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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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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씨네샹떼』와 같은 책은 가혹하다. 『씨네샹떼』엔 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택시 드라이버>도 없고 이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버디>도 없으며, 이 세계에서 가장 머저리 같은 <위대한 레보스키>도 없다. 히치콕의 <싸이코>보다는 <이창>이 실려 있었으면 했고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보다는 <라임라이트>를 얘기했으면 싶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내가 줄기차게 인간에 대해 곱씹는 것은, 누가 됐든지 간에 무엇을 만들 때보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한다는 습성이다. 때문에 동시에 드는 생각, 나는 이렇게 봤는데 이자들은 왜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거지(1. 생각의 차이 혹은 전문가 집단의 전문가답지 않음), 정말 감독이 작정하고 의도한 게 맞기나 하는 건가(2. 헛다리 짚기), 고작 시계 하나와 쥐 한 마리를 가지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 같은데(3. 꿈보다 해몽), 그럼에도 이 부분은 기발했어(4. 이제야 좀 낫네), 등등.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런 습성에서 기인한 저마다의 다종다양한 해석은 재미있는 것이며, 그 흥미가 충족되려면 고교 수능 모의고사 언어영역에서 이러쿵저러쿵 미주알고주알 주저리주저리 씨불이는 답안지의 천편일률적 보기 항목과는 반드시 달라야만 할 거다. (특히 이 책에서는 강신주가 조금이나마 어깨의 힘을 뺀 듯한 느낌인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일상을 걷어내는 효과를 얻는 동시에 편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비일상을 걷어낸 만큼 안정적 일상이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강신주와 이상용은 <싸이코>에서 일반 귀신론을 맛보려 하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보수의 '지켜라'와 진보의 '변해라'를 읽고자 하며 <동경 이야기>에서는 비극적 무화(無化, 그러나 이건 때로 적극적인 무엇일 수도 있다)를 본다. 그런가하면 책에서 유일하게 간택된 한국영화 김기영의 <하녀> 또한 눈에 띈다. 어딘지 모르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만(卍)」이 떠오르는데, 다니자키의 소설에서건 김기영의 영화에서건 얽히고설킨 남녀의 섹스어필, 더러움과 추잡함(이것이 모든 인간의 진실 아니던가!)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나는 책에 실린 영화들 중 <하녀>에 관한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다만 나는 섹스와 가족의 해체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으며 섹스라는 행위가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 위에서 어떤 양태로 움직이는지가 흥미로울 뿐이다. 물론 이상용의 '이름 없는 하녀' 분석은 꽤나 유효한데, 김기덕의 <나쁜 남자>의 시작에서 한기가 선화에게 강제로 키스하는 것 역시 빌어먹을 계급(의식)을 동등의 것으로 뒤집어버리는 쾌감을 준다(그러고 보니 이 영화도 『씨네샹떼』에는 없군). 이름 없는 하녀가 동식을 추락시키듯 한기 또한 선화를 끌어내리는 거다. 1. 하녀 따위가 집주인 부부를 농락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2. 깡패 따위가 여대생과 벤치에 나란히 앉을 수가 있는가? 어느 쪽이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는 것은 남녀라는 차이만 있을 뿐 명백히 계급 아래쪽에 있는 자다. 그리고 양쪽 모두 하녀의 지위가 상승되거나 깡패의 지위가 상승되지 않는다. 고매한 척만 할 줄 아는 집주인 부부는 '이름 없는 하녀'와 같이 되고 '나 이래봬도 여대생이에요' 티를 내는 여자는 순식간에 매춘부가 된다. 심지어 <나쁜 남자>의 여대생은 서점에서 몰래 책을 찢어가며 주운 지갑을 가지고 화장실로 도망한다. '이래도 깡패와 여대생이라는 상징이 같은 고깃덩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역력하다. 너무도 역력하다) 비단 영화뿐 아니라 소설이건 뭐건 이야기의 매력과 힘은 무궁무진하다. 보통 나는 재미를 얻기 위해 그것들을 취하는데, 개중엔 이런저런 반성과 성찰을 위해 서점과 극장에 가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어떤 경우든 다 좋다. 작가와 감독이 의도했다고 여겨지는 바를 고스란히 인지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심지어 나는 다 보고(읽고) 난 뒤 당최 줄거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 라고 만족하기만 해도 좋다고 본다. 예술은 만족감을 주건 당혹감을 주건 응당 쾌감과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냐는 것. 예술을 난도질하며 갖가지 방법으로 풀이하는 것과 더불어 그걸 곁눈질하는 것 또한 재미있고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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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중봉기>
외국인이 쓴 한국의 민중봉기. 광주항쟁에 매료되었다 한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한국 풀뿌리 민중권력은 2015년 현재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 얼마나 살아남았는가?



