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리언스
마커스 세이키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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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트 소여에 의하면 SF란 '현재에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인식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을 다루는데 『브릴리언스』가 이 정의에 얼마나 들어맞을는지는 모르겠다. 근미래, 사이버펑크, 하드SF, 소프트SF 등의 말을 갖다 붙여도 얼추 비슷한 내용을 품고 있으면서, 또 결정적으로 여기에 뮤턴트(돌연변이)가 등장하는 이야기여서ㅡ 영화 《엑스맨》처럼 분류되어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장애로 바라보기도 하는 서번트 증후군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브릴리언트'들에 의해 꾸려진다. 이들은 하나가 흥하면 하나가 망하는ㅡ 이를테면 천재와 장애라는 플러스마이너스의 개념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똑같으면서도 저마다 초인(超人)과 같은 특수능력을 지니고 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늘어놓는지를 파악하거나 숫자와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래프와 데이터만으로 점쟁이처럼 뒷일을 맞히는가하면(사실 점쟁이들보다 훨씬 낫지만) 벽을 통과해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널 수 있는 브릴리언트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닉 쿠퍼는 공정국(어감만으로도 친근감이라고는 전혀 없다) 소속의 브릴리언트로 나랏밥을 먹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거물 테러리스트를 검거하는 것만은 그다지 여의치 않다…… 라는 것이 『브릴리언트』의 시작이다. 인구 백 명당 한 명 꼴이라던 브릴리언트는 일견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 정도로 취급될 법하지만 그들이 작심하고 일을 벌이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로는 전쟁이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하고. 하여 쿠퍼가 스스로 경찰 무리에서 빠져나와 테러리스트 쪽에 붙어먹으며 그들을 와해시키려는 배신자 역할을 떠맡는다, 라는 것이 소설의 기본 구조다. 대강 알아본 바에 의하면 소설은 단권으로 끝나지 않고 총 삼부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단다. 그래, 그래야지. 기껏 뮤턴트라는 것을 설정해놓고 이렇게 끝내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단 삼부작 중 이 『브릴리언트』는 일종의 전초전에 해당할 듯싶고, 종반의 「누구에 의해?」라는 이 한마디 물음이 인류간의 다툼을 촉발한 계기로써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며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대화로 끝이 난다. 「그런 짓을 하고도 밤에 잠이 옵니까?」 「그래서 수면제를 먹지. 철 좀 들게.」 뒷사람의 마지막 문장 뒤에는 생략된 말이 있는데, 이 지구가 만들어져 멸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을 단 하나의 논리가 숨어있다. 부디 책에서 확인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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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정부 10년 무엇을 남겼나>
한국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거보다 발전해왔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는 소기의 목적 혹은 절반의 성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그리고 자, 다시 보수가 정권을 잡은 10년이 지나간다. 이제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훈민정음의 길>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이 뭘까?)과 역사를 재조명했다고 한다. 식자라 불리기도 하는 꼰대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신구의 충돌, 이런저런 잡음들……. 왜 없었겠는가?



<시간 연대기>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저 옛날 역사의 때부터 현재까지를 톺아보며 시간에 대해 고찰한다. 글쎄, 해가 지는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의 숫자로만 때를 확인할 수 있는 지금의 현대인들을 보건대, 그들로 하여금 어떤 사유로 이끌어갈지.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한국의 공산주의, 사회문화적 배경, 발전과정, 그들을 이끌고 따랐던 이들, 지하운동…… 제목 그대로 한국 공산주의가 어떻게 태동하고 지내왔는지 살핀다. 신간평가단으로 선정되지 않아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사회를 보호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하는가. 아니, 이는 동의어일지도. 전쟁이 반드시 필요했던 역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저 필요로 인해 누군가를 해하거나 죽이는 일들 말이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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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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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다, 이해하다, 터득하다, 라는 의미의 일본어 사토루(悟る)를 가져다 쓴 '사토리(さとり)세대'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돈이나 사치뿐 아니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일본 청년들을 일컫는 말로, 극도의 현실주의적 양상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한국도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三抛)세대,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88만원세대, 이십태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의 이태백 그리고 이것이 변형된 이퇴백까지ㅡ 직장생활을 하는 이십대라 해도 언제 퇴직해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뜻이란다. 1930년대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대학이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때의 학생들이 요즘 학생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요즘 학생들은 틀에 박혀서, 뭐랄까 관리의 후예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p.55) 시대상 등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예컨대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도로를 점거하고 정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거나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로 한쪽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대부분이 욕지거리뿐이고, 더군다나 청년들에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이런 자들은 죄다 20년 전, 30년 전 똑같이 거리로 나와 소리 높였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세대라는 말로 구분지어도 언제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보고 느끼며 성장하기 마련이니 우리는 늘 스스로를 칭찬하는가하면 또 동시에 싫은 소리를 퍼붓고 있는 셈이며, 지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일본의 청년들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투영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이들이 삶에서 찾는 것은 먼 미래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만족을 추구하는데,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소모적이라거나 열망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출산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집을 가지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왔으므로 지금의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자신을 붕괴시키면서 가족을 위해, 나아가 사회를 위해 다소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찾았으니 말이다.




