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별 1 유다의 별 1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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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대원님'이라 부르는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白白敎)의 이야기. 듣기로, 백백교 신도가 교주를 만날 때에는 다섯 가지 계율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교주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하고, 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아야 하며, 질문하는 것은 금기인 동시에 오로지 절대 복종의 대답만을 해야 했다고. 이 단체는 당시 민중을 현혹해 재물을 편취하고 여신도들을 속여 간음하는가하면 배신의 조짐이 보이는 신도들을 아무도 모르게 납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ㅡ 전국에 산재한 소위 비밀 아지트에서 300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중 '천원 금광 사무소'라는 간판을 내걸고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린 양주 봉암산 기슭은 금광을 가장해 시체를 처리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하나 더,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뜨악한 것이 있다. 경찰에 쫓기다 자살한 교주 전용해의 두개골이 '범죄형 두개골의 표본'으로 국과수에 보관되어 오다가 비인도적 인체 표본 전시라는 진정에 폐기가 결정돼 지난 2011년 화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소설 『유다의 별』은 여기서 출발한다. 당시 교주였던 전용해라는 인물은 열 개가 넘는 가명을 사용했다. 또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진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의 인상착의는 체포된 백백교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도진기의 상상은 실체가 불분명한 전용해란 인물의 죽음과 그의 후손 그리고 백백교와 '낡은 광목천 끈'으로 이어지고, 소설은 몇 가지의 소소한 트릭과 함께 꼬이고 뒤집히는 가설과 검증이 계속해서 뒤섞인다. 최근 과거의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이 인구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유다의 별』은 처음부터 비밀스럽고 뒷맛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소재를 취함으로써 발단의 몰입에는 일단은 성공했다. 나머지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재미? 당연히 있다. ……그런데 제목은 카(John Dickson Carr)의 소설에서 따온 것일까? 『유다의 창』에서처럼 여기에도 밀실 살인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야기의 줄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덧) '한국형 추리소설'이란 이상한 명칭에 대하여: 요즈음 날이 거듭되면 될수록 '한국형 추리소설'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데, 나는 그 뜻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한국적 요소나 문화가 간섭하면 모두 '한국형'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유다의 별』은 분명히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할 바에야 차라리 한국'의' 무엇 무엇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아니면 아예 빼시라. 대체 뭐가 한국'형'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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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20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형 추리소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네요... 한국형 추리소설이 대체 뭐지 ???!!

그레코로만 2014-07-20 20:35   좋아요 0 | URL
결국엔 다 '한국산'....ㅋㅋ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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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문학을 전공한 자가 아니더라도 음악, 드라마, 영화 혹은 일본어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서 접근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학교에 다닐 적 다니자키니, 시가니, 간이니, 도손이니, 다자이니, 소세키니 하며 원서를 낀 채 공부하던 때와는 또 다르다. 이것은 와카나 하이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하이쿠는 굉장히 짧으면서도 계절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제약 아닌 제약 때문에 일반인들에 알려지기가 더욱 손쉬운 것이 사실이다(무시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아마도 바쇼의 <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는 하이쿠를 접해 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와카의 기존 운율(5.7.5.7.7)에서 앞의 17자만 따로 떼어낸 것에 대해 이어령은― 하이쿠는 시인의 영역이고 나머지 14자는 신의 영역이라 표현한 바 있다. 아마도 와카의 입장에서 보면 생략된 14자는 미완의 상상 혹은 가려진 침묵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쿠는 역시 손가락 마디 하나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이로 더욱 매력적인 것이 되었고, 또 반대로는 쓰이지 않은 것에 대해 안에서 밖을 향하는 (어디로든 뻗을 수 있는) 궤적을 지님으로써 찰나의 미학을 도탑게 한다.




時鳥厠半ばに出かねたり
소쩍새가 부르지만 똥 누느라 나갈 수 없다.



