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제국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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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와 전쟁이란 명제라면 우리는 이미 소설 『나치와 이발사』나 영화 《버디》와 같은 매개체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로 인해 충분히 악마 같은 소설과 영화들을 접했으면서도 늘 (어떤 의미에서건) 전쟁과 상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ㅡ 인간이 꿈의 실현을 욕망한다지만 실은 그 욕망 자체를 욕망하고 있는 거라면 어떨는지. 그런 측면에서라면 소설 속 찰리의 대사가 의미심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빤한 일일 것이다. 그는 친구의 집을 찾다가 작고 까만 개를 치어 죽인다. 우도는 전에 봤던 개인지 유기견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찰리의 대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차에서 내려서 자세히 살펴봤거든. 같은 놈이었어.」 우도의 내면은 시종일관 간섭받는다. 그는 출구를 찾았다고 결론지으려는 찰나 복마전에 빠진 것만 같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인텔리겐치아란 총을 든 겁쟁이마냥 입놀림으로 혁명을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인데, 체호프가 망쳐 버린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총임에 다름 아니다. 꼭 모든 총이 발사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발사되지 않는 총도 있을 것이고, 발사되지 못하는 총도 있을 터다. 그러나 이 우도라는 인간은 스스로가 인텔리겐치아도 아니고 혁명을 하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행동하는 투쟁가도 아닌 바에야 이런저런 불평을 할 만한 계제도 아닐 것이며 실제로 그는 앞으로 발사되지 못하는 인물임에 틀림없으므로. 주인공 우도 베르거와 페달보트 임대업자 케마도의 아귀다툼은 정말이지 난센스라고 봐도 좋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나 크리스탈나흐트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하다못해 모든 세계가 다른 세계를 인용하듯 인간이란 족속도 ㅡ 인간의 기억이란 녀석도 ㅡ 하느작하느작 자신을 집단에 인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강자가 된 집단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 어떻게든 그 집단에 속하려고만 하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반쪽짜리 세계를 보는 관념 운동 같은 것이다. 우리의 우도 베르거는, 그 스스로가 사물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것들이 자신을 날카로이 겨냥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먹물로 쪼아대는 타자기 같은 해변이 있고 거기 끝에는 절대 맞힐 수 없도록 고안된 십자말풀이가 있는 것만 같다. 즐거이 풀 수 없는, 정교하게 짜인 시간표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이 즐기고 가.」 우도는 (영원히 그래야 할 것처럼 보이는) 케마도의 해변에서 이상야릇한 말을 듣는다. 오늘도 무사히? 과연 무엇을? 더군다나 『걸리버 여행기』를 읽어 본 우리라면 다음의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탐욕, 파벌 싸움, 위선, 배반, 잔혹성, 분노, 광기, 증오, 시기, 정욕, 적의, 야심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결과인 무수한 음모, 반란, 살인, 대량 학살, 혁명, 추방으로 가득하오……. 나는 당신네 원주민들 대부분은 땅 위를 기어 다니도록 자연이 허용한 작고 추악한 해충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종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소.」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 꼭 잃어버린 탄피마냥 이상한 곳에서 어슬렁거리기나 할 줄 아는 자들. 그들. 그것. 우도와 케마도가 보여주는 것은 그야말로 항해용 정밀 나침반처럼 가차 없다고 생각된다. 과연 그들은 멱살이 잡힌 채 오늘의 자신에게 경고 사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기나 했던 것일까? 잔뜩 무뎌진 외제 플라스틱 포크, 자양강장제 병에 담긴 꽁초들, 이런 자질구레한 생활의 각론 같은 것들이 결코 자신의 의자를 빼앗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글쎄,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서 있으면서 자꾸만 타자에 의해 자신이 논해지고 평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ㅡ 에셔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탈주와 매한가지다. 누군가 인간 하나가 죽어 나가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김득구와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죽은 이유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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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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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말한다. 그렇게 나한테 적대적인 개자식은 처음 봤어. 혹은, 여보, 미안하지만 이 잘생긴 남자하고 나가서 섹스 좀 하게 자리 좀 피해줄래? 남자가 말한다. 이런 엉덩이는 처음이야. 