 동시에 경쟁상대일 게 빤할 것이므로.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사와자키도 무척이나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워대고 있으나 우리 또한 반드시 보들레르처럼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담배 대신 다른 것을 넣어보기로 하자. 『안녕, 긴 잠이여』는 일 년 넘게 도쿄를 떠나 있던 사와자키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ㅡ 시리즈의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는 늦가을, 이어지는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초여름이었다 ㅡ 사무실에 복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의뢰인도 아니고 심부름꾼에 불과한 수상쩍은 사내를,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라 료는 챈들러가 주장한 리얼리즘 속의 탐정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고고하게 비열하지도 때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는 떠나야 한다 (...)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 그는 조직 보스의 여자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처녀를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비슷한 나이 또래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ㅡ 거친 재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감각, 위선에 대한 혐오, 비열함에 대한 경멸을 표할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줄거리를 쓴다는 것은 무의할는지도 모르겠다(실제로 나는 그것을 떠벌이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지나치게 주절대었다). 심지어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서지정보나 출판사 홈페이지에조차 친절할 정도로는 나와 있지 않다. 하드보일드는, 이를테면, '하드보일드'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지나친 '담배'에 우리는 무엇을 대입할 수 있을까.


덧) 그럼에도 사와자키 시즌1이 이 작품으로 끝난다는 정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사가라로부터 빌린 오만 엔을 어쩔 셈인 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