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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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폴리 마칭어의 우호적인 것(friendly)과 위험한 것(dangerous)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세계는 경계선, 통로, 문턱, 울타리, 참호, 장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ㅡ 슈미트의 적(敵)을 떠올려 보라 ㅡ 만약 그런 의미를 넘어서게 된다면 오늘날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난교 상태'로 특징지어진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p.15) 그러나 내가 이 두 가지 세계에 틈입해 교집합의 목록 속에 들어간 인간이라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긍정성의 과잉? 일종의 비만 상태? 물론 오웰과 헉슬리가 보는 양상은 조금 다르나 그것에는 표면과 이면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정보의 차단을 두려워한 오웰과 과잉 정보로 자기중심적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헉슬리. 오웰의 디스토피아에서는 인간들이 고통으로 통제되지만 헉슬리의 세계에서는 쾌락에 의해 지배된다. 그들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의 주체로 각각 우리가 증오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라 했다. 한병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헉슬리의 세계에서 범퍼카를 타고 있는 중이다. 멜빌의 소설에 등장하는 바틀비에게서 탈락된 것이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아니면 하다못해 보조 동사 can이나 will 따위였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조차도 의심스러운 까닭이다ㅡ 그러나 다시 한 번 저자의 주장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오늘날의 사회인을 성과주체라 했다, 아마도 성능 없는 성과를 올려야만 하는 must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수감자들)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 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젤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ㅡ 본문 p.43~44



죄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피로한 인간들일는지. 부정의 부정을 통해 관철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긍정의 긍정을 통하는 메커니즘으로 변한 것일는지. 그가 말하듯 '~해서는 안 된다' '~해야 한다' 즉 'No'로 대변되었던 규율사회에서 'Yes we can'이 지배하는 과다 긍정의 사회로 변모한 게 맞는 것일는지. 물론 이러한 성과사회(피로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p.24) 저들은 하나같이 머뭇거리고 부정하고 생각하며 사색에 잠길 줄을 모르는 인간들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여기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 기계를 예로 들며 니체를 역설적으로 데려온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그리고 다시금 파멸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조차 없는 근원적 이질성의 대상으로 메두사를 끄집어낸다(「메두사는 아마도 최고도로 극단화된 형태의 면역학적 타자일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과다 긍정/긍정성의 폭력은 박탈보다는 포화를, 배제보다는 고갈을 자양분 삼아 자라나고 있는 것만 같다. 그에 의하면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닌 것이 된다. 그것들은 모두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복종보다는 성과를, 복종적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로 불러야만 한다고 말이다. 실로 우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피지배의 속박 아래 복종만 하는 인간에서 노동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ㅡ 본문 p.28



이것은 행복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돈을 주고라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p.29) 그러므로 종국에 착취자는 피착취자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들은 각성바지가 아닌 한 몸이 되고 마는 것이다(사유하는 것마저 '계산하다'는 말과 동일시된다). 그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ㅡ 이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유의지 자체를 환상이라고 했던 샘 해리스의 말과 닮아있다. 그는 나르시스적 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뭔가 완결하기를 회피한다는 세네트의 논의 또한 부정하는 쪽을 택하기보다는 더욱 확고히 하려 한다. 외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이다.(p.90) 그렇다면 피로사회로 상징되는 이러한 과잉 긍정과 과잉 활동에는 '중단하는 본능'이 반드시 필요할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면 (과잉) 긍정을 부정하려는 시도라도 해보아야지.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자명종 소리에 새벽 여섯 시 반에 깨어나 침대에서 뛰쳐나오고, 옷을 입고, 억지로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오줌을 누고,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로 가기 위해 교통지옥과 싸우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ㅡ 찰스 부코스키