혹은, 당신의 집게손가락이 필요해요, 집게손가락하고 마주 붙일 수 있는 엄지손가락도. 이사도라의 패턴은 부코스키의 『Women』도 아니고 알 켈리식 「Sex Me」도 아니다. 그렇다고 눈이 왕방울만 한 밀라 쿠니스가 옷을 벗는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되려는 남자와는 절대 얽히지 말라는 주드의 말은 틀렸다. 물론 예술가가 되려고 애쓰는 자들은 미친놈일 게 빤하지만 정신분석의보다는 낫다는 것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약탈로 가득 찬 곳이니 더 빨리 먹으라는 잠언만이 『비행공포』에서의 그녀의 역할을 잘 알려준다. 문제는 이사도라가 원하는 신비의 제2파운데이션이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방정식은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포르노에는 다음과 같은 널리 알려진 패턴이 존재한다. ①과외 여선생이 있다. 학생은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칭얼댄다. 여선생이 알려 주겠다며 왕가슴을 들이밀고 학생의 옷을 벗긴다. ②근육질의 트레이너가 있다. 여자에게 운동법을 알려 주며 여기저기를 더듬는다. ③수도관이 고장 난 집 여주인이 정비공을 부른다. 정비공은 맨몸에 멜빵바지만 입고 여자가 혼자 있을 때 집을 방문한다. ④여자 환자가 병원에 간다. 의사는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며 환자에게 상의를 벗기를 요구한다. ⑤친구네 집에 놀러 간다. 친구는 없고 그 누나가 샤워를 막 끝낸 채 머리를 말리고 있는 것을 마주한다. ⑥여직원이 사장실에 들어간다. 사장이 결재서류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 준다며 몸을 부딪쳐 온다ㅡ.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그녀의 교집합을 보여주는 밴 다이어그램은 없다. 다만 저들처럼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같은 것을 하며 살아나가라는 명제만 있을 따름이다. 요는 어떤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국엔 섹스할 뿐이니까 말이다. 오르가즘을 찾아 헤매는 비행에의 공포, 열정적으로 땀 흘리는 자들은 언제나 옳다는 관념, 매캐한 공기 속에서 맹동주의에 빠져보는 것. 이사도라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이지만 보편적인 현상의 범주에서는 한쪽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위험한 발상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가 돌아가는 모양새는, 어름어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쥐나 새는 물론이고 침묵조차 다 알고 있는 메커니즘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예의'라는 것에는 이쪽도 할 말이 없다). 이사도라는 적어도 ㅡ 저 옛사람의 말을 빌려 떠들어대자면, 노예적이지 않고 자주적이고, 보수적이지 않고 진보적이며, 은둔적이지 않고 진취적인데다가 쇄국적이지 않고 세계적인 동시에 허식적이지 않고 실리적이다. 그러나 단 하나, 과학적이지 않고 공상적이기 때문에 뼈와 살들의 환각 잔치에서 헤어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공상은 이사도라의 세계 안에 갇혀 움직이는 생명처럼 소유자와 같이 커다란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으나, 그녀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 짓(!)을 그만둘 날이 오기는 할까? 그녀의 눈에 보이는 저 석유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도로가 여전히 활주할 수 있는 번들번들함을 과시하고 있는데도? 살랑살랑 걷는 튼튼한 다리와 엉덩이가 감가상각 따위 할 수 없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글쎄, 그래도, 입놀림으로만 혁명을 하는 인텔리보다는 낫지 않나.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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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긴 잠이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0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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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읽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신주쿠는 등장인물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진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 년간 살아 보니 처음 발을 들이밀 때와는 달리 점점 집 밖의 아스팔트가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산에 오르면 모텔 불빛과 교회 십자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은 아감벤이 언급했던 도시(city)가 아닌 수용소(camp)라는, 시쳇말로 개 같은 기분이 그때는 절실히 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라 료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그에게 원한 감정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억하심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 사실 그것은 전작을 쓰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순한 조바심에 지나지 않으므로(하라 씨, 사이토 다카오를 본받으시기를) ㅡ 덧붙여 사와자키가 의뢰인, 정확히 말하자면 의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까지 100쪽이나 할애하는 자는 하라 료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보지 그랬나, 왜?