대학생인 고스케(21세, 남성)는 「내가 선거에 투표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선거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 즉 '높은 분들'이 그들 마음대로 진행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통계적으로 봐도,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치적 무력감이 높다. 자신의 힘으로는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 80%나 된다.


ㅡ 본문 p.284 (한국이라고 다를까?)




오늘날의 젊은 세대, 특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비해 개인적이고 뚜렷한 보호색으로 자신들을 감싼다. 이 세계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는 변화를 꾀하거나 몹시도 큰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도전엔 인색하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일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회가 보수 일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들은 덤덤하고, 철저히 자신의 취향에만 소비하며, 기득권을 무너뜨리려 야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시쳇말로, 하기 좋은 말로 '생긴 대로' 산다. 여러 패러다임을 거친 세상이 이 시점에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양태에 순응하면서 지내는 까닭인데, 정치적 참여에 소홀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면 금방 설명될 수 있다. 프리터,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체류하며 본 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이전 세대가 필연적으로 살아온 방식처럼 역시 필연적이다. 물론 일본의 사토리세대와 한국의 삼포세대 혹은 88만원세대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전반적인 상황만 보더라도 일본 청년의 경우 그쪽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이 무언가를 포기한 이후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저 포기하는 수순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고 만다. 그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거다. 여기에 특히 경제적 여건을 간섭시키면 이야기는 간단한 결론으로 끝난다.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나가는 젊은 세대들은 포기할 수는 있으나 그 과정 이후 만족 단계를 찾기가 어려운 까닭이다(여러 가지 지표나 통계만 보더라도).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 다소간의 여유자금을 투자하거나 실질적인 취미를 누리기엔 한국의 청년들은 경제적으로도 빈곤하며 시간적으로도 가난하다. 그러니 이런 청년들을 두고 '요즘 사람들' 운운하며 (저자가 표현한 방식을 빌려오자면)'이해력이 좋은 어른'인 척하는 기성세대들은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지금 청년들이 이렇게 빈궁한 상태로 혹은 사토리세대에 편입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가까운 미래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 하나, 어떤 특정 세대가 곤란한 선에서는 그치지 않는다. 노동을 해, 듣기 좋은 말로 견실한 근로자가 되어(특히 정규직과 같은), 사토리세대 이전처럼 넘쳐나는 노동 인구로 북적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고령화와 더불어 사회전체 나아가 하나의 국가를 정비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젊은 세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다. 왜 행복한가. 깨닫고, 이해하고, 터득했기 때문에, 즉 사토리(さとり)를 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자신의 만족을 찾아 살기로 작정했다는 뜻일 터다. 그럼 이것을 한국에 대입시킨다면? [포기(혹은 현실을 깨달음) → 자기만족]이란 알고리즘으로 설명되는 사토리세대와는 다르게 전개될지도 모른다. 경제적 기반도 충실하지 못하고 기득권에 저항할 여력 또한 없으니, 지금처럼 계속 '요즘 사람들'이란 말을 들으며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 아래에서, 그저 절망의 나라에서 살아가야만 할는지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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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삼바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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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가 만료된 임시 허가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인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대로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수도 없으며, 그저 공무원 옆구리의 서류철 바깥에서 맴돌 뿐이다. 갈가리 찢긴 접수증도 마찬가지. 왜? 그쪽 역시 유효기간이 끝나버렸으므로. 종이에 찍힌 숫자놀음, 그리고 급여 명세서와 각종 청구서, 은행계좌 출금 명세서와 같은 '생활의 증거들' 없이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조차 소리 내어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민국 국장은 널 믿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체류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야.」 삼바가 그의 삼촌으로부터 체류증을 '물려받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신분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삶 자체가 없는 것과 같은 의미였을 테니. 더군다나 그가 삼촌의 지하 아파트에서 몰래 자라던 버섯을 낚아채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한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이미지들(거북이나 연어)보다도 생경함이 없다. 가끔 움츠러들거나 쓰러지기도 하지만 버섯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직립하려고 하는 까닭에. 소설은 외국인 노동자의 업무상재해나 죽음처럼 심각한 양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주자의 모습을 담백하게 스케치함으로써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를테면 그들의 생활상과 '취급'에 분노하기보다 그들이 갖는 심성적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웰컴, 삼바』는 작가 자신이 이민자와 난민을 돕는 시민단체 시마드(cimade)에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이지만 '벌집'으로 묘사되는 바티뇰의 격리 상설창구라는 낯설기만 한 장소에서의 각양각색 만남들은, 차라리 이것이 허구로 꾸며낸 문장에 불과했으면,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삼바가 구겨진 종이, 음식 찌꺼기, 찌그러진 플라스틱, 과일 껍질, 머리카락 뭉치 등 쓰레기를 분류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바삐 손을 놀릴 땐, 그는 동시에 자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시커먼 얼굴'인 삼바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제 이름은 삼바 시세예요. 그리고 전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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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마니에르 드 부아 Maniere de voir 시리즈 1
세르주 알리미 외 32인 지음, 이진홍 옮김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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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집권하고 각각의 상반된 시선이 쏟아졌다. 기존의 정치세력과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진 질서를 거부한 유권자의 승리로 보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시리자의 집권을 신민당에 느낀 피로감에서 찾으며 앞으로 그리스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평했다. 글쎄, 모르겠다. 우리가 여태 정의하고 있는 진보 혹은 좌(左)의 의미가 과격, 반(反)자본, 운동권 등으로 점철되었던 만큼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다른 국가들에서와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한국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으로 칭하는 시절도, 나는 얄궂게도 그것이 진보정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한국정치가 좌우로 나뉘어있다 한들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에서 역설했던 '(그럼에도 불구한)끝없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고, 이념이 아닌 현실의 손을 들어주어도 모자랄 마당에 정치공학 운운하며 악다구니를 써 봐야 별무소용이다ㅡ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특기할만한 점 두 가지,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는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보다 굉장히 파렴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과 동시에, 꾸준히 좌파와 진보가 기를 펴지 못해왔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보수 =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 어쨌든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개혁, 자율, 민주, 평등, 자유 등에 관한 한 자신들의 담론을 보수의 그것에서 베끼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진보는 없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그저 '급진적 선회'에만 쓰였고 자율 역시 '시장의 자율'에 그쳤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인식을 함께해 줄 담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대중이 길을 잘못 들었는가, 아니면 정치가 잘못된 길로만 가는 건가.