저자가 아무리 칸트의 (인간에게 보상하는 기관으로서의) 신을 언급하며 그 신이 기만하지 않고 신뢰할 만한 존재라고 해도(그렇게 믿든 비꼬는 것이든) 나는 그 말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신은 그가 없애고자 하는 자를 일단 미치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과 저자의 사유는 피로사회의 정점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로 향해 가는 접점 언저리에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이야기는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그러니까 대중이라는 다수의 무리에 의해 개인이 겁박되는 것이 전제되었기 때문일까. 개인은 (비록 영민할지라도) 힘이 없다. 사회라는 괴물에게 온전히 헤게모니를 넘겨준 채 거세되었을 뿐이다. 이 얄팍하고 무자비한 책을 맺는 그의 마지막 문장이 또렷한 것은, 나 역시 피로사회에 갇힌 피로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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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배려와 관용을 나누는 <예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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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재활용 - 당신이 몰랐던 사체 실험 리포트, <스티프> 개정판
메리 로취 지음, 권 루시안 옮김 / 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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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시절 대학병원에 부속된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염(殮)하는 보조 인원을 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풍문에 의하면, 그곳에 들어가면 일단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라앉히기 위해 술을 내어준다고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 혹은 몇 주간 몸에서 죽음의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고 했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는 그러면서도 무더운 여름의 찝찝함을 날려 보낼 수 있으며 적지 않은 '쏠쏠한' 돈까지 벌 수 있다고 덧붙였다ㅡ 나는 망자의 몸을 두고 얘기하면서 '쏠쏠하다'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에 약간 거리낌을 느꼈고 동시에 다른 종류의 새로운 찝찝함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과 매한가지로 순전히 호기심 충만한 꼬마둥이였던 나는 그것이 그저 뜬소문인지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들었다. 물론 시기적으로 여름방학이어서 집에 처박혀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본 곳마다 쌀쌀맞은 대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사람은 구하지 않습니다.」



죽은 상태라는 건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뇌는 휴업 상태다. 살은 물러진다. 새로운 사건이 별로 일어나지도 않고 할 일도 없다.
― 머리말



커대버(cadaver). 의학 용어로 의학 교육과 연구에 쓰이는 시체를 의미하는 단어다. 『인체재활용』을 읽게 되면 '인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자리에 '시체' 혹은 '시신'을 넣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머리가 잘려 실습을 기다리는 시체, 부패된 시체, 비행기 사고로 추락한 시체, 총에 맞은 시체(총에 맞아 죽었거나 반대로 죽은 다음 탄도학 연구를 위해 실험되는 시체), 뇌사 상태인 시체(이때는 시체라 표현하는 것이 다소 저어될 수 있으나), 식인 행위나 의료 목적으로 쓰이는 시체, 화장(火葬)되는 시체ㅡ 이 책에는 온통 시체밖에는 없다. 당연하고 확실히 벌어질 일이지만 나 역시 죽는 순간부터 시체라 불리기 시작할 것이며, 몇 시간 이내에 신장이나 심장, 각막 등은 내 몸을 떠나 다른 사람에 들러붙어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ㅡ 근육질의 멋진 몸은 아니지만 쓸 만한 곳 한두 군데는 있을 테지.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장기기증 서약을 하게 되면 (갱신 시) 운전 면허증 사진 하단에 '장기기증'이라는 글씨가 인쇄된다. 아니면 우편으로 도착한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여도 되는데 신분증을 제시할 경우 장기기증이란 글씨가 잘 보이게 하여 상대에게 어필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ㅡ 그런데 대체 무엇을 어필한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죽은 뒤 내 몸에서 작동하고 있던 신체 조직들이 어떻게 쓰일지 알지 못한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또 죽고 나면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므로.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화상을 입은 환자에게 피부를 이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인데, 그럴 경우에는 별도의 처리 과정을 거쳐 주름살 제거나 남성 성기 확대에 이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나는 다른 사람의 팬티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큼은 확고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글쎄, 오로지 마스터베이션만 할 것이 아니라면(당연히 아닐 것이다), 요철(凹凸)의 명백한 논리로 보건대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입장은 어떨까. 「어머! 갓 죽은 따끈따끈한 게 내 몸에 들어오고 있어!」 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공산이 크다. 아랫도리 가벼운 남자들이여, 입만은 무겁게 하시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끼 통돼지보다는 원래의 모양을 유추할 수 없는 고기 한 점을 더 좋아한다. 또한 소(cow)나 돼지(pig)가 아니라 돼지고기(pork)나 쇠고기(beef)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본문 p.18