<여성의 남성성>
페미니즘, 레즈비어니즘, 퀴어, 제도적 이성애, 젠더 이원론. 그리고 남자 없는 남성성, 남성적 퀴어 여성들의 다른 삶.



<인문정신으로 동양 예술을 탐하다>
동양 예술과 동양 미학의 기본서이자 안내서이며, 특히 동양 미학이론의 가장 큰 차별성은 논리적 추론이 기대지 않는 거란다. 서지정보에서도 밝히듯 엄밀함의 부족으로도 느껴지기도 하나 그럼에도 충분히 읽어봄직한 책.



<데드핸드>
냉전 무기 경쟁의 역사를 다룬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 공식 외교전과 밀실 외교, 첩보전 현장까지 복원했다는 책. 냉전은 영원하다.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이름 대신 사용했던 호. 이름과 달리 그 주인 스스로가 지을 수도 있는 호.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호가 가지는 의미와 뜻풀이는 시대 상황과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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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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긋지긋하다. 돈 안 쓰기, 고집대로 안 되면 패악 부리기. 내 할아버지와 똑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다만 위안이 되는 건 이번엔 현실이 아닌 소설이라는 것 정도. 오베와 내 할아버지는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경우 온갖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면서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했)다.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노인. 하나 소설 속에선 오베를 구출하기 위해 이웃들이 등장한다. 말 안 듣는 아이 둘과 아이들의 엄마, 뭐든 손만 댔다 하면 일을 망쳐버리는 남자. 그럼에도 오베라는 남자를 그악스럽게만 볼 수 없었던 건, 그는 결국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젠장, 끝까지 말이다. 그게 그리도 간단한 일인가? 사람 하나가 자신과 연결된 세상 하나를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 『오베라는 남자』는 읽으면 읽을수록 요나스 요나손의 작품과도 얼추 비슷한 감상을 주기도 하는데 희한하게도 두 사람 다 스웨덴 출신이다. 그리고 양쪽 모두 유쾌하다. 배크만의 오베 쪽이 조금이라도 더 현실 감각에 가깝고 요나손의 알란보다는 더욱 확고한 신념(꼬장꼬장한 융통성 없는 성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유쾌하고 건강한 웃음을 주는 건 매한가지. 오베에게 그를 성가시게 하는 자들은 죄다 쓸모없는 놈팡이들이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죄다 얼간이로 치부될 뿐이다. 그리고 오베는 한시라도 빨리 죽은 아내의 곁으로 가고 싶어 한다.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지만 엉망진창 이웃들로 인해 그마저도 쉽지 않다. 태어난 것도 타의로 시작된 것인데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59세 남자 오베.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내 할아버지는 제외하고)? 그리고 정말 그의 지금까지의 인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그의 삶에 생긴 균열은 단지 새 이웃이 오고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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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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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포장지 홍보 문구에 쓰인 알파벳 수 따위를 세어보는 사람이 쓴 책을 말이다. 자, 일단 포테이토칩이다. 가격이 비싼 칩은 '더 많이' 혹은 '더 적게'와 같은 비교급 접미사, 그리고 '절대 튀기지 않은' 또는 '우리는 천연 감자의 맛을 씻어버리지 않는다'처럼 부정적 표시가 많이 들어가 있단다. 가만 보니 어느 쪽이건 타사의 제품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상품을 비교 우위에 두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런데 심지어 이자는 회귀분석법이란 것을 활용하면서(이게 뭔지는 나도 헛갈린다) 포테이토칩 봉지에 부정적인 단어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약 10g 당 1.5원씩 가격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도 밝혔다. 실제로 광고업자들이 제품 가격을 올리기 위해 홍보 문구에 부정적 단어를 사용한다고는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신기한 결과일 따름이다. 여기서 '비교'와 '부정'의 언급은 소비자를 현혹한다. 본 모델은 기존의 제품에 비해 ○○○기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 휴대전화는 현재 최고급 사양인 타사 제품보다 □□면에서 더 뛰어납니다……. 이런 식이다(이 책의 띠지에 적힌 '7만 명이 수강한 스탠퍼드대 대표 교양 강의!'라는 카피는 물론이거니와 '△△△상 수상작'이나 '△△상 수상 작가'라는 문구는 어떨까?). 그러므로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물건을 구입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는 '내가 이걸 사서 쓰면 다른 사람들과 구분이 되겠지' 내지는 '이런 건 비싸서 아무나 못 살 거야, 이제껏 시중에 나온 머저리 같은 기계들보다는 훨씬 나아' 거기에 더해 '어쩜! 이건 최고 품질의 천연재료만 사용했네?' 