내가 유일하게 외울 수 있는 소세키의 시다. ‘악명 높게도’ 수상 주최 초대를 거절하며 쓴 것이라 하이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음직하다. 비슷한 맥락 때문인지 소세키의 이 시를 읊을 때면 사람들은 60년대 국회의사당 앞에서 울린 신동엽의 일갈을 함께 떠올리는 모양이다. 「국회의원 두 개에 10원! 국회의원 두 개에 10원!」 신동엽은 정치인의 값을 똥금에 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소세키는 기름진 만찬보다도 자신의 소설 집필이 더 중요했다.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을 욕하는 재미가 양쪽에서 느껴진다. 이러한 제목 없는 한 줄의 짧은 시는 죽은 이를 그리기도 하고―<骸骨や是も美人のなれの果, 미인이었던 그대의 마지막도 해골이구나(소세키)>, 계절 자체를 묘사하기도 하며―<五月雨に鶴の足短くなれり, 장맛비 내려 학의 다리가 짧아졌어라(바쇼)>, 때로는 존재의 근원을 묻기도 한다―<蜘蛛に生れ網をかけねばならぬかな, 거미로 태어나 거미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교시)> 그리고 지금,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도 시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는데 차량이 들어오기 전 짧은 순간을 이용한 점이 눈에 띈다(몇 년 전 시를 모집하는 공모전 요강에는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문학의 힘, 시의 힘, 글 한 자락의 힘을 너무 나이브한 측면으로만 접근한 것 같아 아쉬운 대목이다). 산문과 달리 시는 분량이라는 것에 연연하지 않으니 짧은 하이쿠처럼 간결한 문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하이쿠가 본래 일본의 것이라는 점에서 가능하면 원문 그대로 읽어야 맛이 살지만, 때로는 우리말로도 짧게 지어 보고 느낌으로써 순간의 번뜩임을 구현해내는 것 또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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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유전자 전쟁 -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조적 파괴
칼레 라슨 & 애드버스터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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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적 진보는 이렇게 일어난단다. <기존 패러다임의 모순 발견 → 새로운 실험 → 정보 공유 → 논문 발표 → 학회 개최 → 새 이론의 등장과 검증 → 새로운 진리 탄생 → 해결책을 마련한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거의 언제나 정치적 혁명처럼 추잡하고 혼란스럽고 너저분한 과정이며 악의에 찬 폭동처럼 전개된다.(p.271) 칼레 라슨에게 빌어먹을 카트1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런저런 실험과 이야깃거리, 흥미로운 각성 촉구의 방법 등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대학의 경제학과가 돌아가는 꼴이 경찰국가를 빼닮았다며 신고전경제학(neoclassical economics)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 추측하건대 기존의 경제학자들은 이 『문화 유전자 전쟁』을 과격한 잡지로 볼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교수가 경제학 수업을 하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선다. 그러고는 묻는다. 「이 커피 보이나?」 그는 어리둥절한 학생들을 뒤로하고 내처 말을 잇는다. 「커피는 보이지만, 과테말라 농장도 보이나? 유럽연합 관세는? 커피 노동자들의 급여 명세서는 어디 있지?」






우리 사회는 밥 먹고 나서 숟가락을 씻는 것보다 땅속에서 석유를 뽑아내어 정유 공장에 운반하여 플라스틱으로 변환하고 적절히 성형하여 가게에 운송한 플라스틱 숟가락을 쓰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놀라운 경지에 올랐다.


― 본문 p. 225




화폐는 애초 상품 교환의 용이성에서 출발했지만 돈이 또 다른 돈을 만들어내는(탁월한 이자의 번식력) 현상이 생김으로써 그것은 사회적 유대를 위한 호혜처럼 받아들여져 왔고, 그런 돈을 안심하고 맡기라는 세계 거대 은행들을 우리는 현 상황에서 글로벌 카지노라 부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데도 신고전경제학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일전에 석유(돈, 전쟁, 암약)에 관한 책을 읽고서 새삼 떠올렸던 것인데, 영화 《매트릭스》의 스미스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데 인간들은 안 그래. 한 지역에서 번식을 하고 모든 자연 자원을 소모해 버리지. 너희의 유일한 생존 방식은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거야.」 이 책도 신고전경제학과 그에 대한 맹신을 비꼬며 비슷한 말을 한다. 「다랑어가 씨가 마르면 해파리를 먹고, 해파리가 씨가 마르면 갯지렁이를 먹고, 갯지렁이가 씨가 마르면 불가사리를 먹으면 된다는 식이다. 불가사리가 씨가 마르면 무엇을 먹을까? 아무도 모른다.」(p.90) 발전이란 무엇인가? 책에 의하면 발전의 과정은 이렇다― ①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목초지는 논밭으로 오솔길은 도로로 바뀐다. ②농업이 전파되고 석탄이 산업 혁명의 연료가 된다. ③물이 귀한 대접을 받고 석유를 얻기 위해 점점 더 깊이 파들어 간다. ④갈등과 불화가 번져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대격변의 고통을 겪는다. 마지막 ④의 단계에서는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발전에 대한 지식이 폐기되어 모든 것이 백지에서 새로이 이루어지거나, 때를 놓쳐 붕괴가 일어나거나(책은 후반부에서 붕괴를 맞이한 후의 상황도 그리고 있다).