우리는 매일같이 시체를 ㅡ '대부분' 인간을 제외하고 ㅡ 먹는다. 그러나 생선을 먹을 때는 눈알이 그대로 붙어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가져가지만 육류일 경우에는 다르다. 위생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를 취했다 하더라도 소나 돼지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상태에서 식사를 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자신과 닮아있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입장이 되면 상당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영화 《스타워즈》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이, 로봇》을 보면 여실히 알 수가 있는데ㅡ 이보다 더 사람과 닮은 '사람이 아닌 것'이 있다면 그 이상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피를 주입하는 것에는 전혀 혐오감을 품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몸을 담그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쳐한다.」 이 말이 부드러운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스스로가 죽는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이후 자신의 몸이 이리저리 쓰임새 있게 구획되고 잘려나간다는 상황에는 고개를 젓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을 맞은 이후의 인체는 생각보다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오븐 팬에 놓인 바비큐용 닭처럼 머리통만 잘려 성형외과 의사들의 수술 연습용이 될 수도 있고 과학수사 발전을 위해 부패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환자들에게 기증을 할 수도 있다. 죽고 나서 묻으면 뭘 하겠나,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것, 이런 고담준론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몸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요긴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한국어판 제목에 왜 '재활용'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또한 왜 '당신이 몰랐던 사체 실험 리포트'라는 부제가 붙어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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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백이호 옮김, 이인식 / 김영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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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된 책을 구하기란 때에 따라서는 여의치 않다. 우연찮게 헌책방 구석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소비자 개인이 온라인 서점 등에 올려놓은 고가의 중고책을 마주하게 되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출판사에서 복간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어서 제때 책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일쑤. 그러나 (출판사는 다르지만) 이번에 개정판이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은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는 어찌 보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독자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자극해왔던 헨리 페트로스키였기 때문일 테지. 과거 『서가에 꽂힌 책』이나 『연필』 등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였는지 독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회자되었던 바 있다ㅡ 굳이 덧붙이자면 연필 깎기의 달인(!) 데이비드 리스의 『연필 깎기의 정석』(프로파간다, 2013)을 비롯해 기상천외한 내용이 담긴 책들은 언제나 인기몰이를 해 왔다.





세 갈퀴와 네 갈퀴 포크가 도입되면서 후자는 때로 ‘분리형 스푼’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더 이상 나이프로 음식을 떠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알뿌리 모양으로 구부린 칼날은 더 만들기 쉬운 반듯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관습 때문에 기능 면에서 비효율적인 이 나이프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아직 옛 습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데 사용되었다. 이 세트들은 왼쪽부터 대략 1805년, 1835년, 1880년의 것이다.

ㅡ 본문 p.39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인간이란, 그 본성이 수십 가지 혹은 수백 가지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트로스키 역시 머리말에서ㅡ 기술이 만들어낸 하나의 인공물은 어떻게 다른 모양이 아닌 현재의 모양을 하게 되었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처럼 독특하면서도 보편성을 갖춘 제품들이 설계되었는가, 와 같은 의문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본능 중 하나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특정 물건(기계, 제품, 인공물 등 모든 것)을 조금 더 다루기 쉽고 안전하며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답도록 바꾸길 원하는 데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보편성'이란 것 또한 필요하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모든 것을 언급할 수 없으므로, 일단 한국어판 제목에 있는 포크를 보자. 최초로 등장한 식사용 포크는 두 개의 갈퀴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페트로스키는 만일 갈퀴가 하나뿐이라면 나이프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행여 소스를 바른 새우라도 먹을라치면 방울져 뚝뚝 떨어지는 소스를 수직으로 들어 올린 후 수평인 혀에 올려놓기 위해 손을 비틀어야만 한다고 토로한다.(p.33) 시간이 흘러 4개의 갈퀴가 달린 모양으로, 그러니까 이 '포크의 진화'는 식탁용 나이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기존의 뾰족했던 나이프는 포크의 발달로 끝이 뭉툭하게 변하기에 이르렀다. 날카로운 나이프는 식탁 위에서의 필요성을 상실했고 심지어 포크는 다양한 용도에 따라 적절하게 변형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하나는 인도 등지에서 음식을 먹는 방법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맨손을 사용하는데, 생각하기에 따라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행동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조차 햄버거나 빵, 그리고 적절치 않은 비유일는지 모르겠지만ㅡ 얇은 상추 위에 고기를 얹어놓고 손에 물기를 머금은 채로 입에 가져가질 않나. 페트로스키가 지적하듯 이러한 음식들은 문화적 목적과 그것에 따른 기술적 대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불만이야말로 발전을 위한 최초의 조건'이라 할 만한 것이다.