사와자키가 천이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일찍 잠에서 깨고 어느 날에는 또 그 천이백만 가운데 한 명이 된 기분으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불특정 다수 ㅡ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라는 틀 안에서 호혜 또는 일정한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할된 개인에 머무는 조건 속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사실)을 준다. 그러나 그가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자칫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을 이런 감상은 모두 깨어지고 만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라면 적이란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라는 슈미트의 말은 일치점이 없을지 모른다. 당연히 사와자키의 세계에서의 적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인 동시에 경쟁상대일 게 빤할 것이므로.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사와자키도 무척이나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워대고 있으나 우리 또한 반드시 보들레르처럼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담배 대신 다른 것을 넣어보기로 하자. 『안녕, 긴 잠이여』는 일 년 넘게 도쿄를 떠나 있던 사와자키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ㅡ 시리즈의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는 늦가을, 이어지는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초여름이었다 ㅡ 사무실에 복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의뢰인도 아니고 심부름꾼에 불과한 수상쩍은 사내를,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라 료는 챈들러가 주장한 리얼리즘 속의 탐정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고고하게 비열하지도 때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는 떠나야 한다 (...)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 그는 조직 보스의 여자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처녀를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비슷한 나이 또래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ㅡ 거친 재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감각, 위선에 대한 혐오, 비열함에 대한 경멸을 표할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줄거리를 쓴다는 것은 무의할는지도 모르겠다(실제로 나는 그것을 떠벌이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지나치게 주절대었다). 심지어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서지정보나 출판사 홈페이지에조차 친절할 정도로는 나와 있지 않다. 하드보일드는, 이를테면, '하드보일드'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지나친 '담배'에 우리는 무엇을 대입할 수 있을까.


덧) 그럼에도 사와자키 시즌1이 이 작품으로 끝난다는 정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사가라로부터 빌린 오만 엔을 어쩔 셈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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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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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는 어떤 남자는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으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고 했다.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란 제목의 이 곡은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칠레 민중의 저항 가요로 널리 불린 노래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발음하기도 힘든 노래 제목을 들은 이후, 나는 줄곧 이 곡을 mp3플레이어에 넣어서 듣곤 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새로이 읽으니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인텔리겐치아나 혁명 따위의 단어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실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 칠레 민중의 노래가 반증하고 있으므로. 더군다나 여기에 시종일관 간섭하는 것이 바로 '송어(낚시)'의 정체와 의미인 것인데, 어쩌면 이탈로 칼비노가 만들어낸 크프우프크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문장 하나하나도 올무 같다. 브라우티건도 이에 대해 밝힌 것이 있다. 「내 소설 속에서 송어는 사람으로, 장소로, 때로는 펜으로 변하는 등 일정한 모양이 없는 프로테우스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일 수도 있다.」 칼비노의 그것이 시각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브라우티건의 송어 또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엇'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누구나의 문제다. 내 정체를 추적하려고 열어 본 마트료시카가, 알고 보니 와해되어만 가는 통발 속의 외눈박이였다든지 하는, 뭐 이런 자질구레한 각론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살아가는 대로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 책이라면, 지금은 반대로 그 책에 나오는 것을 발췌해 인용하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니. 그러니 따옴표 역사인 거다(원 웨이 미러의 이편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마그마굄, 브라우티건은 그런 것을 찾고 있던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민 K가 뭐라고 했었나? 「선생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서울의 달」의 홍식은? 「Boys, be ambitious!」 알다시피 삶은 팩시밀리로 재단되고 세련된 고급 실크로 꿰매지며 뱀이 허물을 벗듯 짤막한 잔상만을 남긴다. 진드기가 식어 가는 숙주의 몸에서 그 죽음을 알아차리고 홀연히 빠져나가듯이. 「넌 좆 됐어!」라고 말하면서도, 매번 홍식이 외치던 것을 그는 송어를 통해 현현되게끔 계획했을지도 ㅡ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는 조금 다르다 ㅡ 그래서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척이나 이중적이다(이상야릇한 아이디아뜨iDEATH처럼?). 그가 가장 관심이 많다던 죽음, 폐허, 상실이란 측면에서. 물론 반드시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 손으로 망친 것을 회복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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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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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표창원의 『보수의 품격』이나 지승호가 쓴 다수의 인터뷰집을 비롯한 『강신주의 맨얼굴...』 등을 읽어 보았다면 표창원이라는 자의 생각, 인터뷰어로서 지승호가 가진 능력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사법부는 전문성이 없으며 동네 아저씨들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비공식적이며 사적인 자리에서는 연예인이나 대통령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별다른 호칭이 필요 없으므로. 그러나 이것이 표창원이라면, 경찰이었던 그의 입에서 나온 사법부에 대한 비수라면 어떨까. 그는 올곧은 인사이더이고자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 우리는 영화 《인사이더》의 제프리 위건드를 보아서 익히 알고 있질 않나.

