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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바운드 하트
클라이브 바커 지음, 강동혁 옮김 / 고블 / 2025년 10월
평점 :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다가 — 고드핸드(수도사들)를 비롯해 베헤리트(르마샹의 상자)까지 — 여기에 덧붙여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마저 떠오르게 하는(지옥을 겪고 돌아온다는 측면에서) 클라이브 바커의 작품.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헬레이저>의 고어함이, 비록 텍스트이지만 원작에서도 상당히 잘 표현되고 있다.
알라딘의 램프와 달리 이쪽은 지옥을 경험케 하는 르마샹의 상자 — 비탄의 배열장치 — 를 시작으로 피 칠갑의 그로테스크가 시작되는데, 이야기의 얼개는 이렇다. 복잡한 큐브를 조작해 퍼즐을 푼 주인공 프랭크 앞에 (선악의 개념이 없어 보이는)세노바이트라 불리는 수도사들이 지옥의 포털을 열듯 나타나 모종의(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고, 이에 응한 프랭크는 기대했던 쾌락의 세계가 아닌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 몸부림한 뒤 현실의 사람들을 죽여 흡수하고 신체를 되찾아 탈출하려다가 수도사들에게 들켜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것(사지가 찢겨 해체된다).
(당연하게도, 지니는 램프의 주인을 고통 속으로 끌고 가지 않으며 <쥬만지>는 애교 섞인 장난처럼 보일 터다)
꽤나 징그럽고 불길해 보이는 묘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왠지 모르게 매력적으로 읽힌다. 글쎄, 어째서일까. 쾌락주의자인 프랭크를 위시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동생 로리, 프랭크와 불륜 관계였던 로리의 아내 줄리아, 로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커스티까지, 인간이 인간을 탐하고 쾌락을 좇으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모습을 그 총체라고 할 법한 세노바이트를 통해 그린 '본능의 현현' 때문이 아닐는지.
더불어 여기에 최초 프랭크가 쾌락을(사도마조히즘에 기반한) 기대했으나 수도사들은 그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만을 안길 뿐이라는 발단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도입에서 프랭크가 조작하는 신비로운 아티팩트, 그가 수도사들에게 끌려가기 전 마스터베이션의 흔적으로 방바닥에 남은 정액에 다른 사람의 피가 더해져 자신의 부활(!)을 돕는다는 설정, 파우스트의 계약이 프랭크에겐 시작부터 잘못된 약속이라는 것과 같은 괴기스럽고 기이한 묘사도 한몫할 것이다.
애초 열지 말았어야 할 상자는 욕망이 고통을 불러온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또한 프랭크를 고통에 빠뜨리는 수도사들은 악의 존재가 아니다. 고통과 쾌락, 지옥과 낙원의 구분을 하지 않을 뿐. 따라서 피 칠갑의 고어가 고통 찬미의 세계관으로, 징그러운 외피가 고통의 쾌락으로 변모하는 흐름 속에서— 프랭크 또한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살지만 살지 않고 죽지만 죽지 않는 것) 무언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어둠을 통과해 본 자만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어둠에서 가져온 모든 것은 외부 세계의 밝음 속에서는 무용할 뿐이다"는 장 아메리의 말마따나 프랭크는 어정쩡하게, 육체의 붕괴와 인간성의 훼손으로 말미암아 보통의 감관을 상실한 채로 떠돌고 만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극적 이야기가 독자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바로 프랭크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실재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완전히 다른 질서, 겪어보지 못한 것에 도달하는 것은 쾌락과 고통 어느 것에나 해당할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같음도 없고 절대적인 다름도 없다. 당사자를 이끌어줄 지표 따위 없을는지도 모른다. 프랭크는 사후의 삶과 현세의 삶 모두를 경험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며, 그를 바라보는 독자의 관음적 태도는 — 썩 괜찮긴 해도 —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폭력과 고통을 우리 삶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프랭크라는 인물로 표현되듯, 그 경계 어디쯤엔가 주저앉은 채 영원토록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