지금 나는 의자에 앉아있다. 앞에는 노트북과 마우스가 있으며 왼쪽으로 재떨이와 담배 그리고 휴대전화가 보인다. 오른편에는 전선이 잘 정리된 온풍기가, 밑에는 털이 부숭부숭한 슬리퍼가 양쪽 발을 감싸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편의 혹은 편리를 위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산물이다. 그렇다면 다시 페트로스키를 의문스럽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갈밖에.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왜 현재의 모양'을 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보편성'을 갖춘 모습으로 변하였는지, 더군다나 그 형태는 다를지언정 본질적인 기능만은 똑같은 도구들이 쓰이는 이유ㅡ 로 말이다. 그는 최초의 스푼은 아마도 오므린 손이었을 것이라 썼다. 물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손가락이라는 '다섯 개의 갈퀴'를 이용해 본래의 갈퀴들을 더럽히지 않을(혹은 다치지 않게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은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필요성의 논리 ㅡ 과장하자면 '공공의 미(美)와 편의' ㅡ 라는 바다에서 영원히 자맥질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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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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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메커니즘(인생)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다소 나이브하게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일단 전제로 하자(이를테면 프랜차이즈 형태의 편의점 체제에서, 본사와 가맹점 사이의 '갑을 관계'가 신문지상과 텔레비전 뉴스에서 문제가 되었던 ㅡ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ㅡ 일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저 '소비'에만 눈을 대고 있기 때문에). 점포 1개당 일일 평균 방문객 359명, 하루 평균 880만 명 이상, 인구 2,075명 당 하나 꼴인 편의점. 내가 다니던 대학 내에도 편의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지금의 편의점은 고등학교와 구치소 면회장에도 입점했으며 어느 병원에 있는 곳에는 벽면에 링거걸이가 설치되어있는가 하면 트럭을 개조해 만든 트랜스포머형 편의점도 존재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떤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편의(便宜)의 표상일는지ㅡ 아니면 전상인 교수가 써놓았듯 개척 정신과 무한 변신의 화신인 것인지. 그렇다면 이 거대 로봇을 대하는 우리는? 편의점엘 가는 것과 그것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시스템은 작가 정희재의 책에서 '자본의 플러그'라는 말로 언급되었는데, 저자는 한술 더 떠 유명 산악인 조지 말로리를 데려온다. 「그게 거기 있어서.」 그러나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us)이 편의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다만 소비하는 인간의 자본 범주 안에 편의점 또한 속해 있다고 판단하는 쪽이 나을 것이다. 그편이 온당하다. 그러니 (아직은) 「편의점 너마저!」 하고 외칠 필요는 없다.






……이것의 의미가 옆에 있는 것의 이미지에 맞는지 또는 옆에 있는 것의 이미지가 옆에 있는 것의 의미에 맞는지를 검토한다. 결과를 미리 아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양자 간에는 어떠한 자연적 매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상품과 가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실제로 상품의 의미가 가격이며, 상품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한 그 이외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 언뜻 가격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품의 혼 속에서는 지옥이 미쳐 날뛰고 있다.