현대 경제학은 정말로 맛이 가서, 학문 자체를 위한 지적 유희로 전락한 것일까(경제 모델을 계산하는 컴퓨터 모니악(money + mania + computation)의 이름에 ‘mania’를 조합했다는 것에서부터 조짐이 이상했을지도)? 우리는 석유를 캐내고 물고기를 잡고 숲을 깎아 그것들을 ‘자본’이라 부르며 판매하는데, 이것은 다시 ‘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린다. 그런데 참 괴상하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에 있는 가구들을 죄다 꺼내 팔아치우면서도 그것을 버젓이 ‘자본’과 ‘소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제 살림이 사라지는데도? 어딘가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쳐 오지 않는 이상(물건이 줄지 않는 매직 하우스가 아니까 말이다) 재생산이 가능할 리 만무하므로 자본이니 소득이니 하는 것은 어딘지 좀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보자. GDP가 올라가는 과정을 유심히 쳐다보면 이 이상한 논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게 된다. GDP가 증가하는 경우는 다양하다. ①범죄: 도난 보험금 지급 → 새 제품 구입 → 경비원 고용 → GDP 상승 ②건강 악화: 질병 치료 비용 발생 → GDP 상승 ③가족 해체: 이혼 변호사 비용 발생 → 새로운 주거 마련 → GDP 상승 ④부채, 압류, 파산: 법률 비용 → 이사 비용 → 주택 등 재구매 → GDP 상승 ⑤자원 고갈: 석유 매장량 감소 → 반대로 가스 가격 상승 → GDP 상승 ……어느 날 아침 값비싼 이혼 수속을 밟고 저녁에 집이 화재로 내려앉아 법률 비용이 발생하고 보험금을 받고 가재도구를 새로 샀다면 GDP 관점에서는 최고의 하루일 것이다. 만세!(p.217) 그러니까 GDP(또 GNP)에 있어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많은 것은 합산되는 반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많은 것은 제외된다. 재미있고 괴상하지 않은가?





경제학은 대체로 보면 자기 충족적 심리학이다. 경제학이 하는 일은 사실상 행동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동의 모범이 되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규정한다.(p.314) 인간은 스스로가 경제동물을 자처했다(animal ambition!). 탈자폐 경제학 운동 ― 자폐 학문이 되어버린 낡은 주류 경제학에서 벗어나자 ― 을 벌이고 있는 질 라보는 말한다. 「우리는 종교를 잃었다. 그래서 삶에 의미를 부여할 다른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신고전경제학은 경제 사상을 뜻한답시고 은근슬쩍 자연 법칙인 척하며 난공불락의 성채를 이루고 있는 듯한데, 새로운 이론적 토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서 매끈한 곡선 따위로 점철된 거짓 그림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또 세계 도처에서 경제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주류 경제학과 경제 현실 사이에 분명한 괴리가 있다며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다. 위에서 인용된 신고전파 이론에 대한 우려는 어찌 보면 유권자의 생각이 조사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낮은 응답률을 자랑하지만 아주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기 때문에 눈치 채기 힘든) 여론조사 스스로가 유권자들의 향후 행동방향을 조종하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듯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데다가 게임에서 지고도 거액의 보너스를 받는 자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현상이 팽배한 지금, 경제학은 시장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며 풍부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쪽에서는 화폐가 교환의 수단이 되는 목적을 잃고서 자꾸만 이자를 흘레붙이려 하고, 저쪽에서는 경제학이 아름답게 보이는 수요 공급 곡선으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케네스 볼딩 왈, 「기하급수적 성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미치광이 아니면 경제학자다.」 ……이런데 아직도 라떼 거품이나 쪽쪽 빨고 있을 텐가?(p.85)