진보적 정치 이념과 지향성을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려 들면, 각자 생각하는 정답을 각자가 주장하기만 할 뿐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지점을 이내 만나게 된다 (...) '소인은 똑같은 자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인 것이다.

ㅡ 본문 p.303 「우리가 진실로 진보정치를 원한다면」에서




18세기의 사상가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에 걸린 가장 큰 위험은 구제도인 앙시엥 레짐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이 민주주의를 횡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대담하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한 부유한 계층이 자기들만의 지배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국가에서 스스로 모집된 것으로 국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들이 대표하는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하다는 근거로 국가가 스스로를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잘 대변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본문 3부 中 「그들은 누구를 대표하는 걸까?」에서) 무슨 무슨 '주의'를 들먹이기에는 진보건 보수건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특히 좌파의 정체성의 위기는 꽤나 심각한데, (제발 그 빌어먹을 '통합'이란 단어를 좀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대중과의 연대감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분열해버린다. 왜 그들은 늘 불가피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는가? 왜 그들은 늘 불완전하다며 징징대는가? 질질 짜기 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패배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항상 마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2년 전쯤 <마니에르 드 부아> 124호에 수록된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운명」(본문 수록)에서는 이런 문장도 찾을 수 있다. 「이제 노동자, 피고용인,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간계층을 결집한 거대당이 되어버린 시리자당은 공산당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거대 미디어와 그 충견(忠犬)들도 불편하게 한다.」(p.202) 진보이건 좌파이건 대중은 그들에게 역시 일관성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대중은 그들이 단순히 정체되어있는 현상이나 특권층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만을, 위의 인용에서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을, 바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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