하면서 자연스럽게 계산대에 그 물건을 들고 간다. 소위 '상류계급의 구별 짓기'랄까. 물론 『음식의 언어』가 비단 제품의 포장지 문구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음식의 세계지도처럼ㅡ 음식의 이름에서부터 그것의 어원을 따지는가하면 특정 음식의 유래(어릴 적 케첩이 중국어인지 영어인지 친구들과 내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책에서 확인하시라), 맛집 리뷰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는 사람들, 음식의 대중화 과정, 새로운 음식의 탄생, 상품명의 소리(발음: 전설모음과 후설모음)에 따라 소비자가 느끼는 감정……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누구나가 궁금해 하지만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것에 이르기까지 대모험 혹은 파헤치기(까발리기!)를 감행한다. 대체 메뉴에 쓰인 단어가 길어질수록 음식 값이 비싸진다거나 맛집 리뷰에서 섹스 관련 단어가 많이 언급될수록 고급 레스토랑일 수 있다는 걸 누가 연구하겠느냐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ㅡ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기꺼이 권할 만한 '맛있는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물론 함께 마주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싶지는 않지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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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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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맞는 사과, 쪼아 먹히는 사과, 잡아 떼이는 사과, 땅에 떨어지는 사과, 썩는 사과, 운반되는 사과, 소화되는 사과, 소비되는 사과, 사과라 부를 필요도 없는 사과……. 징그러울 정도로 사과를 고집하는 시인의 글이다(시 전문은 더 징글맞다). 시는 시인의 감정 표현을 넘어서 때때로 언어 자체에서 이어지는 연상과 상상, 결합, 해체, 조탁, 실험에 의해 깨지고 부서지기도 한다. 존 스튜어트에 의하면 서정시는 곧 엿듣는 발화이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어떤 이야기를 엿듣게 될 때, 우리가 전형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발화자와 문맥을 재구성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다.(조너선 컬러 『문학이론』) 비단 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그 대상이 운문이라면 한층 유달리 이런 자세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텍스트 하나하나의 가리킴과 방향은 물론이거니와 발화자의 태도(혹은 성격)를 감상하고 상상하며 엿듣는 거다. 나는 시집에서 처음 언급한 표제작 「사과에 대한 고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시집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다. 어쩌면 그 때문에 마음에 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시의 삼분의 일가량은 사과에 관한 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사과에 대한 모습이 나오긴 하나 그 역시도 어느 찰나의 사과를 그대로 나열한 듯이 무미건조할 뿐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반복적으로 읽다 보면 오로지 사과만 남고 아무것도 없게 된다). 시인에게 이런 취급(정의됨)을 받는 사과로선 불행할지도 모르겠다(정의된 순간 그 정의 자체를 증명해야 한다는 식의 어렵고 난해한 메커니즘은 모르겠으나 사과의 입장에 서면 자신을 지독히도 고집하는 자, 혹은 지독할 만큼 자신에게 충실한 자가 마냥 탐탁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이 세계에서 시인에게 선택되어 불행하지 않은 삶은 사는 대상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양반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을 멍하니 기다릴 때가 많다고 밝혔는데, 그러면서 남의 눈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도 썼다. 어딘가에서 귓결에 얻어듣기로, 작가란 가만히 있을 때야말로 진정으로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다니카와 슌타로도, 시인인 자신이 일반적인 노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혹 시인이 안개를 먹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아한 마음을 품고 있다(어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시인은 밥이 아닌 안개를 먹는 건지도 모른다(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렇기에 사과를 향한 집착도 보이고(「사과에 대한 고집」) 방귀 뀔 때 나는 소리도 정밀히 연구하는가하면(「방귀 노래」) 어느 때는 시 자체의 태생적 전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거다(「2페이지 둘째 줄부터」).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시/시인의 그럴싸한 허무맹랑함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내가 이 시집에 대해 고집을 부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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