1 그는 어느 날 들른 슈퍼마켓에서 카트를 빼내려면 동전을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꼈고, 이것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저항하며 광고 없이 운영되는 잡지 《애드버스터스(Adbusters)》의 발행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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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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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훑다가 에필로그에 먼저 눈이 간다. 「나치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 물음은 대단히 중요한 동시에 위험하다. 저자를 재인용하자면― 첫 번째로는 철학이 하나의 윤리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그러한 정권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지 못한 사람의 사상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서 그렇다. 나치당 당원 번호 2,098,860번, 나치로부터 ‘독일에서 가장 저명한 헌법학자’로 인정받았던 슈미트. 슈미트에게 나치당 가입을 권유하고 자신 역시 당원 번호 3,125,894번을 받아들었던 하이데거. 저자가 그런 그들과 대척점에 둔 인물들은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등이다. 슈미트는 히틀러의 숙청 사건(장검의 밤)을 두고서 가장 고결한 행정적 정의의 형태라 발언하는 등 나치 체제에서 유력한 지위를 누렸고 또 강력한 권력을 주장했다(독재까지도). 그런가하면 하이데거 또한 나치에 입당한 뒤 10년 넘게 당적을 유지했고,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을 지내며 <독일 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해 학생들에게 나치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나치즘의 파급력을 그리 크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머뭇거리는 확신범이랄까. 나치 때에도, 나치의 몰락 이후에도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어쨌든 책은 나치를 중심으로 하여 그에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간섭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처음에 던졌던 질문― 나치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은 철학(또는 소설)과 철학자(또는 소설가)가 분리 가능한지 여부이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구별해야 하는가, 이다. 그러므로 이 물음이 중요하고 위험하다는 것은 (아마도) 영원히 유효할 것이며, 골치 아프게도 우리는 ‘철학자의 사상에서 반드시 뭔가를 배워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상당히 난해해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빤한데, 그런 까닭에 이본 셰라트는 한쪽에 치우치고 말았으며 내가 제시한 물음에도 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으로 보건대 나치의 이쪽 혹은 저쪽을 무 자르듯이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좋아하는 것은 철학자의 습성이며 의무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과연 이 물음에 어떤 답을 내놓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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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5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평가단 하고부터 재미 중 하나가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훔쳐보는 겁니다. 어떤 분은 이 책을 사대강과 연결하시기도 하더군요. 무릎 탁 쳤습니다. 여러생각을 훔쳐보느다는 게 은근 재미있습니다.. 허허허..

그레코로만 2014-07-16 09:11   좋아요 0 | URL
서로의 독후감과 생각을 나눈다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겠죠ㅎㅎ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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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에게 트렁크가 있었다면 놈베코에겐 다이아몬드가 있고, 100살 먹은 노인네가 양로원을 탈출했듯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역시 분뇨통을 날라야만 하는 공동변소에서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전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보다도 다양한 측면에서 두드러지고 또 상당한 재미를 갖추었다. 물론 하나하나 뜯어보면 죄다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남아공에서 태어난 놈베코는 다섯 살 때부터 분뇨통을 날랐고(그녀는 나중에 ‘네이름이뭐더라’로 불리게 된다), 졸지에 그녀를 상관으로 대해야 했던 타보는 아랫도리 성질을 죽이지 못해 놈베코로부터 양쪽 허벅지를 가위에 찔린 다음 리놀륨 장판 밑에 숨겨둔 다이아몬드를 활용하지 못하고서 강도의 손에 죽었으며, 약간의 광기를 지닌(누구나 그렇듯) 말단 공무원 잉마르는 화강암으로 된 2.5미터짜리 석상에 깔렸는가하면, 바보스런 엔지니어 엥엘브레흐트 판 데르 베스타위전은 자동차에 세 번이나 깔아뭉개져 죽었다. 또 있다. 정신이 나가버린 미국인 도공은 CIA 요원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 생각하며 편히 지내는 와중에 오히려 그 자신이 ‘두 번’이나 죽어버렸고, 빌어먹게도 말을 안 듣는 셀레스티네의 할머니는 어느 겨울날 자동현금지급기에 손가락이 끼어 얼어 죽은 남자의 딸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은 놈베코가 공동변소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 탓에, 그녀가 여행을 떠나자마자 차에 치여 일이 꼬여버린 탓에, 핵무기가 담겨 있는 궤짝과 다른 작은 소포(빌어먹을 영양(羚羊) 육포!)가 수신인을 잘못 찾은 탓에 벌어진 일이다. 한 가지(실은 두 가지) 내가 의뭉스럽다고 여기는 것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처럼 주인공이 살아온 모든 순간순간이 모인 경험과 인간관계가 어쩔 수 없는 난관이 닥쳤을 때 하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며, 미국/미국인(들)/그래미의 컨트리 사랑과 더불어 요나손의 중국/중국인 사랑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가지였다. 바로 그 우라질 핵……! 왜 이다지도 그는 핵폭탄에 매달리는가. 하긴 이 소설에서 핵은 터질 기미가 없고 그보다도 ‘더럽게도 바보 같은’ 인간들이 더 시한폭탄 같긴 하다. 쓸지 안 쓸지 모르는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터질 듯 터지지 않는 폭탄이(사람 말고) 또 등장할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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