ㅡ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1권』 p.865~866





현재 한국에서는 휴대전화로도 편의점 결제가 가능하다ㅡ 덧붙여 기업들이 SNS를 통해 제공하는 모바일 기프티콘이란 것도 활용되고 있고. 그런데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m-pass라는 카드가 있는 모양이다. 이것은 대중교통 정기권 기능 이외에, 현금을 충전하여 편의점이나 택시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다. 사진은 내가 일본에서 사용했던 정기권 '스이카(suica)'라는 것인데 본래는 가메아리(亀有)와 도쿄(東京) 구간이었으나 이사한 뒤로는 신주쿠(新宿)로 바뀌었다. 역에 설치된 기기에 카드를 넣고 갱신하면 본래 인쇄되었던 구간이 지워지면서 새로운 내용이 인쇄된다(소유주의 이름과 성별은 그대로). 본래는 super urban intelligent card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스이카(スイカ)라는 단어 자체가 일본어로 수박이라는 뜻이므로 재미도 있고 색감 또한 초록빛이 난다ㅡ 우측 하단에는 수박의 줄무늬로 보이는 선로가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m-pass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담배 자판기만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음료 자동판매기에서도) 지금 우리가 휴대전화를 갖다 대는 것과 같은 동작으로 말이다ㅡ 우리는 그저 팔꿈치를 적당한 각도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편의성, 점원과 손님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계산을 끝낼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 이미 이 세계에는 갖추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충전되어 있는 금액만 충분하다면 나는 내가 구입하려는 것들이 얼마인지를 묻지도 않고 얄팍한 카드 한 장만을 내밀어 삐 소리와 함께 퇴장하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기만 하면 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내가 편의점엘 가는 것은 오로지 담배가 떨어졌을 때뿐이므로 나라는 인간은 최적화된 시스템에 걸맞은 최적화된 인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판매하고 있는 담배는 수십 종인데, 상품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번호표를 붙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75번 네 개요」라고 단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이라면 양상이 달라진다. 「카멜 필터 주세요.」 「이거요?」 「아뇨, 저기 낙타 그려진 거요.」 「이거요?」 「아뇨, 그건 라이트(파란색)잖아요…… 노란색이요, 노란색.」 이처럼 담배를 잘 모르는 종업원이 있는 편의점에 들어갈 경우, 나는 그들과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눌 수가 있는 것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판국이니 저자가 '훼미리'마트가 씨'유'로 달라진 것에서 가족(family)의 해체와 개인(you)의 부상이라는 흐름을 끌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가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유리'를 재언급한 것 역시 매한가지다(반대로 어쩐지 백화점과 카지노가 생각나 으스스하기도 하다). 유리라는 투명성을 갖추었지만 철저하게 매출과 마케팅을 향한 집념. 요컨대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나타나는 일들 ㅡ 많은 오른손잡이들 때문에 쇼핑 동선을 입구부터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국민 평균 신장의 증가를 반영하여 판매대의 높이를 3센티미터 올리는 등 ㅡ 은, 기호는 재화를 장식하고 재화는 기호의 모습을 띠었을 때만 재화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을 체감할 수 있게끔 한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편의점(만이 아니다)을 정녕 '꿈의 정거장'이라 해도 되는 것인가? 편의점에서는 택배를 주고받을 수 있고 휴대전화도 개통할 수 있으며 와인은 물론 젖먹이 돌 반지와 자동차까지 구매할 수 있다(식사 대용식품이 가장 많이 판매된다는 사실로 보건대 정말로 'family → you'의 관계도가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물건이 아닌 일상을 구매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광장이 아닌 '자기만의 방'인 것이고? 글쎄, 아니면 자본주의에 맞추어 새로이 마련된 이채로운 광장이라고 봐야 할는지도.



덧) 엊그제 신문에서 뜨악할만한 기사를 보았다. 드라마 제작사가 책을 홍보해주는 대가로 출판사에 5억 원(VAT 별도라네, 친구!)의 제작지원금을 요구하는 제안서가 공개된 것. 모 프로덕션 관계자는, 이미 정해진 큰 틀의 주제는 있으나 출판 예정인 책의 스토리대로 변경은 가능하다고 했다. 더군다나 주인공의 직업을 작가 겸 출판사 사장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단다. 그렇다면 거대 프랜차이즈 편의점은? 이미 2011년 편의점의 시장 규모는 10조 가까이 되었고 2015년에는 18조원을 기대하고 있다. 편의점의 생존 기간이 평균 4년이라고는 하지만 성장률을 보면 현재 편의점의 판매액 증가율은 2011년에 17.9%였고 이후 계속해서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주요 편의점들이 외국 본사에 지불한 로열티는 200억 안팎에 이르며(이것이 2년 전의 일이다) 편의점 사업에 새로 진출하는 곳도 있다(홈플러스, 모나미를 비롯해 얼마 전 신세계 그룹이 '위드미'를 인수했다). 우스꽝스러운 말이지만, 드라마 주인공을 편의점에서 일하는 88만원 세대나 점장으로 설정하는 것을 넘어, 저들에게 자신들을 알릴 의지만 충족된다면 아예 드라마 자체를 만들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편의점, 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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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3-1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잇 님, 이 책은 분명히 어제 왔을 텐데요...(먼산)
글 늘 잘보고 있습니다. 자주 이름 뵈어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D

자주 뵐게요!

그레코로만 2014-03-13 10:16   좋아요 0 | URL
민음사 관계자 분이신지요?
맞습니다. 어제..가 아니라 시간상 그제가 되었네요.
일단 읽고 싶던 책이기도 했고 분량도 많지 않아서
그제 오후, 어제 오전에 걸쳐서 다 읽게 되었어요.
제 허접스런 생각이날아갈까 봐 후딱 감상을 쓰려고 하다 보니..

봄밤 2014-03-1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저도 편의점 사회학 리뷰 써야하는 이에요. ^^;;
아잇 님 리뷰 읽고 저도 어제 읽어봤습니다.
생각보다 잘 읽히더라고요 게다가 리뷰로 책이 더 풍부해진 느낌!

카멜 사기가 눈에 그려지네요. ㅎㅎ다음 글도 기대합니다아!

그레코로만 2014-03-13 14:56   좋아요 0 | URL
앗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짜 휙휙 읽게 돼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ㅎ
여러 리뷰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