여기, 표창원의 일화가 하나 있다. 영국 유학을 끝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영국 경찰은 여고생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근방에 살았던 표창원의 DNA가 필요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자,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수많은 미제 사건과 측근을 사면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용하는 대통령을 보며 그들은 정의를 우습게 본다고 했다. 그까짓 것, 그 정의 지킨다고 비용이 얼마나 들 것이며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이냐, 하는 생각. 정의에 비용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에서는 정의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고 동시에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나는 표창원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범죄나 정의를 대하는 관점에서라면 얼마든지 손을 들 수 있는 것이다. 『공범들의 도시』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지만 주요한 축은 범죄를 통해 본 한국 사회를 진단해보고자 하는 것일 게다. 이를테면 ‘대문을 열지 못하는 한국 경찰’에 대해 언급하며 시스템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이나 영국 등지에서는 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땐 가차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고 했다. 만약 허위 신고이거나 오인이었다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이 난다. 그럼 그 뒤는? 시에서 보상하게끔 되어있는 것이다. 경찰은 법 집행에 대해 수행 의무가 있고, 피해에 대해서는 손실보상을 하지만 고의나 과실이 아닌 한 법의 보호 하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우리의 경찰은 친절하게 열어 달라고 부탁하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사람이 노상 ‘아, 예, 그렇군요’ 하며 지시에 따를 리 없다. 문을 부수면 그 행위의 주체자인 경찰에게 책임을 묻고 형사, 민사상의 소송을 당하니까. 손실보상 제도? 지금은 제도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글쎄, 앞으로도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경찰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적극적이어야지 소극적이게 되면 도루묵이 될 테니 말이다 ―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목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데다가 그 사건에는 플러스알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한 생물체라서 섣불리 유형화시키고 예단할 수 없다. 나는 모든 시스템이 적절하다고는 보지 않으나, 다종다양한 환경과 변수가 시민들을 위협하게 내버려두고 또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을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니 반드시 그들을 도와줄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사후관리랄까. 재범률을 낮출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조치와 무조건 괘씸죄를 들먹여 징벌을 가하려는 것보다도 예방에 힘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한국 사회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한 번 범죄에 발을 들였던 사람들이 다시 손을 대는 경우는 무척이나 많다. 비슷한 맥락으로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매한가지. 보자. 떠들썩한 범죄가 발생하면 흔히 그 가해자 이름으로 사건의 파일명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조두순 사건’처럼. 미국을 보면 메건법과 제시카법이라는 성범죄자 관련법이 존재한다. 메건법은 성범죄와 관련해 기소된 적이 있는 자의 이름, 나이, 주소 등을 공개하고 그 거주 사실을 알려주는 법이다. 그런가하면 아동 성폭력범에 대해 최하 25년형을 받게 하고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발찌를 착용해 감시하는 제시카법이 있다. 이 이름들은 모두 피해자의 이름을 딴 관련법이다. 표창원은 말한다. ‘사회적 태도’가 다른 것이라고. 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는 피해자임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 주변으로부터 이상한 시선과 멍에가 씌워지기 때문에 피해자를 노출시키지 말자는 것. 그에 따르면 그러한 상처를 당한 피해자에게 가장 좋은 치유책은 점진적 노출이다. 조금씩 피해자의 피해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고 스스로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피해자를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시티즌 인 유니폼(citizen in uniform). 제복 입은 시민. 경찰은 시민의 일부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표창원이 아웃사이더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역시 국정원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를 조직 밖으로 내보내 외려 온당한 목소리를 내게 만든 것은 그가 인사이더였을 당시의 조직이었음에 틀림없다. 권은희 수사과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직을 보호하지 않는 인사이더는 그 조직 내에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조직이라는 체계, 사회라는 시스템이 유독 한국 사회에서만 이다지도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다시 ‘시티즌 인 유니폼’이다. 우리 스스로도 견고한 조직들을 염려하지 않고 있다. 겉으로는 진실과 정의를 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조직에서 튀어나와 입바른 말을 하는 자들을 사회부적응자 취급하거나 멸시해버린다. 그런 결과 발생하는 것은 의심과 경계, 피해의식뿐인 것이다. 공범들의 도시? 맞다. 나도 공범이고 당신도 공범이다. 우리가 이 사회를 제로섬게임에 끌어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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